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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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은 있는 세계를 재현하려는 욕구에서 유래하기도 하지만, 있어야 할 세계를 창조하는 의지에서 발원하기도 한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픽션의 본질일 것이며, 선화의 선경은 바로 작가가 자신을 포함, 인간의 그 보편적인 꿈을 반영한 시공이라고 하겠다.
『열선전』의 작품들에서 선경을 모두 조명하고, 단서에 의거해 추정하면서 탐색해보았다. 선경에 관련된 작품은 70편 중 24편이었다. 선경의 소재를 점검해본 결과, 천상, 산, 섬뿐만 아니라, 강과 세속에도 있었다. 천상 선경 15편, 명산 선경 2편, 해중 섬 선경 2편, 강 선경3편, 세속 선경이 2편이었다. 이러한 수치에서 알 수 있듯 『열선전』의 시대는 천상 선경이 더 동경되던 시대였다.
선경을 유일하게 형상화한 「한자」에서 선경의 체제의 윤곽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선경은 세속과 차원을 달리하지만 세속의 사람들이 비상한 경로나 영물에 힘입어 입경할 수 있다. 둘째, 선경은 세속의 궁궐과 같은 구조이고 세속과 같은 일상이 있으며, 선경에서 거주하는 신선들에게는 위계와 직임이 있다. 셋째, 세속은 액운과 질병이 야기되는 부정한 시공이지만 선경은 그것들이 모두 제거된 청정한 시공이다. 넷째, 선경의 신선들은 세속의 환난과 고통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구제하려 한다. 다섯째, 세속과 선경을 왕래하는 선경의 사자와 영물은 애초에 상급 신선의 점지로 세속과 선경에서 성장한다. 여섯째, 세속과 선경의 소통에 기여하며 선도의 세속 전파에 공덕을 이룬 사람도 신선이 될 수 있다. 일곱째, 신선이 되면 기존 신선처럼 세속 사람들을 여러 환난으로부터 보호하고, 세속 사람들은 그 은택을 존앙한다. 이 중 둘째가 주목된다. 선경은 불사(不死)를 성취한 신선들이 거주하는 시공이긴 하지만 당시 봉건 세속과 다른 세계가 아니었다. 이 체제는 막스 베버가 부각한 ‘가산관료제’의 오랜 지치(至治)의 이념이 투영되어 있다.
『열선전』의 선경 체제에 내포된 가치를 탐색하였다. ‘신선’은 ‘인간의 승화’이고 ‘영물’은 ‘동물의 승화’이며 ‘선경’은 ‘세속의 승화’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선경에서 거주하는 익명 신선들과 선경에서 세속으로 돌아온 신선들이, 세속에서 문제시하며 극복을 시도하는 사안이 무엇인지 검토하였다. ‘순조로운 농경’, ‘가족애’, ‘불의 권력 부재’, ‘재해 예방’, ‘질병 치료’, ‘마음의 정화’, ‘이용후생’, ‘선도 구현’, 8가지였다. 신선들이 세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들은 그들이 신선이 되기 이전에 애초에 바라던 이상이며, 그 이상의 실현이 바로 ‘세속의 승화’이고, ‘세속의 승화’는 신선들의 궁극 소망이었다. 선경은 또 기존의 이상향 유형인 밀레니움(천년왕국), 유토피아, 아르카디아와도 체제가 다르다.
이러한 선경을 당대의 사정과 병렬시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전쟁과 질병, 기아와 천재지변, 권력의 횡포와 비리에 시달려온 민중을 고려하면 그 가치들의 실현은 요원하였다고 하겠고, 그 가치들이 실현된다면 이상이 구현된 이상사회, 즉 선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열선전』의 선경은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각성하고 개선의 비전을 제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자 보다 나은 사회로 가는 에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