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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SN : 1598-2076

2020 KCI Impact Factor : 0.47
목적과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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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회는 한국 고전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술연구단체이며, 인접 학문영역인 현대문학과 역사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연구를 지향한다. 국문학은 국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정신을 유지하고 그 역량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우리 문화와 역사의 전통을 간직한 고전문학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이는 도남 조윤제의 『국문학사』나 가람 이병기의 『국문학사』 등의 초창기 저술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학회는 이러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진중함을 계승하기 위해 그 명칭을 “국문학회”로 유지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국문학회”라는 명칭 하에 고전문학 연구와 현대문학 연구가 단절 또는 분화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점을 고전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국문학회는 1983년 6월 창립한 이래로 총 90회의 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하였다. 1997년 7월에는 학술지인 『국문학연구』를 창간하였으며, 현재는 매년 5월말과 11월말의 2회에 이를 간행하고 있다. 국문학회에서는 총 42권의 학술지 이외에도 11권의 단행본 연구서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통해 학회 창립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고전문학 연구에 중심을 두면서도 고전문학과 현대문학과의 연속성을 탐구하고 고전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탐색하는 학술 연구의 방향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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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인용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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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 IF(2년) : 0.47
  • KCI IF(5년) : 0.53
  • 중심성지수(3년) : 1.271
  • 즉시성지수 : 0.0667

최근발행 : 2021, Vol.,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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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병의 불안에 대한 서사적 · 극적 처방전: '손님굿'의 신화와 놀이를 중심으로

    조현설 | 2021, (43) | pp.7~35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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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은 집단적 불안을 조성한다. 손님굿은 두창이라는 불안에 대응하기 위한 의례적 처방이었다. 손님굿에는 두 가지 처방전, 곧 서사적․극적 처방전이 제시되어 있다. 손님굿의 서사는 압록강을 건너온 전염병을 손님신으로 인식한다. 먼저 손님신을 문신․호반․각시, 3위로 설정한다. 이는 여신 각시손님이 두 남성신의 대립을 통합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립하는 것은 각시손님을 대접하는 영접자들의 환대와 적대이다. 뱃사공과 김장자가 적대한다면 노고할미는 환대한다. 손님신들의 화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주체의 태도이다. 정성을 다하면 손님신을 피할 수 있다. 손님신은 동해안 굿에서 넷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이는 무당의 착각이나 관용적 변형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다. 네 번째 손님신 세존손님은 손님굿에 앞서 연행되었던 세존굿의 주신으로 가택신이자 조상신이다. 세존손님은 손님굿에 파견된 세존신이다. 네 손님신 구조는 세 손님신 구조가 변형된 것으로 각시손님의 중개적 위상이 세존손님으로 전이된 결과이다. 외부의 손님신들과 내부의 가신들의 대립 구도에서 가신이자 손님신인 세존손님은 중개자가 된다. 이런 서사적 처방전은 손님굿의 뒤풀이로 연행되는 굿놀이에서 극적 형태로 재현된다. 극을 주도하는 막둥이는 손님신을 박대한 김장자의 삼대독자이다. 두창으로 죽은 아이를 손님신을 모시는 마부로 배치함으로써 병사한 원혼과 아이 잃은 기주와 단골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세존손님과 같은 중개자의 위상을 부여한 것이다. 천연두가 사라진 현재의 굿에서 막둥이는 별비를 얻기 위한 희극적 배역이지만 과거 별상굿에서 막둥이는 손님신을 달래는 구실을 수행했다. 손님굿의 서사적․극적 처방은 의학적 처방과 상동성을 가지고 있다. 의서들은 태독이라는 내인이 사기라는 외인을 만날 때 천연두가 발병한다고 해석하는데 이는 손님신을 주체가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 질병의 발생과 경중이 달라진다는 굿의 해석과 흡사하다. 외부에서 씨앗을 배양한 뒤 아이의 신체에 주입하여 면역체계를 구축하는 종두법과 천연두로 죽은 막둥이, 또는 세존신을 손님신의 내부로 파견하여 백신의 기능을 수행토록 한 의례의 처방도 혹사하다. 이는 인간의 몸과 마음, 의술과 의례를 통합적으로 사유했던 굿의 전통, 또는 동아시아의 통합의학적 사유가 빚은 상동성이다.
  • 온전하지 못한 몸과 마주보기: <도천수관음가>와 <처용가>의 질병, <노처녀가>의 장애, <덴동어미화전가>의 사고

    서철원 | 2021, (43) | pp.37~68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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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고전시가에 나타난 온전하지 못한 몸의 사례와 연관된 시적 화자의 마주보기를 통해 질병, 장애, 사고 등의 소재와 관련된 기원과 내면 성찰의 방식을 조명하고자 한다. 8세기 중반 경덕왕대의 <도천수관음가>는 눈먼 어린이와 관음보살의 마주보기를 통해 자비와 회향의 과정을 묘사하였으며, 개안한 어린이가 다른 중생들을 마주하며 이 회향이 확산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고려속요 <처용가>는 처용이 열병신을 마주 보며 자신의 인격적 원만함을 통해 그를 감화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적대적 서술자가 열병신을 마주 보며 저주와 ‘머즌말’을 하면서 입체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속요 <처용가>는 향가와는 달리 병에 걸린 사람이 처용의 아내만이 아닌 불특정 다수이기도 했으므로, 이렇게 열린 상황에서 병 그 자체인 열병신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이렇듯 향가와 속요의 화자들은 병과 신을 의인화한 초월적 존재로 상상하고 직접 마주 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훗날 조선 후기의 서사가사 <노처녀가>와 <덴동어미화전가> 화자는 이렇게 초월적인 존재를 마주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장애와 결혼이라는 문제에 휘말린 자신의 과거와 현재 상황을 마주 본다. <노처녀가>의 전반부에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 보며 장애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개인적 차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 문제의식은 약화한다. 다른 장애인의 고통까지 공감하기에 이르지는 않았다. 한편 <덴동어미화전가>의 주인공 역시 여러 차례 사고 또는 전염병으로 남편을 잃고, 인생의 꽃에 해당하는 자식도 화상을 입는 파국을 경험했다. 하지만 자신과 아들의 불행을 자신만의 경험으로 한정하지 않고, 청춘과부와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공감대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자신 또는 그 자식이 온전하지 못한 몸을 지닌 상태에서 신, 병,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전망 등을 마주 보면서, 각자의 시대에서 화자들은 기원과 자기 성찰의 체험을 심화하기도 했다.
  • 『흠영(欽英)』에 기록된 감염병의 경험: 1786년 서울의 홍진(紅疹) 유행을 중심으로

    김하라 | 2021, (43) | pp.69~98 | 피인용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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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감염병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 여기서 감염병의 과거를 살피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유만주(兪晩柱)의 『흠영(欽英)』에 남은 감염병의 기록을 들여다보았으며, 그 중 서울에 홍역이 창궐한 1786년 3월부터 6월까지 유만주와 주변 인물들의 질병 관련 경험을 중점적으로 검토했다. 당시에 크게 유행한 홍역은 국왕 정조(正祖)의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목숨마저 앗아갈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이러한 때에 유만주는 자신의 가족, 특히 어린 아우와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의료 지식을 총동원하고 전문 의료인을 만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며 그 결과 홍역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유만주의 부유한 친척인 유준주(兪駿柱)와 유산주(兪山柱)도 각자의 지식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감염병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반면 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의 상황은 달랐다. 유만주의 고종사촌 김이중(金履中)은 서울의 사대문 밖에서 극빈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자녀 둘이 감염되었음에도 의원을 만나 약을 처방받을 경제력이 없어 괴로워했다. 또한 유만주의 집에 함께 거주하던 행랑사람의 자녀는 홍역이 창궐한 직후에 감염되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사례는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감염병을 겪는 양상이 판이하며, 사회적 약자들이 감염병에 더욱 취약함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흠영』에 기록된 감염병의 경험으로 보건대, 감염병 자체는 자연발생적이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같은 감염병을 만나도 그로 인해 받는 고통과 피해는 질병을 겪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상이함을 이 일기의 기록은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감염병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1786년, 감염병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해 국왕 정조가 보인 노력과 그 결실로서 감염병의 종식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희망을 준다. 정조는 홍역으로 후계자를 잃은 슬픔을 억누르고 의료소외계층을 위한 국가 의료 시스템의 적극적 운영을 독려했으며, 세자의 치료에 실패한 의원을 처벌하라는 공소한 담론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혜민서와 활인서의 담당자를 독려해 백성의 구호에 집중하도록 했다. 결국 정조의 조정에서는 1786년 6월 29일, 홍역의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