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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title>Journal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journal-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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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n pub-type="ppub">1226-4075</issn>
			<issn pub-type="epub">2287-786X</issn>
			<publisher>
				<publisher-name>The Society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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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HSSSBH_2024_v36n1_1</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7730/JSCM.2024.36.1.1</articl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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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Articles</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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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title>The Meeting between Dongmu Lee Je-ma and Nosa Ki Jung-jin</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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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title>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와 노사(蘆沙) 기정진(奇正鎭)의 만남</tran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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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rname>Park</su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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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el>1</label>
					Department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Dongguk University Bundang Oriental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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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el>1</label>
					동국대학교 분당한방병원 사상체질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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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 pub-type="ppub">
				<day>29</day>
				<month>03</month>
				<year>2024</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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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lume>36</volume>
			<issue>1</issue>
			<fpage>1</fpage>
			<lpage>12</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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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27</day>
					<month>02</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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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date-type="accepted">
					<day>08</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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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statement>Copyright @ 2024, The Society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24</copyright-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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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cense-p>&#9400;The Society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All rights reserved. This is an open a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licen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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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sec>
					<title>Purpose</title>
					<p>To investigate the impact of Nosa Ki Jung-jin on the development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by Dongmu Lee Je-ma.</p>
				</sec>
				<sec>
					<title>Objectives and Methods</title>
					<p>To establish the correlation between Nosa and Dongmu through an analysis of &#12302;Nosajip(蘆沙集)&#12303; and &#12302;Nosaseonsaengyeonwonrok(盧沙先生淵源錄)&#12303;.</p>
					<p>Conclusion</p>
					<p>1. While it is not definitive to assert that Lee Mupyeong, referenced in the &#8216;SongLeemupyeongBukgwiseo(送李務平北歸序)&#8217; of &#12302;Nosajip&#12303;, is Dongmu, there exists a strong probability that he is indeed Dongmu.</p>
					<p>2. Dongmu Lee Je-ma's name does not appear among the disciples listed in &#12302;Nosaseonsaengyeonwonrok&#12303;, and the &#8216;SongLeemupyeongBukgwiseo&#8217; is only found in the third edition of &#12302;Nosajip&#12303;.</p>
					<p>3. It is challenging to attribute Dongmu's development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solely to his exposure to Nosa's teachings during his youth.</p>
				</sec>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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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group kwd-group-type="author" xml:lang="en">
				<kwd>Dongmu</kwd>
				<kwd>Lee Je-ma</kwd>
				<kwd>Nosa</kwd>
				<kwd>Ki Jung-jin</kwd>
				<kwd>Nosajip</kwd>
			</kwd-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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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dy>
		<sec sec-type="intro">
			<title>&#8544;. 緖論</title>
			<p>동무 이제마(1837-1900)가 &#12302;격치고(格致藁)&#12303;와 &#12302;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12303;을 저술하여 세상에 알려진 사상의학은 유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학문 계통이나 사승관계에 대해서 명확한 자료는 없다.</p>
			<p>그동안 사상의학계에서는 구전으로 동무 이제마가 전남 장성의 노사(蘆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찾아가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1), 홍순용2)은 동무가 노사를 존경하였다는 내용과 &#12302;명선록(明善錄)&#12303;을 보고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 1709- 1791)를 존경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외에 김달래 등3)은 이제마의 학문적 연원에 대해 &#8220;노사 기정진과의 교류는 노사가 사망(동무 42세)하기 전까지 계속했다고 보더라도, 동무가 30&#8764;40대 초반까지가 주를 이룰 것이며 이제까지의 경서(經書)를 통한 자기의 학문, 사상을 바탕으로 당시의 거유(巨儒) 노사와 유학 전반에 걸쳐 문답함으로써 자기사상의 독특한 세계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8221;라고 하였고, 또 &#8220;동무 이제마는 이이 - 유형원 - 이익 -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했으며,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었다&#8221;라고 하였으나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준희 등4)도 동무가 노사의 &#8216;리(理)의 주재성 강조&#8217;와 &#8216;리분원융(理分圓融)&#8217;의 논리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측면이 있다고 하였지만, 동무와 노사의 연계에 대하여 확실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고 하였다.</p>
			<fn-group>
				<fn id="N0001">
					<label>1</label>
					<p>이제마가 전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을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시기와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중국 연변의 朝醫學계에서도 구전 형식으로 전해진다.</p>
				</fn>
				<fn id="N0002">
					<label>2</label>
					<p>홍순용. 동무 이제마전. 대한한의학회지. 1964;2(4):3-5.</p>
				</fn>
				<fn id="N0003">
					<label>3</label>
					<p>김달래, 고병희, 송일병. 동무 이제마의 학문적 연원과 사상의학의 형성시기에 대한 연구. 사상의학회지. 1990;2(1):1-21.</p>
				</fn>
				<fn id="N0004">
					<label>4</label>
					<p>이준희. 이의주, 고병희. 東武와 蘆沙의 思想的 연계 가능성에 대한 고찰-理氣관계를 중심으로-. 사상체질의학회지. 2011;23(1):12-23.</p>
				</fn>
			</fn-group>
			<p>그동안 저자도 동무의 생애와 사상, 사상의학의 형성과정과 연원 등에 관심을 갖고 노사와 동무의 만남이나 영향에 대하여 다양한 방면으로 자료를 찾았지만5),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박명희 등이 번역한 &#12302;노사집 5&#12303;6)에서 &#8216;북쪽으로 돌아가는 이무평을 보내며 지은 글&#8217;에 대하여 동무가 노사의 제자7)라고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언급에 대해 저자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바와 다른 점 때문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 채로 여러 해를 보냈다. 이에 저자는 그동안 동무와 노사의 만남과 그에 따른 영향을 찾아보고 확인한 결과를 보고하고자 한다.</p>
			<fn-group>
				<fn id="N0005">
					<label>5</label>
					<p>박성식. 동무 이제마의 가계와 생애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996;8(1):17-32</p>
				</fn>
				<fn id="N0006">
					<label>6</label>
					<p>이 책은 2015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고전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8216;권역별거점연구소합동번역사업&#8217;의 결과물로 &#12302;&#12302;노사집&#12303; 5&#12303;는 2018년 12월 29일 발행되었다.</p>
				</fn>
				<fn id="N0007">
					<label>7</label>
					<p>박명희 등은 &#8216;북쪽으로 돌아가는 이무평을 보내며 지은 글&#8217;의 각주로 &#8220;이 글은 기정진이 제자 이제마(李濟馬, 1838- 1900)가 북쪽으로 돌아감에 이별에 즈음하여 지은 것이다.&#8221;라고 하고 있다.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옮김. 기정진 지음. &#12302;노사집 5&#12303;. 경기도 파주:경인문화사. 2018:384-385.</p>
				</fn>
			</fn-group>
		</sec>
		<sec sec-type="methods">
			<title>&#8545;. 硏究方法 및 對象</title>
			<p>1. &#12302;노사집(蘆沙集)&#12303;에 있는 &#8216;송이무평북귀서(送李務平北歸序)&#8217;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p>
			<p>2. 노사 관련 자료와 동무 관련 자료를 통해 노사와 동무의 만남과 그 영향을 확인하고자 하였다.</p>
		</sec>
		<sec sec-type="materials">
			<title>&#8546;. 本論</title>
			<sec>
				<title>1. &#12302;노사집(蘆沙集)&#12303;과 &#8216;송이무평북귀서(送李務平北歸序)&#8217;</title>
				<p>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근세 유학을 대표할 만한 학자인 노사는 리기설(理氣說)에 대하여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는데, 보통 다른 주리파의 학자들이 이원적으로 리를 기에 대립시켜 생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일원적으로 보아 유리론자(唯理論者)라고 일컫게 된다고 한다8).</p>
				<fn-group>
					<fn id="N0008">
						<label>8</label>
						<p>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서울:심산. 2010:547. 이 책은 1949년 12월 5일 민중서관에서 출간된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를 저본으로 한 책이다.</p>
					</fn>
				</fn-group>
				<p>노사의 사상에 대한 연구로 철학계에서는 노사의 사상은 유리론적(唯理論的) 성격과 리일분수(理一分殊)와 관련된 성리학계의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연구에서 나아가 더불어 조선말의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으로 당시 사회의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9).</p>
				<fn-group>
					<fn id="N0009">
						<label>9</label>
						<p>김봉곤. 노사 기정진의 사상의 형성과 위정척사운동. 조선시대사학. 2004;30:193-233.</p>
					</fn>
				</fn-group>
				<p>노사는 1798년(무오, 정조22)에 전북 순창군 조동에서 태어나 1879년(기묘, 고종16)에 전남 장성의 담대헌(澹對軒)에서 82세로 돌아가셨는데, 저서로는 &#12302;노사집&#12303;과 &#12302;답문류편(答問類編)&#12303;이 있다. &#12302;노사집&#12303;은 3차에 걸쳐 간행되었다10). 1차 간행은 노사 사망 후 저자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1883년 장성의 담대헌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에 해당하는 이 책은 목록 2권, 원집(原集) 22권 합 11책이다11). 2차 간행은 1898년 장성의 담대헌에서 기우만의 주도로 중간(重刊)하는데, 중간본은 초간본에 비해 일부 증보되거나 삭제된 내용이 있으나, 체제는 초간본을 답습하고 있으며, 목록 편을 맨 먼저 두었던 초간본과는 달리 각 책 머리마다 목록을 분리하여 실었다. 또한 연보와 행장(行狀)을 부록 2권으로 수록하였다. 원집(原集) 22권, 부록(附錄) 2권 합 11책이다12). 3차 간행은 정재규, 조성가, 기우만, 정의림 등 영호남의 제자들이 목판(木版)으로 간행하고자 뜻을 모아, 시문(詩文)을 증보하여 28권으로 재편하고, 부록의 첫머리에 고종이 내린 사제문을 수록하여 1902년 4월 단성(丹城)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3차 간행본의 내용은 권1&#183;2는 시(詩), 권3은 소(疏)&#183;사장(辭狀)&#183;책(策), 권4&#8764;15는 서(書), 권16은 잡저(雜著)로 리통설(理通說), 납량사의(納凉私議), 외필(猥筆) 등이 포함되어 있고, 권17&#8764;20은 서(序), 권21&#8764;23은 주로 건물에 대한 기문인 기(記), 권24는 발(跋), 권25는 잠(箴)&#183;축문(祝文)&#183;제문(祭文), 권26은 비(碑)&#183;묘지명(墓誌銘), 권27은 묘표(墓表), 권28은 전(傳)&#183;행장(行狀)&#183;유사(遺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으로 권1에는 연보(年譜), 권2에는 최익현이 쓴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실려 있다.</p>
				<fn-group>
					<fn id="N0010">
						<label>10</label>
						<p>저자의 노사와 &#12302;노사집&#12303;의 간행에 대한 설명은 梁基正의 노사집 해제에 도움을 받아 작성하였다.  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 편. (標點影印) 韓國文集叢刊 解題 6. 서울:&#12828;헤럴드미디어 인쇄. 2005:293-300.</p>
					</fn>
					<fn id="N0011">
						<label>11</label>
						<p>1차 간행본을 양기정은 &#8216;초간본&#8217;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이 판본을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 일산古3648-08-6 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p>
					</fn>
					<fn id="N0012">
						<label>12</label>
						<p>2차 간행본을 양기정은 &#8216;중간본&#8217;이라 하였다. 저자는 이 판본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청구기호 古811.8749.6 v.5 등록번호081875 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국회도서관에 청구기호古811.8749.6v.8 등록번호081878 소장본도 2차 간행본에 해당한다.</p>
					</fn>
				</fn-group>
				<p>따라서 &#12302;노사집&#12303;은 1차 간행본, 2차 간행본, 3차 간행본이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확인해 본 바로는, 1차 간행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2차 간행본(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국회도서관 소장본), 3차 간행본(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310)에서 모두 편집의 큰 구성에서는 같았지만 포함된 내용에서 차이가 있었다.</p>
				<p>특히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는 3차 간행본에 있었다. 2003년 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2302;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影印標點 韓國文集叢刊) 310&#12303;을 발행하면서 1902년 간행된 3차 간행본을 저본13)으로 하였는데, 서(序)로 구성된 권17&#8764;20에서는 족보서(族譜序)가 대부분이었고, 다음으로 문집서(文集序), 또 송서(送序)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권18에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가 있었다.</p>
				<fn-group>
					<fn id="N0013">
						<label>13</label>
						<p>3차 간행본을 양기정은 &#8216;삼간본&#8217;이라 하였다. 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인 이 목판본을 저본으로 영인하고 표점하여 &#12302;(影印標點) 韓國文集叢刊 310&#12303;으로 발행하였다.  저자는 3차 간행본으로 영인표점된 이 책을 근거로 하였다. 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 편. (影印標點) 韓國文集叢刊 310 (蘆沙集). 서울:&#12828;헤럴드미디어 인쇄. 2003년 12월 30일 발행.</p>
					</fn>
				</fn-group>
				<p>&#12302;노사집&#12303;의 서(序)에 해당하는 부분을 간행 판본별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1차 간행본의 서는 권13부터 권15까지 134편(권13에 40편, 권14에 59편, 권15에 35편)이 있었고, 2차 간행본의 서는 권13부터 권15까지 133편(권13에 44편, 권14에 54편, 권15에 35편)이 있었고, 3차 간행본의 서는 권17부터 권20까지 159편(권13에 44편, 권14에 54편, 권15에 35편)이 있었다. 이 중 족보나 문집에 쓴 글 등은 제외하고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와 같이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글의 형식인 송서(送序)는 1차 간행본에서 8편, 2차 간행본에서 10편, 3차 간행본에서 12편이 있었다. 1차 간행본에 있는 8편은 2차, 3차에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송이달우서(送李達友序)는 2차 간행본에만 포함되어 있으며, 이무평북귀서(李務平北歸序), 송한신지서(送韓信之序), 송오노인찬규서(送吳老人燦奎序)는 3차 간행본에만 있었다(Table 1)</p>
				<table-wrap id="T0001"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label>Table 1.</label>
					<caption>
						<title>An Article of Farewell in accordance with the Publication of &#12302;Nosajip&#12303;</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3062945&amp;imageName=HSSSBH_2024_v36n1_1_t0001.pn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 />
					<table>
						<tbody>
							<tr>
								<td />
								<td />
								<td />
							</tr>
							<tr>
								<td />
								<td />
								<td />
							</tr>
							<tr>
								<td />
								<td />
								<td />
							</tr>
						</tbody>
					</table>
				</table-wrap>
			</sec>
			<sec>
				<title>2. 송이무평북귀서(送李務平北歸序)의 내용</title>
				<p>본 논문의 대상인 &#8216;이무평북귀서&#8217;는 3차 간행본인 &#12302;노사선생문집蘆沙先生文集)&#12303; 권지십팔(卷之十八)에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가 있었는데(Figure 1), 1차 간행본과 2차 간행본에 없었던 내용이 3차 간행본에 추가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p>
				<fig id="F0001"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label>Figure 1</label>
					<caption>
						<title>Original image of &#8216;SongLeemupyeongBukgwiseo&#8217;14)</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3062945&amp;imageName=HSSSBH_2024_v36n1_1_f0001.pn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 />
				</fig>
				<fn-group>
					<fn id="N0014">
						<label>14</label>
						<p>원본 이미지는 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 (影印標點) 韓國文集叢刊 310, (蘆沙集). 서울:&#12828;헤럴드미디어 인쇄. 2003년 423쪽에 있다. 현재 이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의 웹 서비스에서 제공하고 있으며 번역문도 볼 수 있다.</p>
					</fn>
				</fn-group>
				<p>&#8216;이무평북귀서&#8217;의 원본 이미지를 읽기 쉽게 표점하여 옮기고15), 번역16)하면 다음과 같다.</p>
				<fn-group>
					<fn id="N0015">
						<label>15</label>
						<p>표점은 한국문집총간의 표점을 참고하여 저자가 수정하였다.</p>
					</fn>
					<fn id="N0016">
						<label>16</label>
						<p>번역은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등이 번역한 &#8220;북쪽으로 돌아가는 이무평을 보내며 지은 글&#12308;送李務平北歸序&#12309;&#8221;의 번역문을 참고하여 저자가 수정 번역하였다. 사실 저자는 수련의 과정을 마치면서부터 동무와 노사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12302;노사집&#12303;과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 등을 확인하였지만 관련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박명희 등이 번역한 &#12302;노사집 5&#12303;에서 이제마를 언급한 이 부분을 보고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수년의 시간이 지났다. 부족하지만 긴 세월 동안 묵힌 내용들을 일부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계기를 만들어 준 번역자들에게 감사드린다.</p>
					</fn>
				</fn-group>
				<p>送李務平北歸序</p>
				<p>務平將歸, 老夫非無嗟勞惜別語, 恐與務平輕千里之意不相應. 若儒門事業經傳垂世之旨, 潛心體究, 十年後有得未晩也, 非臨別卒乍間所可議到.</p>
				<p>所欲言者, 願務平先立其本而已. 大抵人間萬事, 莫不有本領. 觀乎車之有軸, 磨之有心而知之. 其本亂而末治否矣. 本領於吾者, 豈非吾心乎? 心雖在我, 而實天理之總會. 故吾心之所安, 卽天理之所當也. 古之君子夙夜&#23414;&#23414;, 非老死不休者, 求其心之所安已矣. 外間萬事要非己分. 向裏者日益專, 則外間事不待著意排遣, 而漸覺悠悠. 若是則其本立矣. 許多聖賢垂世之旨, 到此方有可議. 苟或於人己分上, 不能&#26210;明, 枉把他人事, 爲自家事, 則向裏之念, 不期輕而自輕, &#39446;外之思, 不期重而自重. 氣弱者同流合汚, 才高者傲物輕世, 量&#35082;者怨天尤人. 畢竟成就, 反不若隨分耕鑿之寡過. 務平亦嘗念及此耶?</p>
				<p>老人事朝夕不可保, 以此荒蕪之辭, 爲朝暮相思之資可也.</p>
				<p>乙丑六月下澣.</p>
				<p>북쪽으로 돌아가는 이무평을 보내며 쓰다.</p>
				<p>이무평(李務平)이 곧 돌아가려 하니 늙은이가 안타까워 위로하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이 없을 수 없는데, 아마도 천리 길을 쉽게 여기는 무평의 뜻과는 맞지 않을 것이다. 유문(儒門)의 사업이나 경전이 세상에 드리워진 뜻과 같은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으로 궁구해서 10년 이후에 터득함이 있더라도 늦지 않은 것이니, 이별을 앞두고 잠시 논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p>
				<p>말해 주고 싶은 것은 무평이 먼저 그 근본을 세우기를 바랄 뿐이다. 대개 사람의 모든 일에는 본령이 있지 않음이 없다. 수레에 축이 있는 것이나 맷돌에도 중심이 있는 것을 보고 본령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본령이라는 것은 어찌 내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비록 나에게 있다 하나 사실은 천리(天理)가 모두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편안한 것은 천리에 합당한 것이다. 옛날 군자가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힘써 늙어서 죽을 때까지 쉼 없이 하는 것은 그 마음이 편안한 것을 구할 뿐이었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요컨대 자기 일이 아니다. 안으로 향하는 것이 나날이 더 오롯하면 외간의 모든 일은 애써 밀쳐내지 않아도 아득히 멀어짐을 점점 깨닫게 된다. 이와 같으면 근본이 선 것이다. 많은 성현이 세상에 드리운 뜻은 이 경지에 이르러서야 논의할 수가 있다. 만약 혹시라도 나와 남의 일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여 남의 일을 헛되이 부여잡아 자기 일로 삼게 되면, 안으로 향하는 생각(念)은 가벼워지리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가벼워지게 되고, 밖으로 내달리는 생각은 무거워지리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거워진다. 기가 약한 사람은 세속 흐름을 따라 더러운데 합쳐지고, 재주가 높은 사람은 남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하며, 도량이 좁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니, 끝내 성취하더라도 도리어 분수에 따라 밭 갈고 우물 파는 사람들의 허물이 적은 것만도 같지 못하다. 무평도 역시 일찍이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던가?</p>
				<p>노인의 일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으니, 이 거칠고 졸렬한 글을 아침저녁으로 사색하는 자료로 삼았으면 좋겠다.</p>
				<p>을축년(1865, 고종2) 6월 하순.</p>
				<p>이 글은 노사가 이무평이 떠날 때 이별을 앞두고 쓴 글이기 때문에 글쓴이와 글 쓴 시기가 분명하다. 노사는 1789년 태어나 1879년에 82세로 사망하는데, 글을 쓴 을축년(1865년)은 노사의 나이 68세 때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노인이라 지칭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며 글의 내용도 노인이 젊은이에게 혹은 스승이 제자에게 걱정과 애정을 담아 쓴 글로 보인다. 하지만 이무평이 과연 동무 이제마와 동일 인물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p>
			</sec>
		</sec>
		<sec sec-type="methods|materials">
			<title>&#8547;. 考察</title>
			<p>&#8216;이무평북귀서&#8217;의 내용은 노사가 유가 학문 방법의 큰 틀과 이무평 개인에게 하는 말로 구분할 수 있다.</p>
			<p>먼저 노사는 공부 방법의 큰 틀로 잠심체구(潛心體究)를 강조한다. 공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으로 궁구하는 잠심(潛心)17)과 체구(體究)18)의 방법으로 10년 정도는 해야 되는 것이지 급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 방법은 이무평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 공부에 대한 노사의 관점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머리로 알고 입으로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몰입의 시간을 거쳐 몸으로 체화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9).</p>
			<fn-group>
				<fn id="N0017">
					<label>17</label>
					<p>潛心은 마음을 침착하고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다. 들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잠심은 학문의 방법으로 강조된다. 私心을 버리고 良心을 찾기 위한 방법이며, 도덕심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p>
				</fn>
				<fn id="N0018">
					<label>18</label>
					<p>體究는 자신의 몸으로 자세히 궁리하고 연구한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 공부에서 빨리 효과를 바라지 말고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도록 연마하라는 뜻으로 &#8216;勿求速效 體究硏磨&#8217;라는 표현도 있다.</p>
				</fn>
				<fn id="N0019">
					<label>19</label>
					<p>분야마다 개인마다 공부 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상의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절대적인 몰입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p>
				</fn>
			</fn-group>
			<p>다음은 이무평 개인을 두고 구체적으로 하는 말이다. 첫째, 근본을 세울 것을 강조한다. 마치 수레에 축이 있는 것과 멧돌에 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중심이 되는 본령이 있음을 알아야 하며, 나에게 있어 본령은 마음(心)이라고 강조한다. 둘째, 근본을 세우는 방법으로 마음을 오로지 하여 외간 일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마음의 편안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천리에 합당하게 된 것이니, 마음을 안으로 오로지 하면 저절로 외간 일은 멀어지게 된다. 이 정도가 되어야 근본이 선 것이고 근본이 서야 성현의 뜻을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셋째, 사람의 특성을 보고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설명한다. 기가 약하면 세속에 휩쓸리기 쉽고, 재주가 뛰어나면 남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시하게 되고, 도량이 좁으면 남 탓이나 하늘 탓이나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성취한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하면서 무평도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사는 기가 약한 사람, 재주가 뛰어난 사람, 도량이 좁은 사람과 같은 세 유형으로 구분하였지만, 이면에는 이무평을 재주가 뛰어난 사람(才高者)으로 보고 주의할 점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노사는 이무평이 아침저녁으로 이 내용을 새기면서 생활하기를 당부하고 있다.</p>
			<p>박명희 등은 &#8220;이 글은 기정진이 제자 이제마(李濟馬, 1838 - 1900)가 북쪽으로 돌아감에 이별에 즈음하여 지은 것이다. 무평(務平)은 이제마의 자이다. 이제마의 본관은 전주(全州)요, 호는 동무(東武)이며,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사상의학을 정리하여 1894년 &#8810;동의수세보감&#8811; 2권을 저술하였고, 1900년 그 내용을 수정 보충하여 증보판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8810;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8811; 과 &#8810;격치고(格致藁)&#8811;가 전한다20).&#8221;라고 하면서 이제마를 기정진의 제자라고 밝히고 있다.</p>
			<fn-group>
				<fn id="N0020">
					<label>20</label>
					<p>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옮김. 기정진 지음. &#12302;노사집 5&#12303;, 경기도 파주:경인문화사. 2018:384-385.</p>
				</fn>
			</fn-group>
			<p>하지만 저자가 박명희 등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로 정확성의 문제가 있다. &#8220;사상의학을 정리하여 1894년 &#8810;동의수세보감&#8811; 2권을 저술하였고&#8221;와 같이 잘못 표현된 부분은 논외로 하더라도, &#8220;무평(務平)은 이제마의 자이다&#8221;라고 한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p>
			<p>이 문제는 결국 이무평이 이제마와 동일 인물인가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노사가 동무를 부를 때 호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무평이란 자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평을 쓴 한자가 다르다.  &#12302;동무유고(東武遺稿)&#12303;21)에는 &#8220;선생의 휘(諱)는 제마(濟馬)이고 자(字)는 무평(懋平)이다. 초휘(初諱)는 섭운(燮雲)이고 자(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동무(東武)이다&#8221;라고 하고 있다(Figure 2). 또 동무공 가문의 족보인 &#12302;선원파승(璿源派乘)&#12303;에서도 동무의 이름을 섭운(燮雲), 호를 동무(東武), 자를 무평(懋平)이라 하고 있다22)(Figure 3).</p>
			<fn-group>
				<fn id="N0021">
					<label>21</label>
					<p>이 &#12302;동무유고&#12303;는 藏書閣 소장본으로 필사본이다. 이창일이 이를 번역하여 출판하였다.</p>
				</fn>
				<fn id="N0022">
					<label>22</label>
					<p>22) 가문의 족보인 선원파승(璿源派乘)은 檀紀4250년(1917년) 咸興進成印刷所에서 간행된 것인데, 동무공의 동생인 이섭증(李燮曾)의 손자인 이진윤(李鎭胤) 선생이 編輯兼校正한 것으로 그의 아들인 이성수(李聖洙) 선생에게 전해졌다. 저자가 경희대 수련의 시절에는 송일병 교수님이 소장하신 사본을 보았고, 이후 이성수 선생에게서 이 족보의 실물과 내용을 확인하였다.</p>
				</fn>
			</fn-group>
			<p>이처럼 &#12302;동무유고&#12303;와 가문의 족보에서 모두 동무의 자는 &#8216;무평(懋平)&#8217;으로 되어 있어, &#8216;무평(務平)&#8217;과는 다르다. 이를 알고 있던 저자는 &#8220;무평(務平)은 이제마의 자&#8221;라고 한 박명희 등의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p>
			<fig id="F0002"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label>Figure 2.</label>
				<caption>
					<title>Lee Je-ma in &#12302;DongmuYugo&#12303;</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3062945&amp;imageName=HSSSBH_2024_v36n1_1_f0002.pn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 />
			</fig>
			<fig id="F0003"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label>Figure 3</label>
				<caption>
					<title>Lee Je-ma in a family tree</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3062945&amp;imageName=HSSSBH_2024_v36n1_1_f0003.pn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 />
			</fig>
			<p>그래서 저자는 동무와 관련된 자료 중에서 무평(懋平)이 아닌 무평(務平)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는 지를 찾았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또 동무 쪽의 자료에서 노사를 만났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보지 못했으며, 노사 쪽의 자료에서도 제자 명단이 정리된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 &#12302;노사집&#12303; 등에서도 동무와 관련된 내용도 확인할 수 없었다.</p>
			<p>박학래는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에 기재된 직전제자(直傳弟子) 594명을 대상으로 하여 전남이 378명, 광주 95명, 전북 91명, 경남 23명, 충북 2명, 제주 2명, 충남 1명, 함북 1명, 미상 1명으로 지역별 분포를 보고하고 있다23). 저자가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 권지삼(卷之三) 선생문인편(先生門人編)에 기록된 직전제자 명단을 594명을 확인하였으나 동무와 관련된 이름(이제마, 이섭운, 이무평, 이자명 등)은 없었다.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 에는 제자의 거주지를 밝히고 있어 동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거주지가 함북 무산(茂山)으로 되어 있는 경우를 확인하였더니 최종형(崔宗衡)이었고, 거주지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나병옥(羅秉沃)이었다24).</p>
			<fn-group>
				<fn id="N0023">
					<label>23</label>
					<p>박학래. 노사학파의 형성과 노사학의 계승. 동양고전연구. 2020;80:460.</p>
				</fn>
				<fn id="N0024">
					<label>24</label>
					<p>&#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에는 &#8220;崔宗衡字慶五居茂山&#8221;으로 되어 있어 이제마와는 상관이 없었고, 거주지 표시가 없는 경우는 &#8220;羅秉沃字舜功&#8221;으로 되어 있었다. 澹對軒, &#12302;盧沙先生淵源錄1, 2&#12303;. 장성, 1960.</p>
				</fn>
			</fn-group>
			<p>그러나 한자가 다르다고 해서 이무평이 동무가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애매하다. 노사가 무평(懋平)을 무평(務平)으로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懋)는 &#8216;무성하다&#8217; &#8216;풍성하다&#8217; 뜻도 있지만 &#8216;힘쓰다&#8217;는 뜻도 있어 무(務)와 같은 뜻으로 통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p>
			<p>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의 이무평을 동무라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먼저 작성 시기인 을축년(1865, 고종2)은 노사(1798-1879, 82세 사망)의 나이 68세이고, 동무(1837-1900, 64세 사망)의 나이 29세 때이므로 시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음은 글의 내용에서 무평이 동무일 가능성이 있다. 첫 문장에서 이무평이 북쪽으로 천리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노사의 직전제자 대부분이 호남과 경남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다른 지역 제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리 먼 길의 북쪽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특이하므로 함흥이 집인 동무일 가능성이 있다. 또 이어진 글에서 &#8216;탄식하며 위로하다&#8217;의 뜻인 &#8216;嗟勞......&#8217; 부분에는 천리 먼 길을 어떻게 가나 조심해서 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8216;아마도 ....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8217;로 번역할 수 있는 &#8216;恐 ...... 不相應&#8217; 부분은 천리 먼 길을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여기는 이무평의 뜻과 노사의 뜻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이다. 실제 동무는 젊은 시절 가출하였고, 또 소련이나 만주로 다녀온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천리 먼 길을 어려워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에 노사가 이런 표현을 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무평이 가지 말고 좀 더 공부하였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노사의 마음도 이면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나이와 내용을 감안하면 이무평을 동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p>
			<p>이무평을 동무라고 본다면, 노사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고, 동무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사는 평생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강학 활동을 주로 하였는데25), 강학활동에 전념한 시기는 45세(1882년) 이후이고, 문인의 수가 가장 크게 늘어났던 시기는 1860년대부터 1875년 사이였음을 감안하면26), 이 글을 쓴 1865년은 노사가 강학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많은 문인들이 찾았을 시기이다. 노사는 찾아오는 사람의 신분이나 부귀에 차별을 두지 않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생활은 매우 빈궁했다. 그의 말년에 문인들에 의해 담대헌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무척 가난한 생활을 하였던 까닭에 객방을 겸한 글방이 겨우 하나 있을 정도에 불과하였다27). 노사의 생활 상황이 이러하였으므로 이무평이 장기간 머무르며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노사의 강학이 어떤 특별한 분야나 정해진 교과 내용을 가르치기보다는 찾아온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깨우쳐주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가르친 점을 감안하면28), 이무평도 그동안 공부하면서 가졌던 의문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정재규는 노사 기정진의 3대 제자33)</p>
			<fn-group>
				<fn id="N0025">
					<label>25</label>
					<p>양기정은 &#8220;1842년(헌종 8년, 기정진 45세) 때 典設司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奉職한 지 6일 만에 呈辭하다. 이후 제수되는 관직에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8221;고 한다.</p>
				</fn>
				<fn id="N0026">
					<label>26</label>
					<p>김봉곤. 노사학파의 형성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2007년. 94쪽.</p>
				</fn>
				<fn id="N0027">
					<label>27</label>
					<p>김봉곤은 &#8220;기정진이 비교적 오래 정착한 곳은 下沙로서 비교적 이곳에서 오래도록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 객방을 겸한 글방이 겨우 하나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8221;라고 하였고. 또 &#8220;기정진은 글을 배우러 찾아오는 문인들을 신분이나 빈부에 따라 차별하거나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무척 빈궁하였는데.....&#8221;고 하였다. 김봉곤, 앞의 논문, 94-95쪽.</p>
				</fn>
				<fn id="N0028">
					<label>28</label>
					<p>김봉곤은 &#8220;어떤 특정한 방침을 세우고 일생동안 강학활동에 전념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강학을 위해 별도의 학규를 세우지 않았으며, 단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제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내용에 대해 계발시키고, 성리학을 토론하는 형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8221; 김봉곤, 앞의 논문, 95쪽.</p>
				</fn>
			</fn-group>
			<p>이 글을 쓴 1년 후인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노사는 양이(洋夷)의 침범에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고29), 이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노사의 문도들은 노사학파라 불리는 학파를 형성하며, 조선 말 개화기에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가지고 의병을 일으킨 경우가 많다. 1895(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 노사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도들이 많았다. 1896(丙申)년 민용호(閔龍鎬) 의병의 소모장(召募將)이었던 최문환(崔文煥)이 북진하여 함흥부사 목유신(睦裕信)을 처형하였을 때 이제마는 최문환을 붙잡은 사실이 있다30). 당시 의병을 일으킨 민용호는 경남 산청 출신인데 어릴 적에 현 경남 합천군 쌍백에 거주하던 노백헌(老栢軒) 정재규(鄭載圭)에게 수학하였다고 한다31). 민용호의 학맥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32) 중의 한 명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당시 의병운동은 위정척사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민용호도 기정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무는 함흥에 들어온 최문환의 의병에 합류하기보다는 최문환을 붙잡아 함흥 사람들의 안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런 동무의 행동은 위정척사사상을 이어받은 노사학파의 제자들과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p>
			<fn-group>
				<fn id="N0029">
					<label>29</label>
					<p>7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6條의 상소로 병인소(丙寅疏)라 한다.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렸다.</p>
				</fn>
				<fn id="N0030">
					<label>30</label>
					<p>관동창의록에 근거하여 최문환이 민용호의 소모장이었다는 것과, 이제마가 최문환을 붙잡은 것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저자는 보고한 바 있다. 박성식, 동무 이제마와 최문환의 난, 사상체질의학회지. 1999;9(2):39-55 참고.</p>
				</fn>
				<fn id="N0031">
					<label>31</label>
					<p>김현진. 복재 민용호의 춘추대의 사상과 시세계 고찰. 南冥學硏究. 2022;73:186-210.</p>
				</fn>
				<fn id="N0032">
					<label>32</label>
					<p>을미의병의 의병장인 민용호를 노사학맥이 아닌 화서학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 민용호를 위정척사의 양맥인 노사 기정진의 노사학파와 화서 이항로의 화서학파에 모두 접맥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민용호의 학문적 계보에 대해서 김민석은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김민석. 關東義兵將 閔龍鎬의 활동과 關東倡義錄 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20.02. 강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p>
				</fn>
				<fn id="N0033">
					<label>33</label>
					<p>전남 남원의 대곡(大谷) 김석구(金錫龜), 경남 합천의 노백헌(老栢軒) 정재규(鄭載圭), 전남 화순의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을 노사의 3대 제자라 한다.</p>
				</fn>
			</fn-group>
			<p>따라서 이무평이 동무와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노사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노사학파의 일원으로 노사의 사상을 펼치고자 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을미의병 때까지 노사가 살아 있었다면, 최문환의 의병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붙잡았던 동무를 노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의문이다. 때로는 드러난 행동이 내면의 사상보다 더 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p>
			<p>반면 동무는 &#8220;내가 태양인 장부를 품부 받아 일찍 열격병에 걸려 6-7년간 거품 침이나 거품 가래를 토하였는데 수십 년 섭생으로 다행히 요절을 면했다. 그래서 이를 기록하여 태양인으로 이 병을 앓는 자에게 경계로 삼고자 한다. 만약 치법을 논한다면 한마디로 진노를 멀리하라는 것뿐이다34)&#8221;고 말한다. 동무가 요절을 면한 이유가 마음의 편안함을 구하라는 노사의 가르침을 자기 수양의 지침으로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35) 단정하긴 어렵다. 저자는 동무의 학문적 연원이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동무의 깨우침에는 유학 이외에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상의학에 미친 불교의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연구한 바 있다. 중국 연변의 사상의학자 손영석(孫永錫)은 &#8220;이제마에게 의학을 가르친 분이 스님이다. 그러나 이제마 선생이 불교를 숭상한 불교 신도였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이제마 선생이 젊어서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의주(義州) 홍씨(洪氏) 부자집에 머물면서 공부를 했는데, 자기를 가르친 스님을 찾아 중국 심양(瀋陽)의 천산(千山)에 있는 아주 큰 절에서 장기간 체류하다가 안산(鞍山)의 탕강자(湯崗子)를 거쳐 길림성(吉林省) 사평시(四平市)에 있는 작은 절에 까지도 있었다.&#8221;고 말한다. 확인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이제마가 불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정황적 근거가 된다36).</p>
			<fn-group>
				<fn id="N0034">
					<label>34</label>
					<p>&#8220;余稟臟太陽人 嘗得此病 六七年嘔吐涎沫 數十年攝身 倖而免夭 錄此以爲太陽人有病者戒 若論治法 一言弊曰 遠嗔怒而已矣&#8221; &#12302;동의수세보원&#183;태양인내촉소장병론&#12303;.</p>
				</fn>
				<fn id="N0035">
					<label>35</label>
					<p>물론 이런 가능성은 이무평을 동무라고 인정했을 때이다.</p>
				</fn>
				<fn id="N0036">
					<label>36</label>
					<p>이 내용은 논자가 손영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손영석은 그의 스승인 김구익이 함흥에 가서 이제마의 직계 제자인 최겸용崔謙鏞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손영석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 김구익은 이 이야기를 듣고 함흥에서 연변으로 바로 오면 빠른데도 불구하고, 이제마의 발길을 따라 의주 홍부자집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손영석은 전한다. 그에 의하면 이제마의 스승은 스님이 분명한데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스님을 찾아 중국 심양 천산의 아주 큰 절과 사평에 있는 작은 절에 까지도 와서 머물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그도 불교의 地水火風과 사상의학을 연결시켜 보려하지만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손영석은 이제마 - 최겸용 - 김구익으로 필사된 &#12302;동의수세보원사상초본권&#12303;手抄本을 한국에 전해준 인물이다. 최겸용은 이제마 선생이 돌아가신 후 다음 해에 동의수세보원 初版에 참여한 門徒(栗洞契)의 한 사람이다. 이런 정황을 볼 때 그의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한 본문과 각주는 저자의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불교의 영향, 불교학보. 2011;57:261-293에 발표한 내용을 다시 옮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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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n-group>
			<p>결국 동무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단순화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동무가 젊어서 노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노사의 영향으로 사상의학을 창안하게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동무의 사상의학이 노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노사가 강조한 천리에 합당한 마음의 편안함을 찾아 잠심체구37)의 자세로 여러 경서(經書)와 의학서(醫學書) 등을 공부하다가 우연히 사상인의 장부성리를 깨달았을 가능성은 있다. 결국 노사가 기존 학파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던 학자인 점을 감안하면38), 동무도 기존 의학의 틀을 답습하지 않았던 독창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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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n id="N0037">
					<label>37</label>
					<p>潛心體究가 노사만의 고유한 공부 방법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수 선생이 소장하신 갑오수초본인 &#12302;咸山 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12303;의 후면 표지에 &#8220;潛心之下眞有易道存焉 反掌之間似乎兵法寓矣&#8221;라고 적혀 있는 점을 감안하면 동무도 잠심의 공부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상의학을 공부할 때는 지식 습득을 위한 학습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잠심과 몰입을 통한 내적 성숙의 과정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p>
				</fn>
				<fn id="N0038">
					<label>38</label>
					<p>현상윤은 &#8220;근세 유학의 중심이고 또 근세 유학을 참으로 대표할 만한 학자는 세 사람이 있으니 기정진&#183;이항로&#183;이진상이 바로 그들이다. 그 가운데 기정진과 이항로는 별로 전수받은 학문적 연원도 없이 다 각각 독력(獨力)으로 평지에서 굴기(堀起)한 독학자들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도 특히 기정진은 관찰이 비범하고 연구가 독실하여 서경덕&#183;이황&#183;이이&#183;이진상&#183;임성주 등과 더불어 성리학의 6대가라고 지칭된다.&#8221;고 하였다. 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 앞의 책, 547쪽.  박학래는 &#8220;기정진은 특정한 사승 관계 없이 독자적인 학문적 노력을 통해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율곡으로부터 연원하는 가학과 기정진 개인의 지속적인 학문 연찬, 그리고 주변 인사들과의 학문 토론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8221;고 하였다. 박학래, 앞의 논문, 466-467쪽.  당시 조선 성리학은 스승에 반대하는 뜻을 함부로 표현할 수 없을 때인데 노사는 집안 학문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율곡 이이(李珥)에 대해서도 다른 뜻을 표현할 만큼 독자성이 있는 학자였다라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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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 sec-type="results">
			<title>&#8548;. 結論</title>
			<p>1.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에 언급된 이무평을 동무 이제마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동무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p>
			<p>2. &#12302;노사선생연원록&#12303;의 직전제자 명단에서 동무 이제마와 관련된 이름은 없으며, &#8216;송이무평북귀서&#8217;는 &#12302;노사집&#12303; 3차 간행본에만 포함되어 있다.</p>
			<p>3. 동무가 젊어서 노사의 가르침을 배웠다 하여, 노사의 영향으로 인해 사상의학을 창안하게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노사가 강조한 천리에 합당한 마음의 편안함을 구하기 위한 잠심체구의 공부 방법이 동무가 사상인의 장부성리를 알게 되는 바탕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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