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type="text/xsl" href="/resources/xsl/jats-html.xsl"?>
<article article-type="research-article" dtd-version="1.1" xml:lang="ko" xmlns:mml="http://www.w3.org/1998/Math/MathML"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mlns:xsi="http://www.w3.org/2001/XMLSchema-instance">
<front>
	<journal-meta>
		<journal-id journal-id-type="publisher-id">jpn</journal-id>
		<journal-title-group>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journal-title-group>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publisher>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publisher>
	</journal-meta>
	<article-meta>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19_25_01_393</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19.25.1.012</article-id>
		<article-categories>
			<subj-group>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subj-group>
		</article-categories>
		<title-group>
			<article-title>알랭 레네 영화로 본 재현의 윤리 연구</article-title>
			<subtitle>-<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을 중심으로</subtitle>
			<trans-title-group xml:lang="en">
				<trans-title>A Study on the Ethics of Reproduction in Alain Resnais’s Film</trans-title>
				<trans-subtitle>-Focusing on &#x003C;Night and Fog&#x003E;, &#x003C;Hiroshima, Mon Amour&#x003E;, and &#x003C;Muriel, ou Le temps d’un retour&#x003E;</trans-subtitle>
			</trans-title-group>
		</title-group>
		<contrib-group>
			<contrib contrib-type="author" xlink:type="simple">
				<name-alternatives>
				<name name-style="eastern"><surname>최</surname><given-names>은정</given-names></name>
				<name name-style="eastern" xml:lang="en"><surname>Choi</surname><given-names>Eun-Jeong</given-names></name>
			</name-alternatives>
			<xref ref-type="aff" rid="aff01">*</xref>
			<aff id="aff01"><label>*</label>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aff><role>박사과정</role>
			<aff xml:lang="en">Hanyang University</aff>
			</contrib>
		</contrib-group>
		<pub-date pub-type="ppub">
			<day>28</day>
			<month>2</month>
			<year>2019</year>
		</pub-date>
		<volume>25</volume>
		<issue>1</issue>
		<fpage>393</fpage>
		<lpage>425</lpage>
		<history>
			<date date-type="received">
				<day>10</day>
				<month>1</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rev-recd">
				<day>10</day>
				<month>2</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accepted">
				<day>14</day>
				<month>2</month>
				<year>2019</year>
			</date>
		</history>
		<permissions>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19</copyright-year>
		</permissions>
		<abstract>
		<title>국문초록</title>
<p>본고는 알랭 레네의 대표작인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Night and Fog, 1955)</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Hiroshima, Mon Amour, 1959)</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Muriel, ou Le temps d’un retour, 1963)</xref>을 중심으로, 그가 기억의 문제를 영화적 형식으로 어떻게 구현해냈는지 분석한다. 이 세 영화는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폭과 제 2차 세계 대전, 알제리 전쟁과 같은 미학적 재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참혹한 기억들을 다룬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 사건의 재현은 자연스럽게 윤리적 문제와 연결된다. 이러한 사건의 기억은 감히 인간의 언어로 설명 할 수 없기에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에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나 그 고통을 스펙터클로 전시하지 않기 위해서도 재현은 불가능한 것이다.</p>
<p>레네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사실적 재현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영화적 형식을 통해 진정성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감독이었다. 따라서 그는 영화적 형식을 통해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를 극복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다. 우선 그는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극영화로 이행하는데, 이는 윤리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에서는 과거 독일군이 촬영한 수용소 기록 영상으로 보여준 반면,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는 허구적 형식의 재현물로 전환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최초의 극영화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 플래시백을 통해 트라우마적 사건이 주인공의 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구현한다.</p>
<p>하지만 플래시백은 트라우마적 사건이 주인공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침범하여 향유하는 외설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후 작품인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 레네는 플래시백의 부재를 통해 트라우마적 기억에 잠식당한 주인공을 그리기에 이른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플래시백의 부재는 재현의 불가능성 그 자체를 부각시킨다. 재현의 불가능성에 무기력하게 침묵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것, 즉 이러한 불가능성 주변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맴도는 태도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윤리적인 형식이다. 동시에 이것이 레네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재현의 윤리일 것이다.</p>
		</abstract>
	<trans-abstract xml:lang="en">
<title>Abstract</title>
<p>This paper focuses on Alain Resnais’s representative works &#x003C;Night and Fog&#x003E; (1955), &#x003C;Hiroshima, Mon Amour&#x003E; (1959), and &#x003C;Muriel, ou Le temps d’un retour&#x003E; (1963), and analyzes how he implements a representation of memory though cinematic apparatus. These three films deal with horrific memories that seem impossible to reproduce aesthetically such as the Holocaust, the Hiroshima Atomic Bomb, World War II, and the war in Algeria. The reappearance of events that stripped humans of even their minimum dignity can naturally be associated with ethical issues. These events can never be reproduced because they cannot be explained in the human language. It is also impossible to reproduce in a way that doesn’t invade other peoples’ sufferings, nor displays the pain of others as spectacles.</p>
<p>Alain Resnais was a director who realized that if factual representation was not possible from the beginning, truthfulness would have to be approached through cinematic form. Therefore, he tries to overcome these problems through cinematic forms. First, he shifts to action films to avoid the obscenity of documentary. &#x003C;Night and Fog&#x003E; shows the records of camps captured by German forces in the past, while &#x003C;Hiroshima, Mon Amour&#x003E; shows the pain of others in a fictional form of representation. Next, he describes how the trauma affects the identity of the main character through a flashback in &#x003C;Hiroshima, Mon Amour&#x003E;, but also shows a main character who is experiencing trauma without a flashback in &#x003C;Muriel, ou Le temps d’un retour&#x003E;</p>
<p>Flashbacks have the effect of showing the effects of trauma on the main character, but at the same time they involve the obscenity of enjoying the suffering of others. Nonetheless, the absence of flashbacks highlights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This is because it is not silent in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but is constantly approaching. The attitude that repeatedly circles around impossibility is an ethical form that maximizes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In conclusion, this is the ethics of representation that Alain Resnais showed in his films.</p>
		</trans-abstract>
		<kwd-group kwd-group-type="author">
		<title>주제어</title>
			<kwd>알랭 레네</kwd>
			<kwd>&#x003C;밤과 안개&#x003E;</kwd>
			<kwd>&#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kwd>
			<kwd>&#x003C;뮤리엘&#x003E;</kwd>
			<kwd>기억의 재현</kwd>
			<kwd>재현 불가능성</kwd>
			<kwd>트라우마</kwd>
			<kwd>재현의 윤리</kwd>
		</kwd-group>
		<kwd-group  xml:lang="en">
		<title>Keywords</title>
			<kwd>Alain Resnais</kwd>
			<kwd><italic>Night and Fog</italic>　</kwd>
			<kwd><italic><xref ref-type="bibr" rid="B002">Hiroshima Mon Amour</xref></italic>　</kwd>
			<kwd><italic>Muriel ou Le temps d’un retour</italic>　</kwd>
			<kwd>Representation of Memory</kwd>
			<kwd>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kwd>
			<kwd>Trauma</kwd>
			<kwd>Ethics of Representation</kwd>
		</kwd-group>
	</article-meta>
</front>
<body>
<sec id="sec001">
<title>1. 들어가며</title>
<p>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의 전체 영화 작업은 ‘갇혀 있는 기억들’에서 ‘기억 속에 갇힌 우리들’로 변하는 과정<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이라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억의 문제’는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Night And Fog, 1955)</xref>에서 나치 수용소 공간에 남겨진 역사의 기억을 카메라를 통해 불러내었으며,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Hiroshima, Mon Amour, 1959)</xref>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에 대한 기억으로 엇갈리는 두 남녀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또한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Muriel, ou Le temps d’un retour, 1963)</xref>에서는 알제리 전쟁에 참전 했던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담아냈다. 이렇듯 알랭 레네가 지속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기억의 영화적 재현, 집단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역사와 개인 등<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 알랭 레네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기억이 갖고 있는 리얼리티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으며, 더 나아가 기억의 문제를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범위로까지 확장시켰다.<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p>
<p>특히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은 개봉 당시 비평가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에릭 로메르(Eric Rohmer)는 “레네는 유성 영화의 현대적인 첫 번째 감독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10년 후 또는 20년, 30년 후에 우리는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사랑&#x003E;</xref>이 전후 가장 중요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이라고 평가하였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또한 “알랭 레네는 완전히 무無로부터 출발했다는 인상을 준다”<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고전 영화가 가지고 있던 관습적 표현 방식을 벗어나, 레네가 새로운 영화 형식을 구현했다는 공통점을 밝힌다. 더욱이 레네 스스로가 영화를 제작하면서 줄곧 고전 영화는 현대 삶의 실제 리듬을 전달 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왜 영화는 그동안 관습적이고 선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렸는지”<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p>
<p>본고는 우선 알랭 레네의 대표작인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1955)</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1959)</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1963)</xref>을 분석하여, 그가 기억의 문제를 영화적 형식으로 어떻게 구현해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영화는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자 폭탄과 제 2차 세계 대전, 알제리 전쟁과 같은 미학적 재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참혹한 기억들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훼손당한 기억 혹은 사건의 재현은 자연스럽게 윤리적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이 과연 이를 표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서구 사회에서 오랜 시간 지속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한 대답은 트라우마적 사건은 결코 재현될 수 없으므로 이를 시도해서는 안 되며,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p>
<p>우리는 직접적으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없는 비극을 예술적 대상으로써 재현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이루 말로 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작가라도 그 공포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 이렇듯 예술가에게 있어 아우슈비츠는 결코 사실적으로 표현 될 수 없는 대상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재현될 수 없으므로 침묵해야한다’는 금기는 역설적으로 이미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과잉적인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금지는 “재현할 수 있느냐 또는 재현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재현 양식이 무엇이냐”의 문제이다.<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의 사실적인 재현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의 형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p>
<p>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어떠한 형식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나아간다. &#x003C;쇼아&#x003E;(Shoah, 1985)의 감독 클로드 란츠만(Claude Lanzmann)은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을 실제로 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장면이 우연히 띄는 날에는 필름을 당장 파괴해 버릴 것”<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시각은 먼저 희생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영하는 것이 무례한 행위임을 지적한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타인의 내밀한 영역, 즉 타인의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하는 외설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은 예술가가 그러한 공포를 예술적 대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사건의 트라우마적 충격을 경감 시킬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이해 할 수 없는 공포를 이해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뜨림으로써 그 의미나 대상 자체를 축소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들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 즉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사건의 진리로 다가갈 수 있는 양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도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는 형식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p>
<p>이렇게 본다면, 레네가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에서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으로 전환하는 지점, 즉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을 ‘윤리적인 시도’로 해석할 가능성이 열린다. 그는 ‘영화적 형식’으로 트라우마적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예술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대답한 감독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에서 현재 수용소의 모습과 거리를 유지한 트래킹 쇼트(tracking shot)로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 독일군이 촬영한 나치 수용소의 희생자 모습을 배치함으로써 재현의 외설성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힘든 트라우마적 사건은 오직 허구의 형태로만 받아들여 질 수 있음을 인지한 레네는 더 이상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극영화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p>
<p><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 이후의 작품인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 레네는 미학적으로 재현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들을 영화적 형식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기존의 연구에서는 ‘새로운 형식’이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형식은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의 특성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는 일관된 설명 순서에 따라 본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진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이 사실로 믿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사실적 진리(factual truth)와 진정성(truthfulness) 사이의 차이를 도입해야 한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가 일관된 설명 순서에 따라 본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진술할 수 있다면, 그러한 특성 자체가 서술에 대한 진정성(truthfulness)을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 충실한 사실의 재현만이 사건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정합성이 없는 서술 방식 그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진술이 진정성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 따라서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 나타나는 파편적 이미지의 침입과 연대기적 내러티브의 파괴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의 진술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주는 영화적 형식인 것이다.</p>
<p>더욱이 주목해야 할 점은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 이르러 레네가 플래시백(flashback)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 플래시백은 트라우마를 불러내어 이를 서사화하는 기능을 맡는다. 반면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는 알제리 전쟁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시간이라는 표층을 뚫고 나오지만 이야기 형태로 발화되지 않는다.<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 이러한 플래시백의 부재는 ‘말해질 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트라우마적 사건 재현의 불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며, 레네가 추구해 온 재현의 윤리성에 한 발 더 다가 갈 수 있는 참조점을 제공한다.</p>
<p>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본고는 감독 알랭 레네의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의 이행의 과정을 분석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그의 작품에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의 특성이 어떻게 영화적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펴본다. 더 나아가 트라우마적 사건 재현의 불가능성 주변을 맴도는 레네의 영화적 형식이 갖는 윤리적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p>
</sec>
<sec id="sec002">
<title>2.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의 윤리적 이행</title>
<p>알랭 레네의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는 최초로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룬 32분 길이의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나치가 기록한 영상들과 레네가 촬영한 영상들을 배치, 충돌시켜 의미를 생성해내는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영화는 잡초가 무성한 현재의 수용소의 모습을 천천히 트래킹 쇼트(tracking shot)로 담아낸다. 뒤이어 가스실, 침상, 수술실, 철길, 감시망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 구조물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뒤이어 과거 독일군에 의해 촬영된 충격적인 기록 영상들이 배치된다.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벗어놓고 간 옷가지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 불도저로 밀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시체 더미 등, 차마 인간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믿을 수 없는 참상의 기록들이 열거된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의 트래킹 쇼트가 비평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세르주 다네(Serge Daney)로부터 시작된다. 다네가 트래킹 쇼트에 주목을 하게 된 계기는 1961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된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의 비평 ｢천함에 대하여｣ 때문이었다. 리베트는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감독의 영화 &#x003C;카포&#x003E;(Kapo, 1960)에서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결국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여인의 모습을 트래킹 쇼트로 보여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p>
<p>　</p>
<p>　　&#x003C;카포&#x003E;에서 리바Riva가 스스로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을 보자 ─ 바로 이 순간, 마지막 프레임의 앵글에 정확하게 [시체의] 올려진 손을 잡으려고 갖은 신경을 쓰면서 시체를 잡기 위해 앙각으로 트래블링-인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 바로 이 사람은 가장 깊은 경멸만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p>
<p>　</p>
<p>폰테코르보 감독이 경멸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아유슈비츠를 주제로 영화를 연출할 때 먼저 자문해야 할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베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를 영화로 표현 할 때에는 “절대적 리얼리즘”과 같이 사실적으로 장면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부도덕”하다. 만일 이와 같이 감독이 시도한다면, 결국 아우슈비츠를 스펙터클로 만들며, 이는 관음증적인 것이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버린다고 주장한다.<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 감독은 자신이 보여주는 것을 판단하며,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에 의해 관객에 의해 판단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폰테코르보는 아우슈비츠를 관객에게 보여 줄 때 어떠한 형식으로 보여줘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았던 것이다.</p>
<p>다네 또한 &#x003C;카포&#x003E;의 트래킹 쇼트가 비도덕적인 이유를 감독이 관객을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로 위치시켰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트래킹 쇼트를 통해 여인의 주검 옆으로 관객을 위치시켰을 때, 그 장소는 관객이 머물 수 없는 장소이자 머물고 싶지 않은 장소이다. 이렇듯 &#x003C;카포&#x003E;에서는 “지켜야 했던 거리를 미세하게 없애려고 했다”는 것이다.</p>
<p>　</p>
<p>　　나는 1955년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가 나온 해]뿐만이 아니고 1959년[<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이 나온 해]에도 촬영된 대상과 촬영하는 주체와 관객이라는 주체 사이에서 레네가 설정한 거리가 유일하게 가능한 거리라고 느꼈다.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는 아름다운 영화인가? 아니다. 공정한(juste)영화다. &#x003C;카포&#x003E;는 아름다운 영화가 되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한 영화다.<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p>
<p>　</p>
<p><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가 공정한 영화인 이유는 레네가 촬영된 대상과 촬영하는 주체, 그리고 관객 사이의 거리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다네는 이를 “유일하게 가능한 거리”라고 말한다. 이와 다르게, &#x003C;카포&#x003E;는 아름다운 영화가 되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한 영화이다. 폰테코르보 감독은 자신이 다룰 주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만 치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를 트래블링-인하면서 죽어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단순히 미학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감독의 의도가 문제인 것이다.</p>
<p>이처럼 두 평론가의 논의는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이 과연 이를 표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하도록 유도한다. 우선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은 예술가가 그 공포를 예술적 대상으로 미학화 시키는 것은 사건의 트라우마적 충격을 경감 시킬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이해 할 수 없는 공포를 이해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뜨림으로써 그 의미나 대상 자체를 축소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리베트는 이를 “불가능하며 부도덕하다”고 요약하고 있다. 다음으로, 두 평론가의 논의는 스펙터클로 전시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이미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다. 다네가 말한 “유일하게 가능한 거리”가 사라진다면, 타인의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하는 외설성의 문제와 더불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 받는 타인을 관찰하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도록 하는 문제 또한 발생한다.<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 아우슈비츠가 스펙터클로 전락됨으로써 관음증적인 것이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버린다고 지적한 리베트의 논의는 이와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광경을 담은 장면을 보여줄 경우에는 관음증적 향유가 가져올 반작용을 염두 해야만 한다. 따라서 감독은 아우슈비츠를 표현 할 때 “자신이 찍는 것”, “세계와 모든 것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며, “상황의 선택, 플롯의 구성, 대사, 배우의 연기, 간단하고 단순한 기술 등을 통해 꼭 그만큼만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 결론적으로, 이러한 논의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단호히 침묵해야한다는 입장과는 다르다. 두 평론가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적 형식에 있어서 윤리적 측면을 분석한다. 더 나아가 트래블링 기법으로 드러난 진정성에 대해 지적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의 형식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p>
<p>&#x003C;카포&#x003E;와 다르게,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의 트래킹 쇼트는 영화라는 재현적 매체의 무기력함에 대한 고백이며, 궁극적으로는 망각할 수도 망각해서도 안 되는 사건에 대한 감독의 적극적인 답변으로 평가 받는다.<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 느린 트래킹 쇼트는 현재 수용소의 허물어진 구조물들과 물웅덩이에 부유하는 물풀들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과 동시에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장 카이롤(Jean Cayrol)의 내레이션(narration)이 이어진다. “연못과 폐허 속에 남아 있는 차가운 물은 엄청난 수의 주검들 속에서 공허함을 채워 주고 있다. 차갑고 더러운 물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전쟁은 잠을 청하듯 조용해졌지만 어디선가 눈을 뜬 채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을 수 있다.” 레네는 대상과의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한 채, 담담한 내레이션 톤과 트래킹 쇼트로 역사적 진정성에 점차 다가간다. 특히 장 카이롤의 “나에겐 책임이 없다. 카포들이 말한다. 나에겐 책임이 없다. 사령관들도 말한다. 나에겐 책임이 없다. 그럼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은 관객에게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빼앗은 부끄러운 사건에 대해 성찰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렇듯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의식의 과정을 레네는 트래킹 쇼트와 내레이션을 통해 영화에 반영하였다. 폰테코르보가 미학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화면에 담길 역사적 의미를 도외시한 것과 다르게, 레네는 트래킹 쇼트를 통해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룬 영화를 연출하며 자문 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들을 영화의 흐름 자체에 포함시킨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p>
<p>하지만 실제 독일군에 의해 촬영된 과거 수용소 기록 영상은 윤리적인 트래킹 쇼트 형식과는 별도로 참혹하게 다가온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수용자들의 모습,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옷가지와 그들의 피부로 비누를 만드는 모습, 불도저로 밀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시체 더미는 타인의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하는 외설성의 문제와 마주치게 한다. 특히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는 영화에 삽입된 기록 영상으로 인하여 논란에 중심에 놓이기도 하였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프랑스군 모자를 쓴 간수가 잠깐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1956년도 칸 영화제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 실상 독일군 점령 하에서 모든 프랑스인들이 억압을 겪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프랑스는 유대인 학살을 전적으로 나치 정부의 책임으로 몰았다. 프랑스에게는 독일 점령 직후 스스로 세운 독일 협력 정부 ‘비시 프랑스’라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 이렇듯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가 개봉한 시기의 프랑스인들은 드골주의 공화국에 의해 형성된 ‘프랑스인 모두가 레지스탕스였다’는 신화에 억눌린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단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 따라서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과연 이것이 정말로 엄청난 수의 유태인들이 처형당한 역사적 사실로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맞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며, 심지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 결국 이는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동시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 받는 타인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태도인 것이다.</p>
<p>레네는 트래킹 쇼트를 활용함으로써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적 사건을 미학화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었지만, 독일군이 촬영한 기록 영상을 삽입함으로써 다큐멘터리의 외설성과 재현의 윤리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대체로 아우슈비츠를 다룬 기록 영상은 유대인의 육체적 파괴만을 보여주는데, 실상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적 고통이다. 더욱이 잔혹한 장면은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주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 진실을 표현하기에는 그만큼 충격적이지 못하다. 리베트가 폰테코르보를 비판하면서, “감독은 그가 감히 현실로서 스크린에 제시하는 것을 관객이 견딜 만한 것으로 약화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고 말한 것은 이와 동일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레네가 직면하게 된 문제는 타인에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하면서 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실상 관객에게는 관음증적 향유라는 반작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의 이행한 계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p>
<p>　</p>
<p>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큰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는 자기 덫에 걸린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치자. 만약 실제 인물들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략…) 내가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극영화는 아무 문제도 없다. (…중략…)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인가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럴 때 나는 내 자신이 한계 바깥의 영역에 있음을 알게 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된 이유이다.<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p>
<p>　</p>
<p>키에슬로프스키는 자신이 극영화로 전환 하게 된 이유를 ‘진짜 눈물의 공포’에 따른 결과임을 서술한다. 그는 극영화에서는 글리세린을 사용하여 여배우의 눈물을 촬영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반면 실제 진짜 눈물을 촬영하려 했던 경험은 두려움으로 남아있는데, 자신에게 그러한 진짜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짜 눈물의 공포’는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허락도 없이 파고들어가는 타큐멘터리의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설성을 돌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순간을 허구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위장된 허구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p>
<p>레네는 타큐멘터리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 이후, 첫 장편 극영화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을 연출한다. 이 영화는 프랑스 국적의 여배우가 세계 평화에 관한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히로시마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히로시마에서 일본인 건축가를 만나고, 서로에게 이끌려 하룻밤을 보낸다. 그녀는 프랑스의 소도시 느베르의 출신으로,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청년과의 사랑을 비극적으로 끝냈던 트라우마적 기억을 갖고 있다. 일본인 남자 또한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당시 가족을 잃은 아픈 경험이 있다.</p>
<fig id="f001"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1.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이 영화에서도 대상과 거리를 유지한 느린 트래킹 쇼트로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를 담아낸다.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가 과거 독일군이 촬영한 수용소 기록 영상을 보여준 반면,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는 여자가 박물관에서 관찰한 원폭의 피해를 기록한 “사진과 재현물”을 트래킹 쇼트로 천천히 담아낸 후, 이어서 그녀가 관람한 히로시마의 원폭을 다룬 영화를 보여준다. 여자는 병원과 거리, 박물관에서 원폭의 흔적과 마주한 후에 “그 때 평화 광장을 불태운 뜨거운 열기를 생생히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 히로시마에서 그녀가 본 것은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가 아니라, 그 당시의 흔적과 재현물이다. 여자와 관람객이 영화의 생생한 장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 평화 광장을 불태운 뜨거운 열기를 생생하게 느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허구적 형태로서 트라우마적 사건과 대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반면 히로시마 원폭으로 가족을 잃은 남자에게 이는 절대적 공포 그 자체이며, 결코 재현 될 수 없는 사건이다. 따라서 남자는 반복적으로 그녀에게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못봤어”라고 말한다.<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p>
<p>이처럼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은 재현의 윤리에 대한 레네의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로를 부정하는 여자와 남자의 대사는 다시 한 번 트라우마적 사건 재현의 불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남자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못 본 상태임은 틀림없다. 여기서 레네는 사실적 재현의 불가능성에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허구적 형식을 통해 진실에 다가간다. 여자는 히로시마 원폭의 재현물과 영화라는 허구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진실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자가 히로시마에서 본 것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사실’이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재현물로의 전환은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에서 드러난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했다는 외설성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레네의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의 이행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형식적 전환이자, 윤리적 결심인 것이다.</p>
</sec>
<sec id="sec003">
<title>3. 영화적 형식으로 드러나는 재현의 윤리</title>
<p>레네의 대표작인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는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경험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의 여주인공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과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으며,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의 주인공은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에 프랑스군 사이에서 뮤리엘이라 불리던 알제리 여성을 고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레네는 이러한 주인공들을 통해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의 기억이 주인공의 정체성 자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p>
<table-wrap id="ft001">
<table width="100%">
<tbody>
<t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2.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td>
</tr><t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3.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td>
</tr>
</tbody>
</table>
</table-wrap>
<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의 초반부에서는 일본인 남자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의 시점 쇼트 다음으로 갑작스럽게 죽은 독일 병사를 담아낸 쇼트가 배치된다. 이때부터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은 현실을 물들이기 시작하고, 여자는 사랑을 느끼게 된 일본인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점차 고통스러워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의 주인공 베르나르에게도 트라우마적 기억이 갑작스럽게 현재의 시간에 침투한다. 베르나르는 알제리 전쟁에서 돌아와 구직 활동을 하면서, 여자친구인 마리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나르는 불로뉴 거리에서 “뮤리엘, 이리 와”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뮤리엘에 대한 기억은 유령처럼 베르나르를 따라다며, 점차 평범한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p>
<p>이러한 갑작스러운 트라우마적 기억의 침입은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기본적인 윤곽을 산산이 조각나게 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의 여주인공이 일본인 남자에게 “너는 죽었어, 견디기 정말 힘들어”라고 말하는 장면,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의 베르나르가 계모인 엘렌이 “뮤리엘은 다 나았어?”라고 묻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은 이를 보여준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의 여주인공은 일본인 남자를 마치 과거에 죽은 옛 연인인 독일군처럼 상대하며,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의 베르나르는 엘렌에게 뮤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친구가 있다고 주장한다. 뮤리엘은 자신이 알제리 전쟁에서 고문한 여성의 이름인데 말이다. 이들은 트라우마적 기억의 침입으로 인하여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불안정한 상태로 흔들리고 있다.</p>
<p>레네는 “영화에서 절대적인 플래시백은 없으며, 연대기적 내러티브와 다른 극적인 시각에 도달하고자 소망”<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레네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는 분명 플래시백이 존재하며, 이는 여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불러내어 관객이 이를 서사화 하도록 하는 기능을 맡는다는 것이다.</p>
<fig id="f004"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4.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여자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일본인 남자에게 자신의 트라우마적 기억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여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서술하는 순서와 이에 따라 삽입된 플래시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여자는 지하실에 갇혀 있었으며, 그땐 이미 연인인 독일군은 죽은 상태였다. 지하실에서는 손톱이 필요 없는데 사람들이 피가 날 때까지 벽을 긁기 때문이다. 손에 묻은 피를 맛 본 후, 여자는 “당신의 피 맛을 본 이후 피가 좋아졌다”고 말한다. 두 번째, 여자는 자신을 치욕스러워하는 아버지가 여자를 지하실에 가뒀음을 말한다. 집 안에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강제로 지하실로 옮겨진 것이다. 세 번째, 마을 사람들이 얼굴에 피범벅을 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의식을 치르듯이 자르며 비웃는다. 아버지는 운영하던 약국을 닫아야 했고, 여자는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울부짖는다. 죽은 연인은 적군이었으며 여자의 첫 사랑이었다. 네 번째,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랄 무렵 여자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여자는 자신의 연인인 독일군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뛰어가는데, 그는 이미 총을 맞은 상태였고 여자는 죽어가는 그의 곁을 밤새 지켰다.</p>
<p>이처럼 비극적 사랑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하여 여자의 서술은 내러티브의 논리적 형식을 갖고 있지 않다. 관객은 여자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끝나고 난 후에야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해보자면, 젊은 시절 여자는 독일군과 사랑에 빠졌으나 해방군에 의해 연인은 사살 당하게 된다. 여자는 죽어가는 연인의 곁을 밤새 지키다가,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삭발을 당하게 되었다. 밤이 되어서야 여자는 집으로 오게 되었고, 이후 여자는 아버지에 의해 집 안에 갇혀 있게 된다. 하지만 여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강제로 지하실로 옮겨진 것이다.</p>
<p>따라서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 레네가 구사한 플래시백은 과거 회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산산이 조각난 내러티브의 배열은 과거의 충격적인 기억이 주체의 정체성 자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현실에서 주체의 기본적인 인식은 산산이 조각나며, 주체는 더 이상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연속적 흐름에 놓이지 않는다. 이는 레네가 도달하기를 소망한 “연대기적 내러티브와 다른 극적인 시각”일 것이며, 역설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뒤섞임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연속적인 흐름 선상에 놓이도록 한다.<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p>
<p>이러한 혼란스러운 주인공의 서술에서 조각난 형식이 부여하는 내적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주인공이 일관된 설명 순서에 따라 분명한 방식으로 본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진술할 수 있다면, 이 자체가 우리를 의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적 진리(factual truth)와 진정성(truthfulness)의 차이를 상기해보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체의 혼란스럽고 정합성이 없는 진술은 비록 사실로 믿기 어려울 수 있으나, 역설적으로는 진정성이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레네의 플래시백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주체의 진술에 대한 진정성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볼 수 있다.</p>
<p>더 나아가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 레네는 플래시백을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트라우마적 기억에 잠식당한 주인공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먼저 플래시백의 부재는 현재 베르나르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맡는다. 베르나르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침투함으로써 점차 누구와도 온전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다. 베르나르가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 도중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계모인 엘렌이 “남들 생각 좀 해라. 누가 봐도 사람이 변했어.”라며 베르나르의 행동을 꾸짖자, 베르나르는 “남들이 안 변한 거죠”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그 누구도 베르나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아채지 못하며, 또한 아무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베르나르는 알제리에서 돌아와 공동체에 다시 합류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거나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뮤리엘 고문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로베르는 베르나르에게 뮤리엘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진술을 막아버린다. 트라우마적 기억이 현재에 침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베르나르를 변하게 한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p>
<p>또한 플래시백의 부재는 직접적으로 베르나르가 겪은 과거의 사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뮤리엘의 죽음을 재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뮤리엘은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베르나르의 모호한 언급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베르나르는 뮤리엘이라는 이름의 여자 친구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마리도라는 이름의 여자와 시간을 보낸다. 엘렌이 베르나르에게 몇 차례 뮤리엘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그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다. 엘렌이 어디서 여자친구를 만났냐고 물으면, 베르나르는 그녀는 여기 출신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엘렌이 베르나르의 작업실에 방문하자, 베르나르는 “뮤리엘은 여기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p>
<p>고통스러운 사건을 경험한 주인공은 그 공포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경험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증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허위에 가깝다.<xref ref-type="fn" rid="fb031"><sup>31)</sup></xref> 이는 고통의 경험을 중립적로 받아들일 만한 사실로 변형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적 사건의 진실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이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뮤리엘은 실존 인물의 지위보다 사건의 재현 불가능성을 표지한다. 베르나르는 분명 뮤리엘에 대해 말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며, 심지어 베르나르의 말처럼 “뮤리엘이 진짜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p>
<table-wrap id="ft002">
<table width="100%">
<tbody>
<t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5.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td>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41433&amp;imageName=jpn_2019_25_01_393_f006.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td>
</tr>
</tbody>
</table>
</table-wrap>
<p>끝내 베르나르는 자신의 작업실 관리인인 장에게 알제리에서 가져 온 필름을 보여주면서 뮤리엘에 관한 트라우마적 사건을 서술한다. 뮤리엘과 부딪쳤을 때 떨리던 그녀의 몸, 거품을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운 입술, 뮤리엘을 때렸던 손바닥의 얼얼함, 결국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그녀의 얼굴은 현재의 베르나르에게 지속적으로 침투하여 평범한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특히 베르나르는 병사들에게 고문 받을 당시 뮤리엘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베르나르는 뮤리엘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문에 자신도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파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p>
<p>이렇듯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해자라 불리는 집단에 속하게 되는, 즉 ‘가해자라고 명명되는 피해자’<xref ref-type="fn" rid="fb032"><sup>32)</sup></xref>의 위치에 놓인 베르나르를 통해 레네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주체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베르나르는 뮤리엘처럼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그 공포를 말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그는 그 공포의 현장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를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처지인 것이다.</p>
<p>베르나르가 장에게 보여주는 영상은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과거의 이미지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벽에서 상영되는 과거의 장면들은 베르나르가 말하는 뮤리엘에 대한 충격적인 기억들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 영상은 막사에서 나오는 병사들의 모습과 같이 소소한 일상들을 기록한 것이며, 베르나르가 말하고 있는 것, 즉 뮤리엘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과정을 재현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레네는 앞서 연출한 영화들을 통해 뮤리엘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경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희생자의 고통을 허락 없이 침범했다는 외설성과 더불어 관객이 그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할 수도 있는 반작용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네는 뮤리엘이 느꼈을 공포를 예술적 대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xref ref-type="fn" rid="fb033"><sup>33)</sup></xref></p>
<p>하지만 여기서 레네는 재현의 불가능성에 무기력하게 침묵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베르나르의 진술 내용과 영상 사이에는 일종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간극을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가능성에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름 영상은 병사들의 사소한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뮤리엘의 고통이 재현 될 수 없음을, 즉 재현의 불가능성 상징한다. 과거의 뮤리엘을 고문했던 베르나르의 진술은 이러한 재현의 불가능성 주변을 맴돈다. 이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재현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무력하게 침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p>
<p>이와 유사하게 베르나르가 고집스럽게 ‘말할 수 없는’ 뮤리엘을 끊임없이 ‘말하려는’ 시도, 즉 뮤리엘의 실체적 속성은 부여하지 않으면서 모호한 발언으로 뮤리엘이라는 ‘재현 불가능성의 표지’를 맴도는 방식은 오히려 불가능성 그 자체를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재현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가 아니며, 그 대상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스스로 부여하는 추동력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재현 불가능한 대상을 말하려는 목적에서 그 자체를 불가능한 대상으로 둔 상태로 이동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 외설적으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로 통합할 수 없는 공포의 주변을 에두르는 몸짓을 통해 이러한 불가능성을 반복해서 표지한다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4"><sup>34)</sup></xref> 따라서 이러한 태도는 사실적 재현의 불가능성에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은 ‘말해질 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트라우마적 사건 재현의 불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윤리적인 형식이자 진실에 다가가려는 반복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p>
</sec>
<sec id="sec004">
<title>4. 나가며</title>
<p>레네는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가 상영된 지 거의 30년이 지난 후 이 영화의 정치적 의도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요점은 알제리였다.”<xref ref-type="fn" rid="fb035"><sup>35)</sup></xref> 이러한 레네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셈프룬의 일화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셈프룬은 1964년에 파리 근교 클리시의 청년 문화의 집에서 강연을 하게 된다. 강연을 하기 앞서 그는 <xref ref-type="bibr" rid="B001">&#x003C;밤과 안개&#x003E;</xref>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셈프룬은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상영실에서 나오는 청년들의 모습이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이해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 표정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영화가 끝난 후 토론을 시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는데, 이때 셈프룬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문제로 보이지만, 그래도 한쪽 편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중략…) 여기서 저는 얼마 전에 종식된 알제리 전쟁이 떠오릅니다.” 그러자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p>
<p>　</p>
<p>　　이 젊은이들은 모두─물론 여성들은 제외하고─99퍼센트 가까이 징집을 통해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것입니다. (…중략…) 알제리 전쟁에 대한 토론이 시작된 지 15분쯤 지났을 때 거기 모인 젊은이들 모두가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고 ‘제젠gégèn(전기 고문 도구를 지칭하는 프랑스 군대 속어)’으로 고문을 돕거나 직접 행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단 한사람만이 고문을 행하지 않았고 가담이나 방조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동료들의 토론에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넌 군대 생활 2년을 지하 독방에서 보냈나 보군!” 이런 비난이 쏟아져 사회자는 폐회인사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xref ref-type="fn" rid="fb036"><sup>36)</sup></xref></p>
<p>　</p>
<p>셈프룬이 겪은 상황은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르나르가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해 말을 마치기 직전 로베르가 뮤리엘을 처리했다고 말하자, 장은 지금 그 친구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베르나르의 대답은 이렇다. “남들처럼 불로뉴에서 얼쩡대요.” 베르나르는 ‘가해자인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로베르는 그저 가해자일 뿐인 것이다.</p>
<p>한 감독의 연출 의도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랭 레네가 끊임없이 ‘기억’을 주제로 영화를 연출한 이유는 관객 스스로가 가해자인 피해자로서 성찰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기억들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하지 않으며 여러 문제가 동반 될 위험이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원폭, 알제리 전쟁과 같은 참혹한 경험들은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예술적 대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그 공포를 변형시키거나 경감시킬 수도 있으며, 나아가 타인의 고통을 부당하게 침범하여 향유하도록 하는 외설성의 문제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p>
<p>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레네는 영화적 형식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극영화로 이행하였고, 타인의 고통을 기록 영상이 아닌 허구적 형식의 재현물로 전환하여 보여주었다. 하지만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의 플래시백은 트라우마적 사건이 주인공의 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줄 수 있었지만, 이 또한 타인의 고통을 침범하여 향유하는 외설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x003C;뮤리엘&#x003E;에서 레네는 플래시백의 부재를 통해 트라우마적 기억에 잠식당한 주인공을 그리기에 이른다.</p>
<p>트라우마적 사건은 결코 인간의 언어로 말 할 수 없기에 재현이 불가능하다. 또한 타인의 고통에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전시하지 않기 위해서도 재현은 불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레네는 사실적 재현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영화적 형식을 통해 진정성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감독이었다. 재현의 불가능성에 무기력하게 침묵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것, 이러한 불가능성 주변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선회하는 몸짓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윤리적인 태도인 것이다.</p>
</sec>
</body>
<back>
<fn-group>
<fn id="fb001"><label>1)</label><p><xref ref-type="bibr" rid="B015">임재철, ｢알랭 레네—기억으로서의 세계｣,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130쪽</xref>.</p></fn>
<fn id="fb002"><label>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김이석, ｢기억의 재현: 알랭 레네의 &#x003C;밤과 안개&#x003E;를 중심으로｣, 『문학과영상』 제9집, 문학과 영상학회, 2008, 588쪽</xref>.</p></fn>
<fn id="fb003"><label>3)</label><p><xref ref-type="bibr" rid="B015">임재철, ｢알랭 레네–기억으로서의 세계｣,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6쪽</xref>.</p></fn>
<fn id="fb004"><label>4)</label><p><xref ref-type="bibr" rid="B026">Jean-Louis Leutrat, <italic>hiroshima mon amour</italic>, Paris: Nathan, 1994, p.104</xref>. (<xref ref-type="bibr" rid="B020">최광식, ｢연대기적 시간에서 위상학적 시간으로: 알랭 레네의 &#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 『프랑스문화 예술연구』 제10집,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04, 344쪽</xref>에서 재인용)</p></fn>
<fn id="fb005"><label>5)</label><p>“For Alain Resnais, more than any other, gives the impression of having started completely from scratch.” <xref ref-type="bibr" rid="B025">Jean-Luc Godard, “Take Your Own Tours”, <italic>Godard on Godard</italic>, Tom Milne (ed.), Da Capo press, 1988, p.115</xref>.</p></fn>
<fn id="fb006"><label>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김성욱, ｢레네 영화에서의 시간과 기억｣,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40쪽</xref>.</p></fn>
<fn id="fb007"><label>7)</label><p>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더 이상 쓸 수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부정변증법』에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음을 밝힌다. “고문당하는 자가 비명 지를 권한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은 표현의 권리”를 갖으며, “침묵은 단지 객관적 진리의 수준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무능력을 합리화하며, 이로써 객관적 진리를 다시 허위로 격하 시킨다”고 강조한다. <xref ref-type="bibr" rid="B021">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 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469-474쪽</xref> 참고.</p></fn>
<fn id="fb008"><label>8)</label><p>레네의 &#x003C;전쟁은 끝났다&#x003E;(La Guerre est Finie, 1966)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부헨발트 수용소의 경험으로 다수의 작품을 집필한 호르헤 셈프룬(Jorge Semprún)은 글을 써야한다는 필연성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아무 것도 쓸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수용소의 기억은 죽음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는 글과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그는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 망각을 선택한다. 그가 수용소의 경험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xref ref-type="bibr" rid="B023">호르헤 셈프룬,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윤석헌 옮김, 문학동네, 2017, 366-367쪽</xref> 참고) 이후 셈프룬은 역사적 진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문학이 지닌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것임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는 홀로코스트는 오직 예술에 의해서만 재현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데, 예술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p></fn>
<fn id="fb009"><label>9)</label><p><xref ref-type="bibr" rid="B016">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192쪽</xref>.</p></fn>
<fn id="fb010"><label>10)</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60쪽</xref>.</p></fn>
<fn id="fb011"><label>11)</label><p>라캉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리는 허구의 구조를 갖고 있다. 지젝은 실제로 고문하고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스너프 필름을 견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을 예로 든다. 이를 통해 지젝은 “진실이 직접적으로 대면하기에 너무 트라우마적이면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3">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60쪽</xref>.</p></fn>
<fn id="fb012"><label>12)</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62쪽</xref>.</p></fn>
<fn id="fb013"><label>13)</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안현주, ｢가해자의 기억—알랭 레네의 &#x003C;뮤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003E;｣, 『영상예술연구』 제12호, 영상예술학회, 2008, 101쪽</xref>.</p></fn>
<fn id="fb014"><label>1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7">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1961)｣,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362-363쪽</xref>.</p></fn>
<fn id="fb015"><label>15)</label><p>고다르(Jean-Luc Godard) 또한 집단 수용소의 장면들에 나타나는 잔인한 장면들을 보면 관객이 “포르노 이미지에서처럼 충격을 받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HIROSHIMA, NOTRE AMOUR”, <italic>Cahiers du cinéma</italic>, vol.97, 1959) 여기서 고다르는 “모럴은 트래블링의 문제”라는 뤽 물레(Luc Moullet)의 표현을 “트래블링은 모럴의 문제이다”로 바꾸어 제시한다. 이는 영화적인 모든 제스처를 모럴적 ‘의미’와 우선 연관 짓는 것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6">김태희, ｢영화의 기법과 모럴의 문제—‘트래블링’이 모럴의 문제인가?｣, 『프랑스학연구』 제46집, 프랑스학회, 2008, 593쪽</xref> 참고.</p></fn>
<fn id="fb016"><label>1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9">세르주 다네, ｢&#x003C;카포&#x003E;의 트래블링(1992)｣,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358쪽</xref>.</p></fn>
<fn id="fb017"><label>17)</label><p>수잔 손택은 흔히 사람들은 자신과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고통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하는 듯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만족감”이 바로 “관음증적인 향락”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다. <xref ref-type="bibr" rid="B010">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0-154쪽</xref> 참고.</p></fn>
<fn id="fb018"><label>1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7">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1961)｣,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363쪽</xref>.</p></fn>
<fn id="fb019"><label>1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김이석, ｢기억의 재현: 알랭 레네의 &#x003C;밤과 안개&#x003E;를 중심으로｣, 『문학과영상』 제9집, 문학과 영상학회, 2008, 605쪽</xref>.</p></fn>
<fn id="fb020"><label>2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6">김태희, ｢영화의 기법과 모럴의 문제—‘트래블링’이 모럴의 문제인가?｣, 『프랑스학연구』 제46집, 프랑스학회, 2008, 595쪽</xref>.</p></fn>
<fn id="fb021"><label>2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8">박지현, ｢역사와 기억의 새로운 관계—영화로 본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서양사론』 제88호, 한국서양사학회, 2006, 144-145쪽</xref>.</p></fn>
<fn id="fb022"><label>22)</label><p><xref ref-type="bibr" rid="B019">조원옥, ｢영화로 불러낸 기억의 변화, 홀로코스트 영화｣, 『대구사학』 제90집, 대구사학회, 2008, 330쪽</xref>.</p></fn>
<fn id="fb023"><label>23)</label><p><xref ref-type="bibr" rid="B024">홍성남, ｢알랭 레네의 작가적 ‘형성기’에 대하여｣,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19-21쪽</xref>.</p></fn>
<fn id="fb024"><label>2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7">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1961)｣,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361-362쪽</xref>.</p></fn>
<fn id="fb025"><label>2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2">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오영숙 외 옮김, 울력, 2004, 127-128쪽</xref>.</p></fn>
<fn id="fb026"><label>26)</label><p>남다은은 &#x003C;한공주&#x003E;(2013)에서 주인공의 과거 성폭행 현장을 재현한 장면이 일종의 ‘선풍기 시점’으로 촬영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폭력의 광경에 대한 일종의 윤리적 선택의 결과가 선풍기의 시점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상 이는 “보지 않는 척하지만 이미 공간을 장악한 시선이고, 죄에 연루되지 않은 척하는 전지적 시점이며, 결국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음의 시선”이다. 또한 이 영화는 충분히 과거 사건 현장을 반복 재현하지 않아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이러한 재현은 타자의 고통에 침범하는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남다은은 이러한 외설성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것이 허구의 역할임을 강조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7">남다은, ｢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현실의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x003C;한공주&#x003E;의 어떤 장면에 대해｣, 『씨네 21』 제955호, 2014, 80-82쪽</xref>.</p></fn>
<fn id="fb027"><label>27)</label><p>김이석은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이 재현의 문제가 왜 윤리적 문제인지를 설명하는 작품이며,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지 않은 방식”으로 역사의 비극을 다룬다고 분석한다. 본고 또한 이러한 시각에 일부 동의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허구적 형식으로 전환’하여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5">김이석, ｢기억의 재현: 알랭 레네의 &#x003C;밤과 안개&#x003E;를 중심으로｣, 『문학과영상』 제9집, 문학과 영상학회, 2008, 595-596쪽</xref>.</p></fn>
<fn id="fb028"><label>2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김성욱, ｢레네 영화에서의 시간과 기억｣,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49쪽</xref>.</p></fn>
<fn id="fb029"><label>2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히로시마 내 사랑&#x003E;</xref>에서는 현재 카페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가 과거 플래시백 장면에서도 들려온다. 이렇듯 연대기적 내러티브의 파괴로 인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은 또 다른 영화적 형식인 사운드의 연속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p></fn>
<fn id="fb030"><label>30)</label><p>지젝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문제로 증언이 불가능 하다는 것, 즉 증언 하는 것을 받아 줄 만할 제대로 된 청자가 없음을 지적한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아우슈비츠에서 꾼 가장 고통스러운 꿈은 살아남는 꿈이었는데, 그 꿈의 내용은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에게 수용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가족들이 점차 지루해하며 그의 곁을 떠나고, 결국 자신 혼자 남는 것이었다. 이를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큰 타자 부재’, 즉 주체의 말이 사회 연결망으로 기입 또는 등록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3">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69쪽</xref> 참고.</p></fn>
<fn id="fb031"><label>3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뮤리엘&#x003E;</xref>의 또 다른 인물인 알퐁스는 자신이 알제리에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 15년 동안 거주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는데, 이후 영화 결말 부분에서 이러한 사실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정리해보자면, 알퐁스가 알제리에서의 그 시절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짓’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p></fn>
<fn id="fb032"><label>32)</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안현주, ｢가해자의 기억—알랭 레네의 &#x003C;뮤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003E;｣, 『영상예술연구』 제12호, 영상예술학회, 2008, 98쪽</xref>.</p></fn>
<fn id="fb033"><label>33)</label><p>장민용은 베르나르의 일기나 테이프, 알제리에서 가져온 필름이 재현의 어려움을 증명한다고 분석한다. 또한 엘렌이 베르나르 작업실에 방문 했을 때, 그녀가 영사기를 작동시켜 필름이 타들어가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이 장면이 영화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8">장민용, ｢&#x003C;뮈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003E;에 나타난 기억의 연구｣, 『영화연구』 제37호, 한국영화학회, 2008, 343쪽</xref>) 이와 유사하게 안현주도 알제리에서 가져온 필름을 상영하는 것은 레네가 과거를 영화적으로 재현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라 분석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4">안현주, ｢가해자의 기억—알랭 레네의 &#x003C;뮤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003E;｣, 『영상예술연구』 제12호, 영상예술학회, 2008, 106쪽</xref>)</p></fn>
<fn id="fb034"><label>34)</label><p>지젝은 클로드 란츠만의 다큐멘터리 &#x003C;쇼아&#x003E;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란츠만은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받아들일 만한 사실로서 재구성하지 않으며,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수용소의 잔해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대참사의 불가능성을 에두른다. <xref ref-type="bibr" rid="B011">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512-513쪽</xref> 참고.</p></fn>
<fn id="fb035"><label>35)</label><p><xref ref-type="bibr" rid="B024">홍성남, ｢알랭 레네의 작가적 ‘형성기’에 대하여｣,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21쪽</xref>.</p></fn>
<fn id="fb036"><label>36)</label><p><xref ref-type="bibr" rid="B022">호르헤 셈프룬, ｢지울 수 없는 기억들｣, 프랑수아즈 바레 뒤크로 엮음, 『나눔』, 길혜연 옮김, 솔, 2007, 179-180쪽</xref>.</p></fn>
</fn-group>
<ref-list>
<title>참고문헌</title>
<!-- 알랭 레네, 〈밤과 안개〉(Night And Fog), 1955.-->
<ref id="B001">
<label>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movie">
<person-group person-group-type="director">
<name><surname>레네</surname><given-names>알랭</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55</year>
<source>밤과 안개(Night And Fog)</source>
</element-citation>
</ref>
<!-- 알랭 레네,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
<ref id="B002">
<label>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movie">
<person-group person-group-type="director">
<name><surname>레네</surname><given-names>알랭</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59</year>
<source>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source>
</element-citation>
</ref>
<!-- 알랭 레네, 〈뮤리엘〉(Muriel, ou Le temps d’un retour), 1963.-->
<ref id="B003">
<label>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movie">
<person-group person-group-type="director">
<name><surname>레네</surname><given-names>알랭</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63</year>
<source>뮤리엘(Muriel, ou Le temps d’un retour)</sourc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ref-list><title>2. 논문과 단행본</title>
<!-- 김성욱, ｢레네 영화에서의 시간과 기억｣,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ref id="B004">
<label>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성욱</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임</surname><given-names>재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엮음</comment>
<year>2001</year>
<chapter-title>레네 영화에서의 시간과 기억</chapter-title>
<source>알랭 레네</source>
<publisher-name>한나래</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김이석, ｢기억의 재현: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를 중심으로｣, 『문학과영상』 제9집, 문학과영상학회, 2008, 587-613쪽.-->
<ref id="B005">
<label>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이석</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article-title>기억의 재현: 알랭 레네의 &#x3008;밤과 안개&#x3009;를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문학과영상</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영상학회</publisher-name>
<volume>제9집</volume>
<fpage>587</fpage><lpage>613</lpage>
</element-citation>
</ref>
<!-- 김태희, ｢영화의 기법과 모럴의 문제—‘트래블링’이 모럴의 문제인가?｣, 『프랑스학연구』 제46집, 프랑스학회, 2008, 585-608쪽.-->
<ref id="B006">
<label>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태희</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article-title>영화의 기법과 모럴의 문제—‘트래블링’이 모럴의 문제인가?</article-title>
<source>프랑스학연구</source>
<publisher-name>프랑스학회</publisher-name>
<volume>제46집</volume>
<fpage>585</fpage><lpage>608</lpage>
</element-citation>
</ref>
<!-- 남다은, ｢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현실의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한공주〉의 어떤 장면에 대해｣, 『씨네 21』 제955호, 2014.-->
<ref id="B007">
<label>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person-group>
<name><surname>남</surname><given-names>다은</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4</year>
<source>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현실의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x3008;한공주&#x3009;의 어떤 장면에 대해</source>
<publisher-name>씨네 21</publisher-name>
<comment>제955호</comment>
</element-citation>
</ref>
<!-- 박지현, ｢역사와 기억의 새로운 관계—영화로 본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서양사론』 제88호, 한국서양사학회, 2006, 133-158쪽.-->
<ref id="B008">
<label>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지현</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6</year>
<article-title>역사와 기억의 새로운 관계—영화로 본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article-title>
<source>서양사론</source>
<publisher-name>한국서양사학회</publisher-name>
<issue>제88호</issue>
<fpage>133</fpage><lpage>158</lpage>
</element-citation>
</ref>
<!-- 세르주 다네, ｢〈카포〉의 트래블링｣,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ref id="B009">
<label>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다네</surname><given-names>세르주</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윤영</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편역</comment>
<year>2011</year>
<chapter-title>&#x3008;카포&#x3009;의 트래블링</chapter-title>
<source>사유 속의 영화</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지성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ref id="B010">
<label>1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손택</surname><given-names>수전</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재원</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04</year>
<source>타인의 고통</source>
<publisher-name>이후</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ref id="B011">
<label>1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지젝</surname><given-names>슬라보예</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정수</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04</year>
<source>그들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source>
<publisher-name>인간사랑</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오영숙 외 옮김, 울력, 2004.-->
<ref id="B012">
<label>1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지젝</surname><given-names>슬라보예</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오</surname><given-names>영숙</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외 옮김</comment>
<year>2004</year>
<source>진짜 눈물의 공포</source>
<publisher-name>울력</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ref id="B013">
<label>1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지젝</surname><given-names>슬라보예</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조</surname><given-names>형준</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13</year>
<source>헤겔 레스토랑</source>
<publisher-name>새물결</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안현주, ｢가해자의 기억—알랭 레네의 〈뮤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 『영상예술연구』 제12호, 영상예술학회, 2008, 97-108쪽.-->
<ref id="B014">
<label>1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안</surname><given-names>현주</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article-title>가해자의 기억—알랭 레네의 &#x3008;뮤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3009;</article-title>
<source>영상예술연구</source>
<publisher-name>영상예술학회</publisher-name>
<issue>제12호</issue>
<fpage>97</fpage><lpage>108</lpage>
</element-citation>
</ref>
<!-- 임재철, ｢알랭 레네—기억으로서의 세계｣,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ref id="B015">
<label>1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임</surname><given-names>재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임</surname><given-names>재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엮음</comment>
<year>2001</year>
<chapter-title>알랭 레네—기억으로서의 세계</chapter-title>
<source>알랭 레네</source>
<publisher-name>한나래</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ref id="B016">
<label>1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랑시에르</surname><given-names>자크</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주</surname><given-names>형일</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08</year>
<source>미학 안의 불편함</source>
<publisher-name>인간사랑</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 이윤영 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사, 2011.-->
<ref id="B017">
<label>1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리베트</surname><given-names>자크</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윤영</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편역</comment>
<year>2011</year>
<chapter-title>천함에 대하여</chapter-title>
<source>사유 속의 영화</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지성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장민용, ｢〈뮈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에 나타난 기억의 연구｣, 『영화연구』 제37호, 한국영화학회, 2008, 325-349쪽.-->
<ref id="B018">
<label>1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장</surname><given-names>민용</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article-title>&#x3008;뮈리엘 혹은 회귀의 시간&#x3009;에 나타난 기억의 연구</article-title>
<source>영화연구</source>
<publisher-name>한국영화학회</publisher-name>
<issue>제37호</issue>
<fpage>325</fpage><lpage>349</lpage>
<pub-id pub-id-type="doi">10.17947/kfa..37.200809.013</pub-id>
</element-citation>
</ref>
<!-- 조원옥, ｢영화로 불러낸 기억의 변화, 홀로코스트 영화｣, 『대구사학』 제90집, 대구사학회, 2008, 325-349쪽.-->
<ref id="B019">
<label>1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조</surname><given-names>원옥</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article-title>영화로 불러낸 기억의 변화, 홀로코스트 영화</article-title>
<source>대구사학</source>
<publisher-name>대구사학회</publisher-name>
<volume>제90집</volume>
<fpage>325</fpage><lpage>349</lpage>
</element-citation>
</ref>
<!-- 최광식, ｢연대기적 시간에서 위상학적 시간으로: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프랑스문화 예술연구』 제10집,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04, 343-364쪽.-->
<ref id="B020">
<label>2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최</surname><given-names>광식</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4</year>
<article-title>연대기적 시간에서 위상학적 시간으로: 알랭 레네의 &#x3008;히로시마 내 사랑&#x3009;</article-title>
<source>프랑스문화 예술연구</source>
<publisher-name>프랑스문화예술학회</publisher-name>
<volume>제10집</volume>
<fpage>343</fpage><lpage>364</lpage>
</element-citation>
</ref>
<!-- 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 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ref id="B021">
<label>2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아도르노</surname><given-names>테오도르</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홍</surname><given-names>승용</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1999</year>
<source>부정 변증법</source>
<publisher-name>한길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호르헤 셈프룬, ｢지울 수 없는 기억들｣, 프랑수아즈 바레 뒤크로 엮음, 『나눔』, 길혜연 옮김, 솔, 2007-->
<ref id="B022">
<label>2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셈프룬</surname><given-names>호르헤</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뒤크로 </surname><given-names>프랑수아즈 바레</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길</surname><given-names>혜연</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07</year>
<source>나눔</source>
<publisher-name>솔</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호르헤 셈프룬,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윤석헌 옮김, 문학동네, 2017.-->
<ref id="B023">
<label>2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셈프룬</surname><given-names>호르헤</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윤</surname><given-names>석헌</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옮김</comment>
<year>2017</year>
<source>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source>
<publisher-name>문학동네</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홍성남, ｢알랭 레네의 작가적 ‘형성기’에 대하여｣, 임재철 엮음, 『알랭 레네』, 한나래, 2001.-->
<ref id="B024">
<label>2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홍</surname><given-names>성남</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임</surname><given-names>재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엮음</comment>
<year>2001</year>
<chapter-title>알랭 레네의 작가적 ‘형성기’에 대하여</chapter-title>
<source>알랭 레네</source>
<publisher-name>한나래</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ref-list><title>3. 기타자료</title>
<!-- Godard, Jean-Luc, “Take Your Own Tours”, Godard on Godard, Tom Milne (ed.), Da Capo press, 1988.-->
<ref id="B025">
<label>2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Godard</surname><given-names>Jean-Luc</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Milne</surname><given-names>Tom</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88</year>
<chapter-title>Take Your Own Tours</chapter-title>
<source>Godard on Godard</source>
<publisher-name>Da Capo press</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Leutrat, Jean-Louis, hiroshima mon amour, Paris: Nathan, 1994.-->
<ref id="B026">
<label>2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Leutrat</surname><given-names>Jean-Louis</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94</year>
<source>hiroshima mon amour</source>
<publisher-loc>Paris</publisher-loc>
<publisher-name>Nathan</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HIROSHIMA, NOTRE AMOUR”, Cahiers du cinéma, vol.97, 1959.-->
<ref id="B027">
<label>2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year>1959</year>
<article-title>HIROSHIMA, NOTRE AMOUR</article-title>
<source>Cahiers du cinéma</source>
<volume>97</volum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back>
</artic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