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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SN : 1598-317X / eISSN : 2713-8992

2020 KCI Impact Factor : 0.66
목적과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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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1. 군사편찬연구소 본연의 임무인 군사사 연구 편찬    2. 전통시대~근현대 국내외 전쟁사 및 군사사 연구    3. 군사사의 연구영역 확장, 연구수준 향상   범위    1. 국내외 군사정책⋅제도⋅전사에 관한 역사학적 내용    2. 기타 군사지 성격에 적합한 한국의 국방 및 안보와 유관한 정치⋅외교⋅군사분야에 관한 내용    3. 1, 2호와 관련된 연구논문, 서평, 연구동향, 자료소개, 연구논문 번역 등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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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헌용 (군사편찬연구소)
인용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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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 IF(2년) : 0.66
  • KCI IF(5년) : 0.6
  • 중심성지수(3년) : 0.971
  • 즉시성지수 : 0.2917

최근발행 : 2021, Vol., No.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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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정부의 항공력 건설 노력(1948~1950)

    이지원 | 2021, (121) | pp.1~37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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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에 북한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한국군의 4배 정도였다. 그 후로 격차는 계속 커져서 6ㆍ25전쟁 발발 직전에는 10배에 달했다. 압도적인 항공력 열세로 인해 한국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억제력이 약화되었고, 전쟁 초기에 기계화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1949년 이후 북한의 항공력 증강에 대응하여 항공력을 건설하려는 한국의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이 논문에서는 그 실패의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분석한다. 정부를 구성한 직후 이승만 정부는 B-25폭격기를 포함한 공격형 항공력을 건설하려했으나, 이러한 목표는 미국의 대소봉쇄정책과 충돌했다. 미국은 한국에는 연락기 12대 정도로 구성되는 항공분견대 정도가 적당하다는 기준을 수립했다. 1949년 봄이 되자 북한에 대한 항공력 열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이승만 정부는 방어형 항공력을 건설하겠다는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원조를 요청했으나 미국은 기존의 기준을 고수했다. 1950년 초가 되서야 미국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한국에 대한 항공력 원조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은 항공기가 도입될 경우 신속하게 항공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선 인력을 충원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트루먼 정부의 대응은 느렸고, 항공력 원조가 실행되기 전에 북한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은 북한에 대한 항공력 열세를 극복하려는 한국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시기에 충원된 인력과 조직은 전쟁이 발발한 직후 항공기를 지원 받았을 때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당시 수립했던 항공력 건설의 청사진은 전쟁 기간 중 한국의 항공력 건설노력의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 吳光鮮의 생애와 만주 독립군 활동

    김명섭 | 2021, (121) | pp.39~70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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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선은 경기 용인 출신으로 부친의 항일의병 활동을 이어받고 고향의 스승인 여준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서간도의 독립운동 기지인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졸업한 후 교관 활동과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실전부대장으로 한국·중국 연합군을 이끌고 각종 전투에 참여하며 전장을 누비는 활동을 펼쳤다. 여준 선생의 사망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명에 따라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 양성간부로 활약하였다. 나아가 그는 일본군 점령지역인 베이징으로 잠입해 첩보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 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장을 맡아 임정의 환국을 도왔으며, 국군 창설에 참여해 복무하다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전형적인 항일·건국 군인이다. 나아가 자녀 둘과 사위까지 독립운동 일선에 매진하였다. 실로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참여 가문으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라 하겠다. 오광선의 일생은 항일 독립운동과 자유한국 건설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항일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참여해 많은 기여를 하였다. 자유한국 건설에 뿌려진 그의 삶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거대한 뿌리임에 틀림없다.
  • 1945년 8월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의 웅기·나진상륙작전 연구

    박희성 | 2021, (121) | pp.71~99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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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1945년 8월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의 웅기상륙작전과 나진상륙작전을 살폈다.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참전하였다. 소련 지상군은 만주를 공격하면서 일본 관동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차후 작전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진공하였다. 북한지역에서 소련 지상군보다 활약을 한 것이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였다. 소련 해군은 북한 지역의 항구를 점령하여, 일본 관동군의 후퇴와 증원을 방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대는 1945년 8월 9일과 10일 웅기, 나진, 청진의 일본 해군 기지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는 1945년 8월 11일부터 웅기항을 공격하였다. 웅기항 점령작전은 함대사령부 정찰부대와 육전대가 작전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2일 상륙부대는 큰 저항 없이 웅기항과 웅기시를 점령하였다. 나진 상륙작전은 8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역시 함대사령부 정찰부대와 육전대가 작전을 담당하였다. 나진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일본군의 방어체계는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정찰부대는 나진항을 먼저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주상륙부대는 13일 오전에 상륙을 완료하였다. 이어서 웅기시와 외곽 고지들을 점령하면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대초도와 소초도의 일본군을 소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