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type="text/xsl" href="/resources/xsl/jats-html.xsl"?>
<article article-type="research-article" dtd-version="1.1" xml:lang="ko" xmlns:mml="http://www.w3.org/1998/Math/MathML"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mlns:xsi="http://www.w3.org/2001/XMLSchema-instance">
<front>
	<journal-meta>
		<journal-id journal-id-type="publisher-id">jpn</journal-id>
		<journal-title-group>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journal-title-group>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publisher>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publisher>
	</journal-meta>
	<article-meta>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19_25_02_117</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19.25.2.004</article-id>
		<article-categories>
			<subj-group>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subj-group>
		</article-categories>
		<title-group>
			<article-title>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article-title>
		<trans-title-group xml:lang="en">
			<trans-title>Park Yeol·Kaneko Humiko Case and Performance</trans-title>
			</trans-title-group>
		</title-group>
		<contrib-group>
			<contrib contrib-type="author" xlink:type="simple">
				<name-alternatives>
				<name name-style="eastern"><surname>백</surname><given-names>현미</given-names></name>
				<name name-style="eastern" xml:lang="en"><surname>Baek</surname><given-names>Hyun-Mi</given-names></name>
			</name-alternatives>
			<xref ref-type="aff" rid="aff01">*</xref>
			<aff id="aff01"><label>*</label>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aff><role>교수</role>
			<aff xml:lang="en">Chonnam National University</aff>
			</contrib>
		</contrib-group>
		<pub-date pub-type="ppub">
			<day>30</day>
			<month>5</month>
			<year>2019</year>
		</pub-date>
		<volume>25</volume>
		<issue>2</issue>
		<fpage>117</fpage>
		<lpage>167</lpage>
		<history>
			<date date-type="received">
				<day>11</day>
				<month>4</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rev-recd">
				<day>12</day>
				<month>5</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accepted">
				<day>16</day>
				<month>5</month>
				<year>2019</year>
			</date>
		</history>
		<permissions>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19</copyright-year>
		</permissions>
		<abstract>
		<title>국문초록</title>
<p>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괴사진’ 사건 등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사건은 종종 보도가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 그들에 대한 기사는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펴 사건이 전달·수용된 양상과 의미를 밝혔다.</p>
<p>퍼포먼스의 주인공답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이후 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형무소 바깥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자’였다. 그들의 ‘행동’은 기민하고 파격적이었다. 1926년 박열은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재판 방식을 조율했고,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 재판정에 등장해 조선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대역 사건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재판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앞뒤로 밀착해 앉은 자세로 괴사진을 찍었고, 1926년 7월 이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신문에 실리면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불온한 사진을 남겨, 자신들을 가두고 재판한 일본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p>
<p>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의 특성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특별하게 전달되고 수용되었다. 우선 보도 금지 때문에 관련 보도가 간헐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이 플롯화된 채 알려져 긴장감이 증가했고,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둘째, 재판 전후의 진행 과정을 공연 관람기처럼 기사화하며 재판극을 경험하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과 움직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밝히고, 그들과 재판관이 주고받는 문답을 대본처럼 기술하였다. 셋째, 재판부 판사의 ‘담화’를 되받아 쓴 ‘사설’과 괴사진의 이야기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사를 통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논란과 분란을 문제적으로 드러냈다.</p>
<p>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조화가 깨진 사태를 보여주는 사회적 드라마였다. 본 연구는 이 사회적 드라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한 역할과 이 사회적 드라마가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의미를 밝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위자로서 이 드라마를 직간접적으로 기획·추진했으며, 일제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당당한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했다.</p>
	</abstract>
	<trans-abstract xml:lang="en">
<title>Abstract</title>
<p>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illuminate the Park Yeol(朴烈)·Kaneko Humiko(金子文子) Case from the perspective of performance, by analyzing newspapers published in Colonial Korea. The Park Yeol · Kaneko Humiko Case include the High Treason Incident(大逆事件) case and the mysterious photo(怪寫眞) case that occurred in Tokyo in Imperial Japan from 1923 to 1926.</p>
<p>Even though Park Yeol · Kaneko Humiko were individually imprisoned during this period, they proceeded to act shrewdly and preposterously as performers. First, they made the trial itself into an astonishing case by donning traditional Korean clothes and insisting on using the Korean language in Japanese Imperial Court. Second, they caused the judge in charge to accidentally take the so-called ‘mysterious photo,’ which later led to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cabinet.</p>
<p>The newspapers published in Colonial Korea served as unique stage on which Park Yeol and Kaneko Humiko performed. The newspaper articles reported on the public trials as if it were a drama, describing their clothes, look, and dialogue in public court. The news about them was published not as it occurred but in a plotted sequence because of a press ban, consequentially building suspense among readers. Meanwhile, the Korean newspaper editorials pointed out the injustice of the High Treason Incident, breaking down the Japanese judge’s opinion.</p>
<p>The Park Yeol·Kaneko Humiko Case was a social drama that revealed the disharmony that led to the breakdown of Taisho Democracy and imprinting national resistance in Japan as well as in Korea.</p>
		</trans-abstract>
		<kwd-group kwd-group-type="author">
		<title>주제어</title>
			<kwd>박열</kwd>
			<kwd>가네코 후미코</kwd>
			<kwd>퍼포먼스</kwd>
			<kwd>대역 사건 재판</kwd>
			<kwd>괴사진 사건</kwd>
		</kwd-group>
		<kwd-group  xml:lang="en">
		<title>Keywords</title>
			<kwd>Park Yeol</kwd>
			<kwd>Kaneko Humiko</kwd>
			<kwd>performance</kwd>
			<kwd>the High Treason Incident(大逆事件) case</kwd>
			<kwd>the mysterious photo case</kwd>
		</kwd-group>
	</article-meta>
</front>
<body>
<sec id="sec001">
<title>1. 들어가는 글</title>
<p>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구속된 후 2년여 형무소 독방에 갇힌 채 심문을 받았고, 재판 일정이 잡힐 때쯤 혼인 신고를 했고, 대심원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천황의 ‘은사’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 조치를 받은 후 각각 다른 형무소로 보내졌고, 가네코 후미코가 형무소 감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후에는 ‘괴사진’ 때문에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영어 상태에 있던 그 3년 동안 수많은 기사를 생산해내는 ‘괴사건’의 주인공이었다.</p>
<p>일본에서는 이들에 대한 논의가 진즉 이뤄졌다. 1931년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쓴 글이 출판되었고<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 이후 그녀의 일생에 대한 평전이 발표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 1945년 이후에는 박열의 행적과 재판 관련 기록을 밝힌 책도 출판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금지되거나 지체되었다. 박열이 한국전쟁기에 북한으로 갔고 1974년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기 때문이다. 월북인에 대한 해금이 이뤄진 1989년 박열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 아나키스트 박열의 활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 한편 일본에서 출판된 가네코 후미코의 저술이나 박열 관련 책들도 번역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p>
<p>박열·가네코 후미코는 간토 대지진기에 자행된 조선인/아나키스트 탄압 사건 관계자로서 또는 탄압으로 불거진 저항을 타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역 사건 관계자로서 논의되어 왔다.<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 그런데 ‘탄압/대역’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수감되기 전에 한 조직 활동과 폭탄 입수 모의가 중시될 뿐, 수감된 이후 그들이 한 행위들과 그들의 ‘괴사진’ 유출로 일어난 사회적·정치적 파장은 간과된다. 본고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수감되기 이전에 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이 수감된 이후에 한 행동을 주목한다. 일본에서건 식민지조선에서건 이들과 관련된 사건명은 대역 사건(일명 불경 사건)과 괴사진 사건(일명 박열사진 사건, 박열부부사진 사건)<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 두 가지이다. 본고는 이 둘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 또한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개별성을 존중하기 위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라 명명한다.</p>
<p>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의 사건성은 식민지조선에서 더욱 각별했다. 우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재일 아나키스트였지만 이들의 생애와 사상, 활동 반경은 식민지조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일본 대심원에서 진행되는 조선인의 대역 사건 재판이라는 점도 특별했다. 1910년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사건,<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 1923년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 사건<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 등 일본인의 대역 사건은 있었지만, 조선인이 대역 사건으로 일본 대심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 특히 천황제 국가를 반대하는 이들의 행동은 식민지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및 테러 모의)와 연속 행동처럼 수용될 가능성이 컸다. 1923년 1월에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리고 죽은 김상옥의 의거가 한동안 지면을 메웠고, 8월에는 경성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잡힌 의열단원들과 황옥 경부의 재판에 대한 기사가 <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 이어지고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사랑과 주의’를 함께 하는 연인이라는 점도, 고토쿠 슈스이와 간노 스가(管野スガ)의 관계를 연상시키면서 새삼스런 주목을 받았다.<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 이런 여러 이유로, 식민지조선의 반응과 조응이 뜨거웠다.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가 가장 적극적으로 기사화했고, <xref ref-type="bibr" rid="B005">『조선일보』</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4">『시대일보』</xref>, <xref ref-type="bibr" rid="B006">『중외일보』</xref>도 보도에 나섰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p>
<p>기존 연구는 일본에서 발표된 자료(신문기사, 재판기록, 관계자의 출판물 등)를 바탕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자행된 ‘재일본 조선인’ 사건의 측면에서 역사성을 규명할 뿐, 이들 사건이 당시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는 논의하지 않았다.<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 사건은 특정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사건 발발 당시의 ‘전달·수용’ 내용을 고려한다면, 일본에서의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식민지조선에서의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을 동일시할 수 없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식민지조선에 전달되고 수용된 양상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독자적인 면이다. 본고는 1923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기간 일본에서 진행된 이 사건이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사건성을,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주재료로 삼아, 그리고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구성하고자 한다.</p>
<p>최근 예술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퍼포먼스는 연극의 새로운 경향으로, 사회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비평적 도구이자 중요한 은유로 부상하고 있다.<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 퍼포먼스/수행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주도 개념이 되고 있지만, 분야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는, ‘행위하기’나 ‘스테이징’ 같은 상이한 차원을 포용하는 포괄적 개념(umbrella term)이다.<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 연극을 인류학적 행위패턴의 한 사례로 재개념화하는 연구를 선도한 리처드 쉐크너에 따르면, 모든 퍼포먼스는 상징적 형식과 살아있는 육체를 사용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여 문화적 가치를 확인하거나 전복하는 것으로, 행위의 상호작용 가운데 실현된다.<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는 ‘어떤 사회 공동체 내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는 극적인 사건’을 사회적 드라마(social drama)라 명명한다. 사회적 드라마는 어떤 규범을 위반하는 데서 시작하여, 적대관계가 형성되는 위기의 단계로 발전하고, 갈등을 조정하려는 교정 단계를 거쳐, 재통합 혹은 분열로 끝을 맺는 극적인 흐름을 보인다.<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개인의 일상적인 행동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관찰자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행동을 퍼포먼스라고 명명한 그는, 자아의 역할 수행을 앞무대(front stage)와 무대뒤(back stage)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그것들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행위자들의 전략 차원에서 설명한다.<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 이렇게 퍼포먼스 연구는 연극뿐 아니라 실제 삶 속의 사회적 문화적 퍼포먼스를 극화된 행동의 관점에서 탐구한다.<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 퍼포먼스 연구는 인간을 행위하는 자로서 주목하며, 행위들이 보여지고/전달되는 공간에서 수행되고 수용되는 특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p>
<p>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사건성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피고자, 본고는 퍼포먼스/수행성 논의의 두 측면에 착안하고 편승한다. 우선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을 일종의 사회적 드라마로 본다. 이들이 구속된 채 이뤄진 심문 상황, 재판 진행 상황, 그리고 재판 이후에 벌어진 의문의 상황들을, 위반-위기-교정-재통합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드라마의 구조가 실현된 사례로 보는 것이다. 더불어, 1923년부터 1926년까지 각각 독방에 수감된 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행위 주체로서 한 일들과 그 행위들의 전달에서 두드러진 공연성과 수행성에 주목한다. 퍼포먼스로서의 의미, 즉 행위자와 행위의 수행, 사회적 행위의 공연성, 수용자(행위 상대자, 독자)와의 상호성, 수행 매개로서의 미디어 등을 통해 해당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p>
<p>퍼포먼스 수행 사례로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을 살피는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을 그들의 행동이 수행된 무대로 주목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수감된 이후 그들의 행동도 수감되었다. 그러나 감옥 벽 안쪽에서 혹은 방청 금지된 재판정 안쪽에서 그들이 한 말과 행동들은,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서 보도되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들은 그들이 말과 행동을 행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해석과 반응들이 격돌하는, 유일한 그리고 생생한 무대였다.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은 각종 제약 속에서 그들의 행동과 사건들을 전달했다.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건이기에 직접 취재가 제한되고, 불경한 사건이기에 ‘보도 금지’가 걸리곤 해, 사건은 지체된 채 그리고 간접화된 정보들에 의지한 채 기사화되곤 했다. 그런 제한 속에서 사건이 보도되는 신문이라는 무대는 사건 주인공의 행동과 그 여파를 수용하고 조정하고 (아마도) 연출하며 가시적 체험을 가능케 했고 각별한 효과를 창출했다.</p>
<p>본고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나 이들이 아나키스트로서 한 조직 활동들을 실증적으로 고구하지도, 이들의 사상과 주장들을 해석하는 입장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역 사건 기소의 타당성이나 괴사진 관련 사실을 살피는 논쟁에 관여하지도,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에 새삼스러운 의견을 보태지도 않는다. 본고는 1923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기간, 식민지조선에서 경험된 재일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사건의 사건성을,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진 퍼포먼스로서 구성하여 부각하고자 한다. 형무소 독방에 감금된 그들이 공적인 소통의 무대에서 벌인 공연의 강력한 효과를 드러내고자 한다.</p>
</sec>
<sec id="sec002">
<title>2. 재일 아나키스트와 조선이라는 무대</title>
<p>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시아의 먼로주의가 세력을 잃기 시작한 1920년 무렵, 경제 활황기 제국의 수도 도쿄에는 노동자와 농민, 유학생과 고학생, 모던보이와 모던걸,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들이 활보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각각 도쿄에 도착했다.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던 박열은, 일본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관비로 공부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학교를 나와 현해탄을 건넜고 열여덟 살이었던 1919년 10월 도쿄에 도착했다. 1903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조선 청주에 있는 고모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중 3·1운동을 멀리서 목격했던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나시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다 이듬해 도쿄로 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난 식민지조선을 떠나,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p>
<p>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글을 통해 박열의 행적이 확인되는 것은 1922년 2월 조선고학생동우회가 기사화되면서였다. 1920년 1월 도쿄 거주 고학생들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도모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고학생동우회는 1922년 2월 ‘동우회선언’을 통해 사상 단체로의 변화를 공개 표방했다. 박열을 포함한 이 선언 연서자 11명 중 몇몇은 1921년 11월 조직된 흑도회(黑濤會) 회원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 흑도회에는 유학생과 고학생,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 등 출신 배경과 사상 경향이 다른 회원들이 공존했고, 체계화된 강령은 없었지만 회지 발간을 하며 뜻을 알리고자 했다. 정우영 김약수 이여성 등 유학생들은 1922년 2월부터 『靑年朝鮮』과 『大衆時報』를 각각 발행했고, 고학생이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7월과 8월 각각 『黑濤』 창간호와 제2호를 발간했다.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잡지 『개벽』은 『黑濤』 창간 소식을 짧게 알렸다.<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p>
<p>1922년 7월 니카타(新潟)현 나가쓰가와(中津川) 댐 공사장에서 ‘조선노동자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흑도회 회원들은 학살 진상을 확인하고 항의를 주도했다. 1922년 8월 1일자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는 “일본에서의 조선인 대학살. 보라! 이 잔인하고 악랄한 참극을”이라는 표제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편집국장 이상협을 일본으로 보냈다.<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 8월 10일에는 도쿄 거주 조선인들이 구성한 조선노동자학살사건조사회가 니카타현 현지로 떠났다.<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 9월 7일 도쿄 간다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연합으로 ‘학살문제’ 연설회가 열렸는데, 천명이 넘는 사람이 몰린 이 연설회에서 나경석<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과 박열이 실지에서 조사한 것을 보고했고 이 연설회 소식은 식민지조선의 신문에서도 기사화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 9월 16일에는 조선노동자학살사건조사회가 총회를 열고자 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 조선노동자 학살 사건에 대한 보고회는 식민지조선에서도 이어졌다. 9월 21일에는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노동대회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박열은 “신사현(新潟縣) 지옥곡(地獄谷)을 답사하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p>
<p>한동안 식민지조선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 무렵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직 활동과 잡지 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의 사상 논쟁이 가열되던 분위기에서 흑도회는 북성회(北星會)와 흑우회(黑友會)로 분화되었다. 고학생이던 박열, 가네코 후미코, 신영우, 홍진유, 서상일, 박흥곤, 장상중, 정태성 등은 흑우회에 참여했고, 흑우회는 일본인 노동자들과의 연대와 사상 선전을 위해 『民衆運動』(1923년 3월 창간호)을 발행했다. 흑우회와 별개로, 1923년 박열은 아나키즘사상을 보급하는 대중단체 불령사(不逞社)를 조직했다. 홍진유, 정태성, 김중한, 장상중, 한현상, 구리하라 가즈오, 니야마 하쓰요 등이 참여했다.<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 한편 조직 활동과 별개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11월 『太い鮮人』 창간호를, 12월에는 제2호를 각각 간행했다. 이 『太い鮮人』의 제목과 판형을 바꿔, 1923년 3월 『現社會』 제3호를, 6월에 제4호를 간행했다.</p>
<p>이런 조직 활동이나 잡지 발간 소식은 식민지조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열혈 청년 박열의 모습은 문득문득 식민지조선의 신문에 출몰했다. 1923년 5월 1일 박열 외 여러 명은 도쿄에서 열린 조선인과 일본인의 무산자 해방운동에 참여했다가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안치되어 위경죄의 즉결처분을 받았고, 이 즉결처분이 위법이라 하여 후세 다쓰지 변호사 주최로 5월 16일 조선인기독청년회관에서 불법감금규탄연설회를 열어 인권 유린을 고발했다. <xref ref-type="fn" rid="fb031"><sup>31)</sup></xref></p>
<p>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간토 일대에 대지진이 일어났고, 대화재로 이어졌다. 오후 3시 이후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를 저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고, 2일 도쿄시를 비롯한 다섯 개 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무장한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학살당하거나 검속당하거나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식민지조선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행적이 보고된 것은, 대지진과 대화재, 조선인 학살이 자행된 지 한 달도 훌쩍 지난 어느 날이었다. <xref ref-type="bibr" rid="B002">1923년 10월 16일자 『동아일보』</xref>는 ‘상해폭탄사건의 진원은 무정부주의자의 대음모’라는 제목 아래 짜깁기된 전언의 형태로 ‘○○일파’의 소식을 전했다. ‘○○일파’라고 했지만, 분명 ‘박열일파’를 의미했다.</p>
<p>　</p>
<p>　　동경 경시청 특별 고등과에서는 지난달 삼일에 별안간 활동을 개시하여 동경에 있는 ○○○무정부주의자 단체 ○○일파를 검거하였는 바 그 내용에 대하여는 전하는 말이 구구하야 진상을 알 수 없으니 여러가지 전설을 종합하여보면 이 일은 전기 ○○이가 중심이 되고 일부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의 원조를 받어 계획된 대음모이며 계획은 벌써 금년 사오월부터 차차 구체화된 듯하며 경시청에서도 그 행적을 짐작하여온 모양이더라. 그네들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야 다수한 폭발탄이 필요한대 돈이 없고 취체는 엄중하여 일본 안에서는 곤란할 것을 짐작하고 팔월 상순 동지 중의 한 사람인 ○○○을 만주에 파견을 하게 되어 경성을 지나 국경을 넘어가지고 ○○○에 얼마 동안 체류 중 그는 직접행동으로 유명한 의혈단 김원봉 일파와 성기가 상통하야 당초의 목적되는 폭발탄을 구하게 되었다. 마침 계제에 동경지방의 대진재가 일어나 동경 부근의 질서가 문란할 때 ○○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던 경시청에서는 더욱 ○○○무정부주의자를 감시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편에서도 대진재를 기회삼아 급속히 그 계획을 진행한듯한 형적도 있어 전기 ○○○에 체재중이던 ○○○에게 대하여는 폭탄의 수입을 재촉하였으며 ○○○도 의혈단과 교섭한 결과 문제의 폭발탄 오십개를 본월삼일에 주고받기로 의논되었더라</p>
<p>　　그 뒤에 경시청에서 세전곡(世田谷)의 음모단 본부를 급습하게 된 경과는 알 수 없으나 이때 검거가 실행되던 전후에 동경으로부터 비밀전보를 받은 조선총독부에서는 돌연 전 조선에 대하야 대수색을 행하고 마침내 지난달 이십구일의 전후 수일 동안 전기 ○모 이하 ○명의 ○○○파 및 ○○○의 두 지방에서 체포하는 동시에 우연한 기회에 문제의 폭탄 오십개는 오히려 상해 블란서 조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동지 총령사에게 통첩을 발하여 교섭한 결과 폭탄을 압수하고 협의자 수명도 동시에 체포하게 되었다하며 동경서 만주로 파송되엿던 사람들은 전부 구월삼십일에 경무국에서 비밀리에 동경까지 압송하였더라</p>
<p>　　상해에서 압수된 폭탄은 이미 가방에 담아놓고 그것을 가져올 청년을 여행준비까지 한 때에 하마하마하게 잡혔는데 이 소문을 듣자 북경에 누워서 형세를 관망하던 김원봉도 감짝 놀라서 그 이튿날에 곧 상해로 떠났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중대한 음모사건은 동경 경시청과 경무국의 활동으로 수포에 돌아갔는데 근근 경시청에서는 특별고등과로부터 수명의 수색반을 편제하여 가지고 조선에도 파견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전기 ○명의 관계자는 아직 만선지방에 남아있는 듯하다더라.</p>
<p>　</p>
<p>위 기사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박열일파가 1923년 9월 3일 검거되었는데 ‘전하는 말이 구구하여 진상을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박열일파의 구속을 만주에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 및 그들의 폭탄 반입 사건<xref ref-type="fn" rid="fb032"><sup>32)</sup></xref>과 관련짓고 있다. 위 기사의 상당 부분은 보도 통제로 뒤늦게 그것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채로, 단편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식으로 쓰였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던 1923년 9월 3일 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보호검속이라는 행정집행법 제1조(“구호를 요한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필요한 검속을 가한다”)에 의해 체포되었고, 9월 4일에는 경찰범처벌령 1조 3항의 “일정한 주거, 혹은 생산 없이 각지를 배회하는 자”에 해당한다며 ‘구류 29일’ 즉결 판정을 받고, 다른 불령사 동인들과 함께 세타가야(世田谷) 경찰서에 유치되었다. 기사가 난 10월 16일은 그들이 검거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난 때였다. 불령사 동인들에 대한 심문 중, 이들의 구류를 가능케 할 증언 혹은 증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10월 14일 검찰 신문을 받던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는 박열이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김중한에게 폭탄 구입을 의뢰했다는 식의 진술을 했다.<xref ref-type="fn" rid="fb033"><sup>33)</sup></xref> 이 진술은 박열이 폭탄 사건 및 대역 사건의 피의자가 되는 데 중요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p>
<p>신문기사 제목에서 강조된 ‘무정부주의자의 대음모’의 진상 보도는 통제되었지만, ‘음모 사건’을 ‘박열과 그 애인’과 연결시키는 가십성 기사는 이어졌다. <xref ref-type="bibr" rid="B002">1923년 10월 18일 『동아일보』는 ‘음모 사건에 얼킨 정화, 박열과 그 애인’</xref>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黑勞』(『黑濤』의 오기일 듯-필자)와 『후데이센징』 등 잡지를 발행하는 청년 박열과 그 잡지에 박문자(朴文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가네코 후미코(金子文子)가 ‘사랑과 주의’를 공명하며 같이 감옥에 있다고 전했다.<xref ref-type="fn" rid="fb034"><sup>34)</sup></xref></p>
<p>음모 사건의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는 가운데, <xref ref-type="bibr" rid="B002">1923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xref>는 “동경 ○○음모” 사건이 “대심원까지 갈 듯한” 중대 사건이라고 짧게 언급했다.<xref ref-type="fn" rid="fb035"><sup>35)</sup></xref> ○○이라고 복자 처리된 채로 대심원까지 갈 듯한 사건이라는 추측을 덧붙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1923년 10월 20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 동인 16명을 치안경찰법 제14조(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로 기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10월 20일 불령사 동인들을 비밀결사로 기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날은 간토 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에 대한 해금이 시행된 날이다.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할 ‘사건’이 필요했던 시기, 불령사는 ‘불령선인’의 비밀결사체로 기소된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6"><sup>36)</sup></xref></p>
<p>노루 꼬리처럼 짧은 언급 이후 10여 개월이 흐를 동안, 그들의 소식은 식민지조선의 신문지상에서도 사라졌다. 1924년 7월 1일, 불령사원들이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음이 다시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다.<xref ref-type="fn" rid="fb037"><sup>37)</sup></xref> 이후 다시 1년이 지난 <xref ref-type="bibr" rid="B002">1925년 8월 4일자 『동아일보』</xref>는 “만 이개년” 동안 수용생활을 하던 불령사 회원들이 불령사 사건 예심불기소로 면소되어 방면되었는데, 박열·가네코 후미코·김중한만은 ‘치경법(治警法)과 폭발물취체벌측위범(爆發物取締罰則違犯)’ 심리를 진행한다고 석방하지 않았으며 “당국에서는 그 내용에 대하야 아직 비밀에 부쳤”다고 전했다.<xref ref-type="fn" rid="fb038"><sup>38)</sup></xref> 이 1925년 8월 4일자 기사 내용 중 일부는 1년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 박열·가네코 후미코·김중한 3명이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된 것은 불령사 사건 심문이 진행 중이던 1924년 2월 15일이었다. 1년 반 동안 추가 기소 건과 관련된 심의가 이어졌고, 1925년 7월 17일 대심원 검사총장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형법 제73조(“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대하여 위해를 하거나 하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와 폭발물단속벌칙위반으로 기소했다. 기사가 실린 1925년 8월 4일이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죄로 기소된 이후였지만 이 대역죄 기소 건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다시 3개월이 지난 이후인 <xref ref-type="bibr" rid="B002">1925년 11월 19일, 『동아일보』</xref>에서 ‘일본 궁중에 관련된 중대 사건’<xref ref-type="fn" rid="fb039"><sup>39)</sup></xref> 이라고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다.</p>
<p>박열은 재일 아나키스트였지만, 그의 활동 무대는 일본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는 재일 조선인을 대표해 조선에 와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네트워크를 조성했다.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그의 행적을 주목했다. 그의 조직 활동과 출판 활동은 조선에도 알려졌고, 조선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재일 아나키스트 박열의 활동은 식민지조선의 신문 지면을 무대로 해서 수행되고 있었다.</p>
<p>간토 대지진 와중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보호 검속된 1923년 9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만 2년 동안, 그들에 대한 소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적은 횟수만, 그리고 아주 짧게 기사화 되었다. 그조차 기사의 생명인 신속·정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1개월 때로는 1년이 지난 과거의 일들을 구구하게 전하는 말들에 의지해 쓴 ‘지체되고 흐린’ 기사였다. 그래도 이 ‘짧고 뒤늦고 흐린’ 기사들은, 현해탄을 건너 기사화가 금지된 각종 제한을 뚫고,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독방에 갇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소식을 식민지조선에 전했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관심과 반응을 생산하고 있었다.</p>
</sec>
<sec id="sec003">
<title>3. 대역 사건 재판의 공연성</title>
<p>1925년 11월 24일 ‘불령사 박열사건’ 기사화가 해금되면서<xref ref-type="fn" rid="fb040"><sup>40)</sup></xref> 도쿄대법원 특별법정에서 열릴 예정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황실불경 사건’<xref ref-type="fn" rid="fb041"><sup>41)</sup></xref> 공판에 대한 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1925년 11월이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죄로 기소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11월 예정되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공판은 변호인의 준비 문제로 12월로 연기되었고,<xref ref-type="fn" rid="fb042"><sup>42)</sup></xref> 1925년 12월에는 변호사들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정신감정을 청하고 대심원이 이를 수용하면서 일정이 조정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정신감정을 받았고, 박열은 ‘정신감정은 모욕’이라고 거절했다.<xref ref-type="fn" rid="fb043"><sup>43)</sup></xref></p>
<p>대역 사건 피의자로 확정되어 공판이 예정되면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거의 실시간으로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에 등장했고, 그들의 성장배경과 용모, 행동과 인간관계 등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의 사진이 실렸으니, 등장이란 용어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p>
<p>박열·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은 줄곧 김중한·니야마 하쓰요의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고,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두 쌍의 연인들이 얽힌 사건으로 이미지화되었다. 김중한이 폭탄을 구해달라는 박열의 부탁을 받은 바 있어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혐의로 함께 기소되었고, 니야마 하쓰요는 검찰 신문 중이던 1923년 10월 14일에 관련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4">1925년 11월 27일자 『시대일보』</xref>는 이 네 사람의 사진을 함께 실으며 관련 사실도 밝혔다. 니야마 하쓰요가 김중한의 애인이라는 점, 1923년 11월 28일 폐병으로 사망했다는 점 등이 자세하게 밝혀졌다.<xref ref-type="fn" rid="fb044"><sup>44)</sup></xref> 대심원 판사부장 마키노 기쿠노스케의 말이라고 하면서, 박열은 조선 중산 농가 출생으로 경제 파산을 당한 후 보통학교에서의 차별 대우에 분개하여 좌경사상에 기울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부모와 남편에게 버림받은 외로움과 생활난으로 좌경사상에 공명하였다고 소개하며, ‘가정과 또 사회적 경우로부터 일어나게 된 불상사’<xref ref-type="fn" rid="fb045"><sup>45)</sup></xref>의 사례로 정리했다.</p>
<table-wrap id="ft001">
<table width="100%">
<tbody>
<tr align="cente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1.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1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 1925.11.27.</xref></p></td>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2.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2 <xref ref-type="bibr" rid="B004">『시대일보』, 1925.11.27.</xref></p></td>
</tr>
</tbody>
</table>
</table-wrap>
<p>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수감 생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치가야형무소의 독방에 각각 수감된 채로 자신들을 증거할 글을 쓰고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원고지를 차입해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었고, 박열은 ｢일본권력계급에 동하는 불령선인｣ ｢음모론｣ 등의 ‘논문’을 쓰고 있었다.<xref ref-type="fn" rid="fb046"><sup>46)</sup></xref> <xref ref-type="bibr" rid="B005">1925년 12월 4일에는 『조선일보』</xref> 특파원 이석이 이치가야형무소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면회했다.<xref ref-type="fn" rid="fb047"><sup>47)</sup></xref> 이때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여성은 활발하고 재능이 있으며 경성에서는 여성동우회가 폭넓게 활동하고 있음을 진심으로 기뻐하여 앞으로도 더욱 분투하기를 기원한다”<xref ref-type="fn" rid="fb048"><sup>48)</sup></xref>고 말했다.</p>
<p>이들은 또한 옥중 결혼 혹은 혼인 신고를 추진하고 있었다. 1925년 11월 21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후세 변호사를 경유하여 정식 부부관계를 맺는 결혼식을 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요코타(橫田) 대심원장에게 제출했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이 중대범죄자들의 화촉을 밝히는 행사가 열릴 듯하다”<xref ref-type="fn" rid="fb049"><sup>49)</sup></xref>고 보도된 이후 관련 의문과 논의가 계속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50"><sup>50)</sup></xref> 12월에 도쿄를 찾은 기자가 변호사 후세 다쓰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박열부부는 식을 거행하는 걸 승낙하지 않았고, 다만 “그네들이 최후의 판결을 받은 후 만일을 생각”하여 혼인을 진행하고 있었다.<xref ref-type="fn" rid="fb051"><sup>51)</sup></xref>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혼인계는 수리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52"><sup>52)</sup></xref></p>
<sec id="sec003-1">
<title>3-1. 일본 대심원의 조선 혼례장화</title>
<p>공판이 연기 중이던 1926년 1월 18일, 박열은 후세 변호사를 통해 재판장에게 세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피고인으로 불리길 거부하는, 재판장과 대등한 위치에서 조선예복을 입고 재판을 받겠다는 당돌한 요구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 요구를 일제히 보도했다.<xref ref-type="fn" rid="fb053"><sup>53)</sup></xref></p>
<p>　</p>
<p>　　일, 공판정에서는 일체 죄인의 대우를 말고 또 피고라고 부르지 말 일</p>
<p>　　일, 공판정에서는 조선예복 착용을 허할 일</p>
<p>　　일, 착석도 재판장과 동일한 좌석을 설치할 일</p>
<p>　　일, 공판하기 전에 자기의 선언문 낭독을 허할 일</p>
<p>　　일, 만약 이상 제 요구에 응치 안는 시에는 함구하고 일체 심문에 불응하기로 결심함<xref ref-type="fn" rid="fb054"><sup>54)</sup></xref></p>
<p>　</p>
<p>박열은 드라마티스트처럼 활약하며 재판 주도권을 바꾸었고, 박열의 재판 보이콧을 막아야 하는 재판장은 후세 변호사와 조건을 조율했다. 위 인용한 기사에서처럼,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던 박열은, 동지들과의 면회를 거절하고, 단식을 이어갔다.<xref ref-type="fn" rid="fb055"><sup>55)</sup></xref> 공판 기일은 1926년 2월 16일 17일로 정해져 있었지만<xref ref-type="fn" rid="fb056"><sup>56)</sup></xref> 가네코 후미코의 병으로 일정이 다시 조정되던 중이던<xref ref-type="fn" rid="fb057"><sup>57)</sup></xref> 18일, 대심원은 박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보도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58"><sup>58)</sup></xref></p>
<p>1926년 2월 26일, 첫 공판이 열렸다. 김광수를 특파원으로 보낸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는 공판 직전 상황부터 현장 중계하듯 기사화했다. “재판장 목야국삼조(牧野菊三助) 배심판사 류천승이(柳川勝二) 판창송태랑(板倉松太郞) 도전철길(島田鐵吉) 원등무치(遠藤武治) 등 제씨와 보충판사 중미방조(中尾芳助) 주임판사 소원직(小原直) 제씨와 소원(小原) 검사의 입회 아래 광택(廣澤) 내촌(內村) 두 서기와 관선변호사 황정요태랑(荒井要太郞) 전판정웅(田板貞雄) 양씨와 사선변호사 포시진치(布施辰治) 상촌진(上村進) 씨 등이 출석하고 개정” <xref ref-type="fn" rid="fb059"><sup>59)</sup></xref>되었다. 방청객이 쇄도하여, 사실심리 이후 재판장은 보통방청인을 내보내고 특별방청인만 있는 상태에서 심리를 진행했다. 변호사의 증인 신청이 두어 번 있었으나 판사들이 합의한 후 모두 각하하고 오후 5시 10분경 폐정하였다.<xref ref-type="fn" rid="fb060"><sup>60)</sup></xref></p>
<p>2월 27일과 28일 양일에 분재된 두 기사는, 첫 공판이 열리던 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등장과 이들에 대한 사실심리를 연극의 도입부처럼 기술하고 있다.</p>
<table-wrap id="ft002">
<table width="100%">
<tbody>
<tr align="cente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3.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3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 1926.2.27.</xref></p></td>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4.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4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 1926.2.28.</xref></p></td>
</tr>
</tbody>
</table>
</table-wrap>
<p>　　(1) 오전 8시 사십분 박열과 금자문자는 시곡형무소로부터 수인자동차(囚人自動車)를 타고 대심원 구내에 있는 지하실가감(地下室假監)에서 잠깐 쉰 후 조선예복(朝鮮禮服)을 입고 경관에게 끌리어 빈틈없이 서 있는 방청인의 사이를 지내면서 심립(深笠) 쓴 고개를 연방 이리저리 돌리여 사방을 살폈다. 피고 두 사람은 태연자약하게 방약무인의 태도로 대법정으로 들어갔다. 아홉시 10분에 목야(牧野)재판장과 소원(小原)검사 기타 재판관이 차례로 착석한 후 산기(山崎) 포시(布施) 중촌(中村) 상촌(上村) 등 제씨가 앉고 방청석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하게 되었다. 재판장은 공판개시를 선언하고 피고 두 사람에게 주소성명을 심문하기 시작했다.</p>
<p>　　문. 피고의 이름이 무엇인가</p>
<p>　　답, 나는 박열이다 하고 박열은 조선말로 명쾌하게 대답하였다</p>
<p>　　문, 그것은 조선말인가</p>
<p>　　답, 그렇다</p>
<p>　　문, 박준식이란 이름과 박열이란 이름이 어느 것이 본명인가</p>
<p>　　답, 둘 다 나의 본명이다<xref ref-type="fn" rid="fb061"><sup>61)</sup></xref></p>
<p>　</p>
<p>　　(2) 목야(牧野) 재판장은 박열에 대하여</p>
<p>　　문 나이는 몇 살인가</p>
<p>　　답 모른다</p>
<p>　　문 자기의 생일을 모르다니 이 기록에는 명치 35년 2월 3일이 피고의 생일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런가</p>
<p>　　답 혹은 그런지 모르지</p>
<p>　　문 직업은?</p>
<p>　　답 청서(聽書)에 무엇으로 있는가 하고 박열은 재판장에게 반문함에 재판장은</p>
<p>문 청서에는 잡지업이라고 있는데 그런가</p>
<p>　　답 그렇다</p>
<p>　　문 주소는?</p>
<p>　　답 시곡부구정(市谷富久町) 12번지 이렇게 시곡형무소의 번지를 태연하게 말하매 재판장도 어이가 없는 모양으로</p>
<p>　　문 그것은 시곡형무소이지마는 그 전 주소는 어디인가</p>
<p>　　답 부하대대번정부곡(府下代代幡町富谷) 140번지</p>
<p>　　문 본적은?</p>
<p>　　답 조선경상북도상주군회북면(慶北尙州郡化北面) 이렇게 박열은 어디까지든지 반항적 태도로 재판장의 심문에 대하여 답변하였다. 다음에 다시 금자문자(金子文子)의 심문에 들어가</p>
<p>　　문 성명이 무엇인가</p>
<p>　　답 김자문(金子文)이요 하고 그는 하얀 조선옷에 금테 안경을 쓰고 일어서 똑똑한 육성으로 그가 미리부터 지어두었든 조선 이름으로 대답하였다</p>
<p>문 나이는?</p>
<p>　　답 스물다섯이요</p>
<p>　　문 직업은?</p>
<p>　　답 인삼행상이요</p>
<p>　　문 본적은?</p>
<p>　　답 산리현동산리군취방촌(山梨縣東山梨郡取訪村) 126번지이오</p>
<p>　　문 출생지는?</p>
<p>　　답 횡빈(橫濱)이라나봐요</p>
<p>　　재판장은 여기까지 심문한 후 공개 금지를 선언하여 보통방청인에게 퇴정을 명하고 다만 특별방청인 일백오십명에 한하야 방청을 허하고 사건 내용에 대한 심리를 계속하였다.<xref ref-type="fn" rid="fb062"><sup>62)</sup></xref></p>
<p>　</p>
<p>위 두 기사는 피고인들이 사실심리에서 보인 행동의 파장이 느껴지도록 한다. 우선 두 기사는 글자 크기를 특별히 키우고 기사 배치를 달리해, 박열이 일본 법정에서 ‘조선말’을 사용한 것을 독자도 주목하도록 했다. “나는 박열이다”라고 조선말로 대답함으로써 식민지조선인의 민족적 자의식을 드러내는 한편 제국-식민의 관계 구도를 도드라지게 했다. 제국-식민의 관계구도에서 진행되는 재판의 식민성에 대해 박열은 거부하며 빈정댄다. 나이를 모른다고 하거나 혹은 그런지 모른다고 하는 식으로 대답함으로써, 주소를 묻는데 자신이 갇혀 있는 시곡형무소의 주소를 댐으로써, 박열은 재판정의 권위에 맞선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출생지가 “횡빈이라나봐요”라고 대답하며 무적자로 내버려졌던 일본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며, 미리 지어 놓은 자신의 ‘조선어 이름 김문자(金文子)’를 밝힌다.</p>
<p>이들이 사용한 조선말과 조선 이름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에 맞춤한 것이었다. 이들이 ‘조선예복’을 입고 등장한 점은 27일자 기사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들의 복장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사진이 실린<xref ref-type="fn" rid="fb063"><sup>63)</sup></xref> 3월 2일자 기사에서 자세하게 다뤄진다.</p>
<fig id="p005"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사진 5</label>
	<caption>
		<title><xref ref-type="bibr" rid="B003">『매일신보』, 1926.3.2.</xref></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5.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까지 조선머리로 쪽진 금자문자가 법정에 나타나 먼저 간수에게 차 한 잔을 청해 마시고 가지고 들어갔던 지에푸의 단편소설을 읽은 지 약 십분 가량이 되자 사모(紗帽) 관대(冠帶)에 조복(朝服)을 입고 검은 혜자(鞋子)를 신은 박열(朴烈)이 법정에 나타나 자기 자리에 앉으며 사선(紗扇)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으로 마저드리는 문자에게 또한 소리 없는 웃음으로 대답하였다. 그들은 수감된 이후 사년 만에 이번이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게 된 것인데 무엇이라고 나즉한 소리로 그들이 서로 말을 할 때에 방청석에 섰던 조선학생들이 웅성웅성하는 것을 들은 박열은 몇 번이나 돌아다보고 말없는 웃음을 보내여 답례를 하였고 문자는 자기의 옥원일웅(奧原一雄)과 근등헌이(近藤憲二) 외 이삼형제에게 특별 방청을 하도록 하여 달라는 한 장 편지를 상촌(上村) 변호사에게 주었다 한다.<xref ref-type="fn" rid="fb064"><sup>64)</sup></xref></p>
<p>　</p>
<p>가네코 후미코는 검은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고 쪽진 조선머리로 등장하고, 박열은 사모관대에 조복을 입고 검은 혜자를 신고 등장했다. 이들의 복장과 행동거지는, 이들이 혼인 신고를 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을 재판 방청객들에게 혼례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재판 피고인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조선 신랑 신부의 역할을 하고, 재판 방청객이 하객 역할을 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일본 대심원 재판장은 일순 조선식 혼례식장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예복과 조선어 같은 민족적 상징을 일본 대심원에서 사용함으로써 천황제 국가의 사법제도와 재판소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자세를 놀랍도록 눈에 띄게 표명했던 것이다.</p>
<p>1926년 2월 27일 2차 공판은 오하라 다다시(小原直) 검사의 구형이 있은 후 변호사의 변론이 이어졌다. 2차 공판에서는 조선 예복 대신 일본 옷을 입었다. “박열은 일본 예복으로 선명하게 몸을 차리고 머리는 보기 좋게 뒤로 젖혀서 일본식 청년 신사 같이 차리었으며 그의 처 문자는 깍은 머리를 옆으로 가르고 역시 깨끗한 일본옷을 입어 애교가 담뿍한 자태로 간수에 끌리어 법정에 나타났다. 이 날은 첫날에 비하여 특별방청인도 적어서 대심원 내외는 경관들로 만원이 되어 있는 중에 공판을 계속하였는데 박열의 태도는 이 날도 역시 어디까지 반항적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65"><sup>65)</sup></xref></p>
<p>3차 공판일인 1926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라 공판 진행 여부를 놓고 재판소 측과 변호사 측의 분규가 있었다. 재판장 마키노는 직권으로 공판을 개정, 겨우 일곱 명의 특별방청객이 참관한 가운데 변호사의 변론을 듣는 식으로 3차 공판을 마쳤다.<xref ref-type="fn" rid="fb066"><sup>66)</sup></xref> 4차 공판은 3월 1일, 공개 금지한 채로 진행되었고 변호사의 변론과 가네코 후미코의 진술이 있었다. 그리고 결심 공판일이라 할 4차 공판이 열린 날 오후, 재판장 마키노 기쿠노스케는 이 사건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xref ref-type="fn" rid="fb067"><sup>67)</sup></xref></p>
</sec>
<sec id="sec003-2">
<title>3-2. 재판장 ‘담화’를 되받는 ‘사설’</title>
<p>최종 언도가 연기되는 동안,<xref ref-type="fn" rid="fb068"><sup>68)</sup></xref>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5">『조선일보』</xref>는 이 사건에 대한 사설을 발표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2">1926년 3월 4일자 『동아일보』</xref>에 실린 ‘박열의 사상행위와 환경, 牧野 재판장의 관찰’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3월 1일에 있었던 재판장 마키노의 담화를 짧게 요약하면서 시작한다. “牧野 박사는 ‘주위의 환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힘으로 인간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실히 느꼈다’라고 말하고, ‘죄로 말하자면 일본인으로서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지만, 인간으로서 박열 부부는 뛰어난 才子’라고 하면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박열 부부만이 그렇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오히려 동정을 금할 수 없다는 뜻을 표했다.”고 요약했다. 그리고 이 요약에 이어서, 박열이 “일본 사람으로는 말도 할 수가 없다는 죄를 감행하게 된 동기가 일본인 자체의 행동에서 배태된 것이라 한다면, 일본인은 박열의 죄를 논의하기 전에 일본인 자신의 죄를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논평했다.<xref ref-type="fn" rid="fb069"><sup>69)</sup></xref>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 사설은 박열을 동정할 것이 아니라, 박열의 사상행위를 야기한 환경 즉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p>
<p><xref ref-type="bibr" rid="B005">1926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xref> 사설 &#x003C;박열사건에 鑑하여&#x003E;는 “공판의 일부 공개 외에 방청을 금지하여 그 내용을 비밀에 부친 바 있은 즉 우리의 자유로운 논평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일갈한 후 박열 같은 조선인뿐 아니라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간노 스가(菅野スカ)같은 일본인도 대역 사건을 일으켰음을 지적하며, “통치자들은 이것을 국정 변화라는 점에서 또 조선인의 민족적 심사라는 점에서 깊이 성찰해야만 할 것이다. 더욱이 도도하게 밀려드는 세계적 변조에 대하여 일단의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70"><sup>70)</sup></xref>라고 했다. 천황제를 반대하는 이른바 대역은, 피식민지인만이 아니라 일본인도 행하는, 도도한 세계적 흐름임을 강조한 것이다.</p>
<p>1926년 3월 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최종 공판이 열렸다. 마키노 재판장은 형법 제73조 및 폭발물단속벌칙 제3조 위반을 적용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5">3월 26일자 『조선일보』</xref>는 ‘박열부부 사형 언도...판결을 듣고 돌연 ‘만세’를 고창...박열은 조선어로 뭔가 말해 금자문자는 웃으면서 만세!’라는 제목을 크게 내걸었고, 일시 법정이 소란스러워졌다고 썼다. 당시 정간 중이었던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가 한 달여 후에 낸 기사에서, “일본의 기초를 파괴하려다가 발각 체포되어 동경대심원에서 대역죄로...사형의 판결 언도를 받은 박열은 조선말로 재판정을 질책하였고 금자문자는 법정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xref ref-type="fn" rid="fb071"><sup>71)</sup></xref>고 했다. 최초 공판 날 조선예복을 입고 조선어를 사용했던 박열은, 최종 공판 날에도 하얀 조선옷을 입고 조선어를 사용했다.<xref ref-type="fn" rid="fb072"><sup>72)</sup></xref></p>
<fig id="p006"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사진 6</label>
	<caption>
		<title><xref ref-type="bibr" rid="B001">『東京朝日新聞』, 1926.3.26.</xref></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6.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공판이 결정된 후 1년 4개월이 지나 최종 판결이 났지만, 최종 판결은 그 판결이 선고된 날 이미 재고되기 시작했다. 3월 25일 검사총장 고야마 마스키치(小山松吉)는 사법대신 에기 다스쿠(江木翼)에게 은사신청서를 제출했고, 사법대신은 26일자로 수상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에게 상주서를 제출했다.<xref ref-type="fn" rid="fb073"><sup>73)</sup></xref> 1926년 4월 5일 수상의 은사 상주에 대한 재가가 이뤄지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한다는 발표가 있었다.<xref ref-type="fn" rid="fb074"><sup>74)</sup></xref> 4월 6일 박열은 도쿄 동북 방면 지바 현의 지바(千葉)형무소로 이감되고, 4월 8일 가네코 후미코는 도치기(栃木)현 우쓰노미야(宇都宮)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이감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75"><sup>75)</sup></xref> 당시 정간 중이었던 『동아일보』는 20여일 후 관련 소식을 짧게 전했다.<xref ref-type="fn" rid="fb076"><sup>76)</sup></xref></p>
<p>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보호검속으로 유치장에 들어간 1923년 9월부터 약 2년 동안 그들 소식은 보도 금지되거나 지체된 채 전해졌지만, 대역 사건 공판이 결정되어 보도 금지가 풀린 1925년 11월부터 재판이 종결된 1926년 3월까지는 신속하고 자세하게 속속들이 기사화되었다. 그래서 ‘대역 사건 재판’을 보여주는 신문이라는 무대에는 현장감과 긴장감이 각별했다. 그들은 독방에 각각 수감된 채 글을 쓰고, 혼인 신고를 하고, 재판장에서 자신들이 있을 위치와 의상을 시시콜콜 기획하고 제안했다. 대역 사건 재판 공판 첫 날의 풍경은 박열이 주도한 재판극의 하이라이트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혼례식장에 나온 신랑 신부처럼 공들여 자신들을 드러내고, 천황제 국가에 대한 조선 민족의 저항과 비판이 이 재판의 주제임을 드러내었다.</p>
<p>전술적으로 이 기획은 탁월했다. 공판 진행 과정에서 확인되었듯, 공판이라지만 일반인의 방청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제한될 수 있었고, 피의자의 진술이나 변호인단의 변론 내용 등은 알려지기 어려웠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 사건 공판의 속성을 꿰뚫었다. 그들은 사전 준비로 관심을 끌고 공판의 한 순간을 인상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공판의 효과를 최대치로 활용하며 사건의 본질을 탁월하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그들의 짧고 강렬한 그리고 인상적인 무대 출현은 ‘버림받은 자들이 일으킨 불상사’로 사건을 정리한 대심원 판사 마키노 기쿠노스케의 말을 뒤집었다. 그들은 불상사를 일으킨 버림받은 자들이 아니라, 천황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자유인들임을 과시했다.</p>
</sec>
</sec>
<sec id="sec004">
<title>4. 괴사진 사건의 수행성</title>
<p>1926년 7월 22일 형무소 감방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식민지조선에 알려진 것은 7월 31일이었다. ‘대역범 박열의 애인’<xref ref-type="fn" rid="fb077"><sup>77)</sup></xref>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소식과 함께, 대심원 판결이유서에서 재판장 마키노가 대역죄를 저지른 원인으로 언급한 가네코 후미코의 성장 환경이 다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78"><sup>78)</sup></xref> 공판에서 변호를 했던 후세 다쓰지는 가네코 후미코를 “사랑과 주의를 박렬과 공명한,” 최후 판결 때 박열보다 먼저 두 손을 들고 만세를 고창한 “사나희다운 여자”라고 했다.<xref ref-type="fn" rid="fb079"><sup>79)</sup></xref> 8월 1일 자살 방법이 ‘속보’로 전해졌다. 염세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해서 여간수 한 명이 특별히 경계해 왔는데, 22일 오전 6시반경에는 아침볕이 드는 철창 아래서 삼노끈을 잇는 일을 하는 걸 봤는데 6시 40분경에 보니 철창에 삼노끈으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xref ref-type="fn" rid="fb080"><sup>80)</sup></xref> 했다.</p>
<p>자살 소식이 알려진 후 유해 인도와 관련해 다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녀의 사체는 우쓰노미야형무소 측에 의해 서둘러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고,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원심창·육흥균 등 흑우회 회원 7명이 우쓰노미야형무소로 몰려가 사인 규명과 사체 인도를 요구했다. 30일 친모와 후세 다쓰지 변호사 등 몇몇의 일행이 공동묘지에서 파내어 31일 유해를 화장하고 후세 변호사 집에 잠시 보관 후 박열의 고향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묘지에 묻을<xref ref-type="fn" rid="fb081"><sup>81)</sup></xref>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유해를 탈취하려 했고, 이로 인해 김정근, 구리하라 가즈오 등이 검속되기도 했다.<xref ref-type="fn" rid="fb082"><sup>82)</sup></xref> 일본 경시청은 박열의 가족이 도쿄로 오면 유골의 이송을 허가하겠다고 제안했다.<xref ref-type="fn" rid="fb083"><sup>83)</sup></xref> 흑우회 회원들은 박열의 형 박정식을 일본으로 초청했고, 8월 14일 경북 상주를 출발했던 박정식은<xref ref-type="fn" rid="fb084"><sup>84)</sup></xref> 16일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고,<xref ref-type="fn" rid="fb085"><sup>85)</sup></xref> 29일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가지고 식민지조선으로 향했다.<xref ref-type="fn" rid="fb086"><sup>86)</sup></xref></p>
<sec id="sec004-1">
<title>4-1. 논란과 분란의 생산</title>
<p>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직후인 7월 말 ‘긔괴한 사진을 첨부한 괴문서’가 일본의 신문사에 뿌려졌다는 소식이,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 관련 소식으로 들썩이던 1926년 8월 중순 식민지조선에도 전해졌지만,<xref ref-type="fn" rid="fb087"><sup>87)</sup></xref> ‘긔괴한 사진’을 첨부한 ‘괴문서’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1926년 7월 29일부터 괴문서 게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긔괴한 사진’이 조성한 의문과 갈등은 끊임없는 기삿거리를 제공했고, 괴사진의 주인공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기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기사가 실리는 지면도 확대되었다. 이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수감 소식이나 재판 기사는 주로 신문의 2면에 실렸다. 그런데 괴사진 관련 보도는 1면에 실린 경우가 많았고, 1면과 2면에 동시에 실리기도 했다. 그래서 1926년 8월 중순부터 괴문서 게재 금지가 해제된 1927년 1월 20일까지, 괴사진 관련 기사들은 거의 연일, 때로 1면과 2면에 동시에, 『동아일보』 지면을 덮었다. 독방에 수감 중인 두 사람이 ‘긔괴하게’ 함께 찍힌 사진은 대역 사건 피의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 것이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는가, 누가 사진을 유출했는가, 누가 사진을 첨부한 괴문서를 작성해서 신문사에 보냈는가 등을 둘러싼 추리와 사실 확인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p>
<p>사진 찍은 이는 일찌감치 밝혀졌다. 도쿄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立松懷淸)는 사진 찍은 게 문제되자 1926년 8월 9일 사직서를 제출했고 1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그러나 사진을 왜 언제 찍었느냐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계속되었다. 회유책으로 사진을 찍었다고도 하고,<xref ref-type="fn" rid="fb088"><sup>88)</sup></xref> 예심 종결 후 박열이 “금자문자의 얼굴도 모르는 박열의 집에 두 사람이 같이 박힌 사진 한 장을 보내고 싶다고 여러 가지로 애원”해서 찍었다고도 했다.<xref ref-type="fn" rid="fb089"><sup>89)</sup></xref> 촬영 시기에 대해 4월 9일이라는 얘기도 나오고,<xref ref-type="fn" rid="fb090"><sup>90)</sup></xref> 5월에 찍은 사진을 절도하여 예심결정서와 함께 형무소에 있던 이시구로(石黑)에게 주었다고 박열이 자백했다는<xref ref-type="fn" rid="fb091"><sup>91)</sup></xref> 기사도 나왔다. 이 사진의 유출자에 대한 논의도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다테마쓰가 예심판사실 책상 서랍에 둔 사진을 서기가 빼서 정당에 팔았다는 의심이 있어 서기가 취조를 당했고,<xref ref-type="fn" rid="fb092"><sup>92)</sup></xref> 다테마쓰가 박열에게 주었을 가능성과 다테마쓰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박열이 빼돌렸을 가능성 등등이 논란이 되었다. 독방에 있으면서 따로따로 심문을 받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포즈를 취할 수 있었는지를 둘러싼 논의는 대역죄인을 ‘우대’한 잘못으로 논의되었다. 전 법상(法相)인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는, 방약무인의 행동을 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우대하고 감형의 은전을 주청한 책임을 물어 현 법상인 에기 다스쿠의 불신임과 내각 불신임을 거론했다.<xref ref-type="fn" rid="fb093"><sup>93)</sup></xref></p>
<p>의심과 의문이 일로 확대되자, 1926년 9월 1일 사법성이 괴사진 사건의 전말을 발표했다. 사법성 보고에 따르면, 사진은 1925년 5월 2일경 예심판사 다테마쓰가 예심 제5호 조사실에서 촬영한 것이다. 다테마쓰가 막 사진을 찍으려 할 때 “피고인 문자는 돌연히 피고인 준식의 의자로 덤벼들어서 같이 안고 동시에 준식은 그 왼편 손을 피고인 문자의 어깨에 얹었는 고로 그를 제지하였으나 그들은 그에 불응하였는 바 방심하고 그대로 촬영”했고 심문할 때 박열의 청구에 의해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박열이 교묘히 손에 넣었다<xref ref-type="fn" rid="fb094"><sup>94)</sup></xref>고 했다. 9월 2일 사법성은 추가 설명을 붙였다. 피고인들이 5월 2일 결혼식을 올렸다거나 한 방에 기거한다는 것은 ‘허전(虛傳)’이라며,<xref ref-type="fn" rid="fb095"><sup>95)</sup></xref> 피고인을 ‘우대’했다는 논의를 일축했다.<xref ref-type="fn" rid="fb096"><sup>96)</sup></xref></p>
<p>괴사진 사건에 대한 사법성의 발표는 사진이 찍힌 경위를 밝혔을 뿐, 그 사진이 어떻게 형무소 밖으로 빼돌려져 괴문서를 작성한 사람 손으로 넘어갔는지, 그 괴문서 작성자가 누구인지 등은 여전히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논란이 더욱 가열되었고, 사법성의 발표는 곧 다른 증거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 괴사진 촬영 시기를 1925년 5월 2일이라고 정부는 주장했지만, 정우회 측에서는 괴사진 뒤에 박열이 쓴 글 ‘대정십사년 십월 칠일 차(此)를 촬영하였다’가 발견되었다며<xref ref-type="fn" rid="fb097"><sup>97)</sup></xref> 10월 7일 설을 주장했다. 1926년 12월에는 이치가야형무소 간수 두 명이 사진 유출 관련자로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98"><sup>98)</sup></xref></p>
</sec>
<sec id="sec004-2">
<title>4-2. 이야기성 기사의 확장</title>
<p>기사화가 금지되어 괴문서의 내용을 알 수 없던 식민지조선에서는, 이야기식 기사를 통해 사진의 이동 경로와 이동 가담자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8일, 19일 이틀에 분재된 기사는 기자가 우연히 구하게 된 이시구로 에이치로(石黑銳一郞)가 쓴 ｢西下의 車 中에서｣를 소개하는 식으로 쓰였다. ｢서하의 차 중에서｣에 따르면, 박열은 1925년 6월 독방이 있는 수감동으로 왔고 10월에 이시구로에게 예심결정서, 구류갱신서 넉 장, 기념시, 사진 두 장의 보존을 부탁하며, 예심결정서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힘써 이해를 하도록 하고 싶으니까 되도록은 발표할 방침”이라고 했지만 사진은 절대 발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시구로는 사진 등은 차입 들어온 책에 숨기고, 예심결정서는 이불 속에 숨겨 1925년 10월 29일 가석방 때 가지고 나왔는데, 집에 오니 책은 차입시켜준 사람에게로 돌려보내져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시구로 에이치로는 ｢서하의 차 중에서｣를 통해, 석방되어 보니 사진이 든 책의 행방을 알 수 없고 따라서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와는 무관하다고 하는 셈이다.</p>
<p>기자는 ｢서하의 차 중에서｣의 이야기성을 확장시키는 식으로 이를 기사화한다. 우선, 기자는 ｢서하의 차 중에서｣에 실린 내용이 확인된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기자는 ｢서하의 차 중에서｣라는 글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어 이를 알리고자 쓴다고 했다. “박열부부의 이상한 사진이 그 엄중한 형무소로부터 어떠한 방법으로 누구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스핑크스 수수께끼로 있었고 따라서 그 책임도 무를 곳이 없었던 바 우연히도 박열과 같은 감방에 들어 있던 石黑銳一郞이라는 사람의 ｢서하의 차 중에서｣라는 글이 우연한 기회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어 당시의 전후 사정이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알리게 되었으니 다음에 그 수기의 일반을 소개한다”<xref ref-type="fn" rid="fb099"><sup>99)</sup></xref>고 했다. 즉 기자는 ｢서하의 차 중에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뿐 이시구로 에이치로를 모른다고 하고 있다. 둘째, 기자는 ｢서하의 차 중에서｣가 전승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기사의 대부분은 ｢서하의 차 중에서｣의 소개인데, 그 ｢서하의 차 중에서｣의 말미에 “지금 관서로 내려가는 차 중에서 이것을 써서 일체를 세상에 공포한다. 그리고 무책임한 정부의 성명서에 대하여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기물품을 아울러 나도 오래지 아니하여 나의 믿음직한 사람의 손을 거쳐 성명서를 발표할 결심이다(이하 30행 말소)”<xref ref-type="fn" rid="fb100"><sup>100)</sup></xref>라는 문장이 쓰였다고 했다. 기자가 이시구로 에이치로로부터 직접 글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서하의 차 중에서｣에서 세상에 ‘공포’할 의사를 밝히고 있으니, 기자가 기사화하는 것은 글쓴이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으로 봐달라고 넌지시 양해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p>
<p>이시구로 에이치로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 10월에 이시구로 에이치로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조사 과정에서 상황은 더욱 오리무중이 된다. 이시구로는 이치가야형무소에 있을 때 한 잡역부가 박열의 감방을 소제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기념품을 얻고자 한다는 말을 하여 문제의 사진을 얻었노라고” 하였고, 이 진술을 들은 이시다(石田) 검사가 1926년 10월 19일 이치가야형무소 소장인 아키야마 가나메(秋山要)를 불러 조사하는 중에 이 잡역부가 시부야(澁谷) 부근에서 기차에 깔려죽은 것을 “판명”하게 된다.<xref ref-type="fn" rid="fb101"><sup>101)</sup></xref> 잡역부가 죽었으니 이시구로가 한 진술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게 되었지만, 사진 유출과 박열은 무관하다는 이시구로의 진술은 오히려 의심에서 배제된다. 즉 박열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이시구로가 유출한 것은 맞지만, 박열에게 사진을 유출시킬 의지와 목적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박열도 이시구로도, 괴문서의 생산 및 유포와 관계있으리라는 혐의에 포획되지는 않게 된 것이다.</p>
<p>이 상황은 다테마쓰의 진술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10월 취조를 받게 된 예심판사 다테마쓰는 “박열은 절취한 사진으로써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 위하여 외부로 내어보낸 것”이라고 진술하며 박열의 의지와 의도를 강조하고, 사진 촬영 당시의 경과와 진상을 새삼스럽게 발표하기도 했다.<xref ref-type="fn" rid="fb102"><sup>102)</sup></xref> 다테마쓰의 진술은 괴사진의 유출과 유포에 있어 박열의 의지와 의도가 작용했으리라는 의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증거를 통해 입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괴사진의 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논란을 키웠다.</p>
<p>그래서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괴사진은 일본 정치계를 흔드는 진앙이 되었다. 이 괴사진이 가네코 후미코의 수상한 죽음과 결합되어, 대역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한 사법부와, 대역죄인의 감형을 추진한 내각을 뿌리부터 흔들었던 것이다. 1926년 9월부터 간헐적으로 정부 규탄 국민대회가 열리고,<xref ref-type="fn" rid="fb103"><sup>103)</sup></xref> 사법부 관계자에 대한 문책론이 여러 차례 논의되었다.<xref ref-type="fn" rid="fb104"><sup>104)</sup></xref> 11월 15일경에는 박열 사건으로 떨어진 법권의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전국사법관 소집 회의가 추진되기도 했고,<xref ref-type="fn" rid="fb105"><sup>105)</sup></xref> 재판소장의 징계재판도 열렸다.<xref ref-type="fn" rid="fb106"><sup>106)</sup></xref> 1927년 1월 20일 정우회와 정우본당은 제휴하여 와카쓰키(若槻) 내각불신임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와카쓰키 내각은 3일간 의회 정지를 결정한 뒤, 수상이 정우회와 정우본당 총재와 회담하고 정쟁 중단을 합의함으로써 문제는 일단락되었다.<xref ref-type="fn" rid="fb107"><sup>107)</sup></xref></p>
<fig id="p007"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사진 7</label>
	<caption>
		<title><xref ref-type="bibr" rid="B003">『매일신보』, 1926.10.21.</xref></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7.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52회 국회가 개회 중이던 1927년 1월 20일, 괴사진과 괴문서의 보도 게재 금지가 해제되어, 괴사진이 실리고 괴문서의 내용이 발표되었다.<xref ref-type="fn" rid="fb108"><sup>108)</sup></xref> 괴문서의 내용은, 예심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30분 동안이나 같이 있었던 것, 둘째 재판이 확정된 다음에 박열 부부가 박열의 독방에 수 시간 함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 셋째 가네코 후미코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 당국이 대책을 강구하였다는 점, 넷째 가네코의 죽은 시체에는 이상스런 점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xref ref-type="fn" rid="fb109"><sup>109)</sup></xref></p>
<table-wrap id="ft003">
<table width="100%">
<tbody>
<tr align="center">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8.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8 <xref ref-type="bibr" rid="B006">『중외일보』, 1927.1.23.</xref></p></td>
<td><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09.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p>사진 9 <xref ref-type="bibr" rid="B006">『중외일보』, 1927.1.23.</xref></p></td>
</tr>
</tbody>
</table>
</table-wrap>
<p>이후에도 박열 관련 소식은 간간히 기사화되었다. 1927년 초, 박열 공범자로 잡혀 4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던 김중한에 대한 재판 내용이 알려졌고<xref ref-type="fn" rid="fb110"><sup>110)</sup></xref> 박열이 감옥에서 병을 앓고 있어 이감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xref ref-type="fn" rid="fb111"><sup>111)</sup></xref> 1928년 진주지청에서는 박열 사건에 관련되었던 정태성 이경순 홍두표에 대한 공판이 이뤄졌다.<xref ref-type="fn" rid="fb112"><sup>112)</sup></xref> 가네코 후미코가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쓴 수기를 받은 구리하라 가즈오(栗原一男)에 의해, 그녀가 죽은 지 5년만인 1931년 7월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春秋社)가 출간되었고, 관련 사실이 조선에서도 소개되었다.<xref ref-type="fn" rid="fb113"><sup>113)</sup></xref> 박열은 1936년 8월 스케(小管)형무소로 옮겨졌다. 1938년 박열이 전향했다는 기사가 이어졌지만,<xref ref-type="fn" rid="fb114"><sup>114)</sup></xref> 석방되지는 않았다. 1943년 8월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타(秋田)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된 지 두 달을 훌쩍 넘긴 1945년 10월 27일 출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1일만에 자유인이 되었다.</p>
</sec>
</sec>
<sec id="sec005">
<title>5. 드라마티스트의 음모와 직접행동</title>
<p>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의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전위 조직이나 계급 독재를 거부하며, 대중이 스스로 직접행동(action direct)을 해서 새로운 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해주길 바라거나 말이나 구호로만 사상을 표현하지 않고 직접행동에 나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행동하는 것, 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 직접행동의 의미였다. 그래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때로는 폭탄과 무기를 들고 권력에 맞섰고, 때로는 학교를 세우고 탁아소를 만들며 공동체를 꾸렸다.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푸제(Émil Pouget)에 따르면, “직접행동은 노동 계급이 실질적으로 반동에 맞설 때 외부의 어떤 인간, 권력,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올바른 투쟁 조건을 창조하며, 스스로 행동 방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직접행동과 연결된 삶을 통한 선전, 실행을 통한 선전(propaganda by deed)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아니라 공명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만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공감을 불러온다.<xref ref-type="fn" rid="fb115"><sup>115)</sup></xref></p>
<p>박열은 1922년 7월에 발행한 『흑도』 제1호에 실린 ｢직접행동의 표본｣에서 <xref ref-type="fn" rid="fb116"><sup>116)</sup></xref> 법률, 도덕, 습관을 무기력하게 하는 직접행동의 위력을 거칠게 강조한 바 있다. 직접행동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자세히 펼쳐진 글은 ｢음모론｣이다. 박열은 대역사건 재판이 열리기 전인 1925년 3월 1일 가타가야 형무소에서 ｢음모론｣을 탈고하고, 이를 예심판사인 다테마쓰에게 주었다.<xref ref-type="fn" rid="fb117"><sup>117)</sup></xref> 이 글에서 박열은 지배와 착취를 본령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국가에서 참정권 획득 운동이나 정당적 정치 운동 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직접행동의 여러 사례를 거론한 후 현상황에 필요한 직접행동을 ‘음모’라고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는 봉기, 폭동, 반란 등을 수단으로 하는 직접행동인데, 이는 사회적 정세의 혼란과 국가 규율의 이완이 있을 때 가능하다. 둘째는 파업, 태업, 보이콧, 총파업을 수단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 즉 경제적 직접행동인데, 이는 국가 권력에 대응할 전투 수단이 되지 못한다. 셋째는 음모다. “폭탄과 총과 칼과 독과 사람 그리고 자신의 생명으로” “온갖 기회를 이용해 또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목적 실현을 기하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118"><sup>118)</sup></xref> 이 셋째 행동론이 테러적 직접행동론으로 해석되곤 하는데,<xref ref-type="fn" rid="fb119"><sup>119)</sup></xref> 음모에 대한 박열의 설명에서 테러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유효한 수단을 골라야 한다고 했지만 그 수단이 테러라고 한정짓지는 않는다. 그는 가면을 쓴 배우, 가면을 쓴 음모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p>
<fig id="p010"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사진 10</label>
	<caption>
		<title><xref ref-type="bibr" rid="B004">『시대일보』, 1925.11.25.</xref></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67812&amp;imageName=jpn_2019_25_02_117_p010.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　</p>
<p>　　그렇다면 음모를 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음모를 꾀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묘하게 또 민첩하게 가면을 써야 한다. 성서 속에 있는 위선자라고 하는 말의 본래 의미는 배우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배우라는 위선자는 무대 위에서 때로는 왕자가 아니면서 왕자의 가면을 쓰고, 때로는 귀인이 아니면서 귀인의 가면을 쓰며, 또 때로는 죽은 자가 아니면서 죽은 자의 가면을 쓴다. 이것이 그들의 직업이다.</p>
<p>　　위선자라고 욕을 먹어도 좋다. 우리들도 한동안 참으며, 이 배우의 일을 할 것이다. 때로는 충의로운 자가 아니면서 충의로운 자의 가면을 쓰고, 때로는 도덕가가 아니면서 도덕가의 가면을 쓰고, 또 때로는 겁쟁이가 아니면서 겁쟁이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배우는 그 관객의 기호에 따라 관객을 기쁘게 하고 웃기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보게 하여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적의 기호에 따라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우리의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내면적 요구의 표현으로서, 자신의 타오르는 반역심을 채우기 위해서 가면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극히 진지하게 가면을 쓰는 것이다...(중략)... 과감하고 대담하게, 완강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가면을 사용하자. 즉 음모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이용해서 신출귀몰하게 행동하라<xref ref-type="fn" rid="fb120"><sup>120)</sup></xref></p>
<p>　</p>
<p>박열은 연극적 비유를 사용한다.<xref ref-type="fn" rid="fb121"><sup>121)</sup></xref> (드라마의) 목적을 위해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 음모가는 사회 변화를 위해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자라고 진술한다.</p>
<p>그렇다면 감옥에서 이 글을 쓰던 박열은 가면을 쓴 음모가로서 무엇을 행하고 있었을까. 감옥에서도 그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았을까. 드라마티스트처럼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드라마타이즈(dramatize)<xref ref-type="fn" rid="fb122"><sup>122)</sup></xref>하는 것, 극작가나 연출가가 되는 것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조정해내고, 의도와 목적을 수행하는 배우로서 사건이 눈에 띄도록 하는 것도 그의 ‘음모’는 아니었을까. 괴사진을 남긴 것도, 재판이 주목받도록 한 것도 그의 음모가 아니었을까.</p>
<p>본고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판 이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형무소 독방에서 글을 쓰며 ‘사랑과 주의’를 함께 하는 동지로서 공판이 결정될 무렵 혼인 신고를 하고 괴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재판 직전, 재판 진행에 대해 세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하여 승낙을 얻어낸다. 재판에서는 천황 제국주의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공연된다. 이들은 조선 의상을 입고 등장해 재회하는 모습을 보이며 재판장을 유사 혼례식장으로 만들었다.<xref ref-type="fn" rid="fb123"><sup>123)</sup></xref> 또한 이들은 각각 조선말로 조선어 이름을 말하며 재판정이 제국주의 법정임을 드러냈다. 재판 이후가 클라이막스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출된 괴사진은, 재판 이전 상황의 문제성을 드러내고 논란거리가 되도록 하면서 급기야 일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p>
<p>박열·가네코 후미코에 의해 주도된 이 퍼포먼스는 식민지조선의 신문지상에 중계되며 심문과 재판의 목격자와 수용자를 창출했다.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에서 실현되는 드라마가 된 것이다.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들은 공판 첫날 재판정에 등장하는 그들의 의상과 몸짓과 말을 연극 대본처럼 기술함으로써 그들의 말과 행동이 들리고 보이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재판에서 연출해낸 장면과 그 장면을 전하는 기사화 방식이 이들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에 부동의 현장감과 강렬함을 부여했다. 보도 금지가 해제된 직후 식민지조선의 각 신문에 실린 괴사진은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의 클라이막스로 경험되었다.</p>
<p>보도 금지 등 신문이 처한 조건이 수용자의 경험에 관여적 요소로 작용하면서, 더욱 극적이고 정서적 강렬함이 있는 사건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사건의 정체는 ‘대음모’에서 ‘불령사 사건’으로, 다시 ‘불경 사건 또는 대역 사건’으로 바뀌었다. 이 명칭 자체는 일제가 지칭한 것이었지만, 지연되고 간접화된 그리고 골자만 되풀이되어 정보량이 부족한 소식들이 지속적으로 보도되면서, 사건이 ‘구성 중’임을,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궁금증과 의심이 커지고, 극적 긴장감이 조성되었으며, 사건에 대한 정서적 감응력이 확대되었다.</p>
<p>또한 식민지조선에서 박열 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보도 금지 등의 이유로 실제 일어난 순서대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볼 때, 플롯화된 채 알려졌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문사에 괴사진과 함께 괴문서가 유포된 것은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 직후였다. 식민지조선에서는 보름이나 지나 괴사진 소식이 알려졌을 뿐 괴문서는 언급조차 불가능했다. 대역 사건도 아닌데 보도가 금지되었으니 궁금증과 의심이 커졌고, 서스펜스의 밀도가 증가했다. 괴사진이 게재된 것은 6개월이 지난 후였다. 괴사진과 관련된 수사와 처벌이 진행되고 내각 불신임 여부로 정계가 시끄러울 때 비로소 괴사진이 게재되면서 사건의 시말이 드러났다. 잘 짜여진 플롯에 의한 것처럼 사건이 인지되고 경험되었던 셈이다.</p>
<p>신문이라는 무대는 박열 및 가네코 후미코가 촉발한 상황에 관련되거나 개입한 인물들의 행위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역 사건 재판부의 판사였던 미카노는 ‘담화’ 발표를 통해 사건을 관할하는 자로서 위상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행위를 불우한 환경에서 싹튼 허무주의와 과격한 파괴주의로 설명하려 했다. 반면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5">『조선일보』</xref>의 ‘사설’은 불우한 환경의 근거가 천황제 국가주의이며 그런 천황제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적 추세라고 되받아쳤다. 또한 괴사진 유출자인 이시구로에 대한 『동아일보』 기자의 기술 방식은, 괴사진 사건의 괴이한 면모를 부각하는 데 일조했다.</p>
<p>사회적 드라마로서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xref ref-type="fn" rid="fb124"><sup>124)</sup></xref>의 ‘조화가 깨진 혹은 반조화적인’ 사태였다. 이들이 구속된 채 이뤄진 심문 상황, 재판 진행 상황, 그리고 재판 이후에 벌어진 의문의 상황들은, 위반-위기-교정-재통합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드라마의 국면 구조가 실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아나키스트의 저항에 의해 촉발된 위반 국면은 천황제 국가주의를 대변하는 재판을 전후해 위기 고조와 교정 시도의 국면 전환이 이뤄지고, 급기야 저항의 흔적을 미봉하는 재통합으로 귀결되었다.<xref ref-type="fn" rid="fb125"><sup>125)</sup></xref> 1910년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26명이 사형당하거나 수감되는 일명 고토코 슈스이 대역 사건이 진행되었고, 1923년에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야가 살해되고 난보쿠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후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다.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은 이들과 관련된 사건 기사화를 통해 피압박 민족이 보이고 들리도록 하며 다이쇼 시대의 균열을 자못 드라마틱하게 보여줬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총성을 울리지도 폭탄을 터뜨리지도 않았는데, 1920년대 전반기 식민지조선에서 가장 뜨거운 사건으로 경험되었다.</p>
</sec>
</body>
<back>
<fn-group>
<fn id="fb001"><label>1)</label><p>金子文子,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 春秋社, 1931.</p></fn>
<fn id="fb002"><label>2)</label><p>소설가 세토우치 하루미가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xref ref-type="bibr" rid="B032">瀨戶內晴美, 『餘白の春』, 中央公論社, 1972</xref>)을 발표했다. 야마다 쇼지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예심증언과 재판 기록, 괴사진 촬영과 유출 경위 등을 연관지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간됨과 사상을 해석·평가하는 논의를 진행했고(山田昭次, 『金子文子』, 影書房, 1996), 관동 대지진 시기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연구서도 출판했다(<xref ref-type="bibr" rid="B021">山田昭次, 『關東大震災時の朝鮮人大虐殺: その國家責任と民衆責任』, 創史社, 2003</xref>).</p></fn>
<fn id="fb003"><label>3)</label><p>박열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가 박열 평전을 출판했고(布施辰治, 張祥中, 鄭泰成, 『運命の勝利者-朴烈』, 世紀書房, 1946), 김일면도 박열의 행적과 관련 사건을 정리한 책을 출판했다(<xref ref-type="bibr" rid="B030">金一勉, 『朴烈』, 合同出版, 1973</xref>). 그리고 재판준비회가 재판기록을 모아 출판했다. <xref ref-type="bibr" rid="B031">再審準備會 編, 『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 黑色戰線社, 1977</xref>.</p></fn>
<fn id="fb004"><label>4)</label><p>박열은 2006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고, 후세 다쓰지는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2007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를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인정했다. 2018년에는 가네코 후미코도 건국훈장을 받았다.</p></fn>
<fn id="fb005"><label>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6">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의 『한국아나키즘운동사』(형설출판사, 1978)</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9">김상웅의 『박열평전』(가람기획, 1996)</xref>이 출판되었고, 이호룡의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와 김명섭의 ｢재일 한인아나키즘운동 연구｣(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가 나왔다. 이후 김명섭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xref ref-type="bibr" rid="B008">『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xref>을 출판했고, 이호룡은 <xref ref-type="bibr" rid="B026">『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지식산업사, 2001)</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27">『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지식산업사, 2015)</xref>을 각각 출판했다.</p></fn>
<fn id="fb006"><label>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7">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애영 역, 이학사, 2012</xref>; <xref ref-type="bibr" rid="B029">후세 다쓰지,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현석 역, 현인, 2017</xref>; <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xref>; <xref ref-type="bibr" rid="B021">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이진희 역, 논형, 2008</xref>. 이상의 책들이 2000년 이후 번역 출판된 반면, <xref ref-type="bibr" rid="B019">세토우치 하루미의 『餘白の春』(1972)은 『운명의 승리자』(금용진·양종태 공역, 상일문화사, 1973)</xref>라는 제목으로 일찌감치 번역 출판되었다.</p></fn>
<fn id="fb007"><label>7)</label><p>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대심원 2차 공판에서 간토 대지진기에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인의 대역 사건이 필요했다는 점을 강조했고, 야마다 쇼지도 이를 언급하며 강조했다(<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324쪽</xref>). 한국에서도 이 대역 사건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 ‘꾸며낸’ 사건이라는 점을 지적해 왔다. <xref ref-type="bibr" rid="B016">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형설출판사, 1978, 174쪽</xref>; 박종렬, ｢천황암살 기도한 ‘박열’사건의 진상｣, 『일본평론』, 1992년 가을 겨울호, 424-425쪽.</p></fn>
<fn id="fb008"><label>8)</label><p>일본 정치사에서도 괴사진 사건은 중요하게 언급된다. “1926년에 먼저 ‘박열 괴사진 사건’이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박열이 취조실에서 아내 가네코 후미코를 무릎에 앉혀 안고 있는 사진과 함께, 이런 대우를 허락하는 것은 ‘국체 관념’의 결여라고 사법상 에기 다스쿠(江木翼) 등을 공격하는 괴문서가 배포되었다. 정우회와 정우본당이 이것을 거론하면서 감형 조치를 포함해 헌정회 내각을 공격했다.” <xref ref-type="bibr" rid="B022">야스다 히로시(1998), 『세 천황 이야기—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정치사』, 하종문·이애숙 역, 역사비평사, 2009, 246쪽</xref>.</p></fn>
<fn id="fb009"><label>9)</label><p>1910년 5월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일련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검거되었고, 1911년 1월 형법 73조를 위반한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 판결을 받은 24명 증 12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다른 12명은 판결 후 6일째인 1월 24일 처형되었다.</p></fn>
<fn id="fb010"><label>10)</label><p>1923년 12월 난바 다이스케가 히로히토 황태자를 엽총으로 암살 기도했다가 검거되었고, 1924년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은 다음날 처형되었다.</p></fn>
<fn id="fb011"><label>1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일본 대심원 실시 이래 세 번밖에 없었던 특수재판&#x003E;, 『매일신보』, 1926.3.3.</xref></p></fn>
<fn id="fb012"><label>12)</label><p>1923년 3월 대규모 국내 폭탄 반입을 시도하던 의열단원들이 경시청의 경부 황옥과 함께 체포된 후 8월 7일과 8일 양일간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들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다. <xref ref-type="bibr" rid="B002">의열단사건 공판 기사(『동아일보』, 1923.8.8.</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2">황옥의 법정진술 기사(『동아일보』, 1923.8.9.</xref>) 참고.</p></fn>
<fn id="fb013"><label>13)</label><p>고토쿠 슈스이 사건 당시 12명이 처형당했는데, 이 중 여성 간노 스가와 고토쿠 슈스이의 관계가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사설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박열사건에 鑑하여&#x003E;(『조선일보』, 1926.3.17.</xref>)에서도 고토쿠 슈스이와 간노 스가 대역 사건이 언급된다.</p></fn>
<fn id="fb014"><label>14)</label><p>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들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을 기사화한 방식과 내용을 비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본고는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다. 경성에서 발간되던 일본어 신문인 <xref ref-type="bibr" rid="B001">『朝鮮新聞』</xref>이 관련 소식을 빠르게 전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xref ref-type="bibr" rid="B003">『매일신보』</xref>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은사’를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기사화했다.</p></fn>
<fn id="fb015"><label>1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6">『한국아나키즘운동사』(형설출판사, 1978)</xref>의 한 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다룰 때 증언과 국내 신문기사들을 자료로서 활용했는데, 신문기사가 꼼꼼하고 폭넓게 검토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의 연구서들은 일본 신문에 실린 기사와, 일본에서 출판된 심문조서를 포함한 재판기록들, 가네코 후미코가 쓴 자서전을 주 자료로 사용했다.</p></fn>
<fn id="fb016"><label>16)</label><p><xref ref-type="bibr" rid="B033">Marvin Carlson, <italic>Performance: A Critical Introduction</italic>, London: Routledge, 2004, pp.1-7</xref>.</p></fn>
<fn id="fb017"><label>17)</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루츠 무스너·하이데마리 울 편, 『문화학과 퍼포먼스』, 문화학연구회 역, 유로, 2009, 5-13쪽</xref>.</p></fn>
<fn id="fb018"><label>18)</label><p><xref ref-type="bibr" rid="B034">Richard Schechner, <italic>Performance Studies</italic>, London: Routledge, 2002, p.16</xref>.</p></fn>
<fn id="fb019"><label>19)</label><p><xref ref-type="bibr" rid="B017">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이기우·김익두 역, 현대미학사, 1996, 9-31쪽</xref>; <xref ref-type="bibr" rid="B018">빅터 터너, 『인간사회와 상징 행위』, 강대훈 역, 황소걸음, 2018, 25-74쪽</xref>.</p></fn>
<fn id="fb020"><label>20)</label><p><xref ref-type="bibr" rid="B023">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진수미 역, 현암사, 2016, 29-45쪽</xref>. 그는 퍼포먼스의 구성 요소로 특히 무대장치와 겉모습, 몸가짐을 구별한다. 무대장치란 행동이 일어나는, 배치되고 장식된 배경을 말하고, 겉모습은 행위자의 사회적 지위와 상황을 알려주는 요소, 몸가짐은 상호작용 상황에서 행위자가 어떤 역할을 연기할지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를 말한다.</p></fn>
<fn id="fb021"><label>21)</label><p><xref ref-type="bibr" rid="B010">김용수, 『퍼포먼스로서의 연극 연구』,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24-119쪽</xref>.</p></fn>
<fn id="fb022"><label>22)</label><p>흑도회의 조직에 대해서는 <xref ref-type="bibr" rid="B027">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69-72쪽</xref> 참고.</p></fn>
<fn id="fb023"><label>23)</label><p>『개벽』 제26호(1922.8.1.)에 실린 ‘綠陰凉話’ 중에서 “東京에 잇는 兄弟 中으로부터 組織된 黑濤會에서는 그 機關紙로 月刊 雜誌 『黑濤』를 7月 10日로써 創刊하얏다. 人間으로의 弱者의 부르지즘 即 所謂 不逞鮮人의 動靜 及 朝鮮의 內情을 아즉 피가 식지 아니한 人間味 잇는 만흔 日本人에게 紹介한다는 것(日文)이 該誌 刊行의 主旨이다.”라고 했다.</p></fn>
<fn id="fb024"><label>24)</label><p>이상협은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니카다의 殺人境-穴藤답사기&#x003E;를 총12회(『동아일보』, 1922.8.23.-9.4.)</xref> 연재했다.</p></fn>
<fn id="fb025"><label>2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更히 주목되는 신사현 사건&#x003E;, 『동아일보』, 1922.8.13.</xref></p></fn>
<fn id="fb026"><label>26)</label><p>나경석은 조선에서 결성된 ‘니카타현 조선인학살사건조사회 대표였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조사위원 출발, 나경석 씨를 특별히 파견&#x003E;, 『동아일보』, 1922.8.8.</xref></p></fn>
<fn id="fb027"><label>2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혁명가裏에 해방; 연사 白武씨 외 8명 검속, 동경에 열린 新潟 사건 연설회&#x003E;, 『동아일보』, 1922.9.9.</xref></p></fn>
<fn id="fb028"><label>2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해산 상습의 경시청, 일본에 거류하는 조선인로동상황조사회창립회는 경시청의 명령으로 또 해산&#x003E;, 『동아일보』, 1922.9.18.</xref></p></fn>
<fn id="fb029"><label>2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노동대회 주최 강연회&#x003E;, 『동아일보』, 1922.9.21.</xref></p></fn>
<fn id="fb030"><label>3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8">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일본에서의 투쟁』, 이학사, 2008, 141쪽</xref>.</p></fn>
<fn id="fb031"><label>3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경관 탄핵의 대연설회&#x003E;, 『매일신보』, 1923.5.18.</xref></p></fn>
<fn id="fb032"><label>32)</label><p>이 사건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1923년 3월 대규모 국내 폭탄 반입을 시도하던 의열단원들이 경시청의 경부 황옥과 함께 체포되었고, 8월에는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p></fn>
<fn id="fb033"><label>33)</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224-225쪽</xref>.</p></fn>
<fn id="fb034"><label>3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음모사건에 얼킨 정화, 박열과 그 애인&#x003E;, 『동아일보』, 1923.10.18.</xref></p></fn>
<fn id="fb035"><label>3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동경 ○○음모 관계자 거의 체포&#x003E;, 『동아일보』, 1923.10.21.</xref></p></fn>
<fn id="fb036"><label>36)</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230-232쪽</xref>.</p></fn>
<fn id="fb037"><label>3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불령사 사원 최근의 동정, 박열 씨는 옥중에, 한현상 씨는 보석&#x003E;, 『동아일보』, 1924.7.1.</xref> 한현상은 1924년 6월 4일 보석으로 출옥했고 그 외 4명도 그 무렵 보석 출옥했다.</p></fn>
<fn id="fb038"><label>3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무정부주의 연구단체 불령사 사건 면소&#x003E;, 『동아일보』, 1925.8.4</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불령사 사건 2년만에 예심종결. 박열 외 3사람은 다른 사건으로 다시 계속하야 비밀리에 심리 중&#x003E;, 『조선일보』, 1925.8.2.</xref></p></fn>
<fn id="fb039"><label>3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일본 궁중에 관련된 중대사건&#x003E;, 『동아일보』, 1925.11.19.</xref></p></fn>
<fn id="fb040"><label>4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대중의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 사회운동과 직접행동을 목적한 불령사 박열 사건 작일 해금&#x003E;, 『동아일보』, 1925.11.25.</xref></p></fn>
<fn id="fb041"><label>4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무정부주의자 朴烈의 황실불경사건&#x003E;, 『동아일보』, 1925.12.3.</xref></p></fn>
<fn id="fb042"><label>42)</label><p>대심원은 10월 22일 아라이 요타로(新井要太郞), 23일 다사카 사다오(田坂貞雄)를 관선변호인으로 임명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11월 12일 야마자키 게사야(山崎今朝彌)를, 14일에는 후세 다쓰지와 우에무라 스스무(上村進)를, 20일에는 나카무라 다카이치(中村高一)를, 12월 3일에는 진직현(晋直鉉)을 사선 변호인으로 한다는 신고서를 대심원에 제출했다. <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289쪽</xref>.</p></fn>
<fn id="fb043"><label>4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정신감정은 모욕, 박열로부터 限死 거절&#x003E;, 『동아일보』, 1925.12.6.</xref></p></fn>
<fn id="fb044"><label>4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x003C;김중한 애인은 옥중사망, 신산초대의 내역&#x003E;, 『시대일보』, 1925.11.27.</xref></p></fn>
<fn id="fb045"><label>4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x003C;박열과 문자의 경력&#x003E;, 『시대일보』, 1925.11.27</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보통학교의 차별적 대우에 극도로 분개한 박열 마침내 좌경사상에 가담&#x003E;, 『매일신보』, 1925.11.27</xref>; <xref ref-type="bibr" rid="B004">&#x003C;문자는 何如人&#x003E;, 『시대일보』, 1925.11.25.</xref></p></fn>
<fn id="fb046"><label>4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x003C;박열과 금자문자, 一意 집필에 전력 중&#x003E;, 『시대일보』, 1925.11.26</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옥중에서 결혼할 박열과 애인 문자, 독방에 가쳐 잇는 범인 박렬은 ｢음모론｣을&#x003E;, 『동아일보』, 1925.11.26.</xref></p></fn>
<fn id="fb047"><label>4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박렬부부 방문기’가 3회 『조선일보』(1925.12.9-10.)</xref>에 실렸다.</p></fn>
<fn id="fb048"><label>4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x003C;6년이나 있던 조선땅이 그립다...금자문자의 옥중 담&#x003E;, 『조선일보』, 1925.12.9.</xref></p></fn>
<fn id="fb049"><label>4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사형을 각오하고 옥중에서 결혼식&#x003E;, 『동아일보』, 1925.11.21.</xref></p></fn>
<fn id="fb050"><label>50)</label><p>혼인 신고가 진행 중이라고(<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무정부주의자 朴烈의 황실불경사건 公判延期? 金子文子 병으로 연긔 될 듯&#x003E;, 『동아일보』, 1925.12.3.)</xref> 하기도 하고, “두 사람의 정식 결혼은 형무소 측에서도 승낙했고 이번에 도쿄로 가는 박열의 형도 동의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우시고메 구청에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옥중결혼은 관청에 정식수속&#x003E;, 『동아일보』, 1925.12.6.</xref>)고 하기도 하고, “3일 이내에 정식 결혼 수속을 마치고 이치가야형무소 회의실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거행할 예정”(<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결혼식은 악수로, 형무소 회의실에서 거행될 듯&#x003E;, 『동아일보』, 1925.12.7.</xref>)이라고 하기도 하고, 형무소 사무실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소식(<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과 금자문자의 결혼식 부인&#x003E;, 『동아일보』, 1925.12.9.</xref>)도 있었다.</p></fn>
<fn id="fb051"><label>5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금자 결혼문제, 미구에 혼인수속을 한다&#x003E;, 『동아일보』, 1925.12.14.</xref></p></fn>
<fn id="fb052"><label>52)</label><p>1926년 3월 30일 소식으로, 가네코 후미코의 모친에게 승인을 얻어 옥중에서 혼인계를 제출하여 곧 수리하였다고 함.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부 혼인&#x003E;, 『동아일보』, 1926.4.24.</xref></p></fn>
<fn id="fb053"><label>53)</label><p>&#x003C;朴烈いよいよ怒り出し, 朝鮮禮服着用を迫る, 又罪人扱ひをよせ……と要求, 裁判長もたぢたぢ&#x003E;. 『朝鮮新聞』, 1926.1.20; <xref ref-type="bibr" rid="B004">&#x003C;공판일의 박열부처 요구&#x003E;, 『시대일보』, 1926.1.20</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대역범인 박열 삼개조항을 요구 재판장은 목하 고려 중&#x003E;, 『매일신보』, 1926.1.20.</xref></p></fn>
<fn id="fb054"><label>5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정신 감정은 절대로 불응, 네 가지 조건을 들어서 재판장을 육박해(동경)&#x003E;, 『동아일보』, 1926.1.20.</xref></p></fn>
<fn id="fb055"><label>5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x003C;옥중의 박열 근황 ‘동지면회를 거절’&#x003E;, 『시대일보』, 1926.1.25</xref>; <xref ref-type="bibr" rid="B004">&#x003C;옥중의 박열 오일간 단식&#x003E;, 『시대일보』, 1926.1.29.</xref></p></fn>
<fn id="fb056"><label>5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철통같은 경계리에 개정될 박열 등 공판, 헌병 삼십명과 경관 팔십여명 경계리에 판검사 일곱명 변호사 세명 립회로 개정, 명일 동경 대심원 一號廷에서&#x003E;, 『동아일보』, 1926.2.15.</xref></p></fn>
<fn id="fb057"><label>5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박열부부 공판 무기연기 신체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x003E;, 『매일신보』, 1926.2.17.</xref></p></fn>
<fn id="fb058"><label>5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박열의 요구조건 대심원에서 전부 승인&#x003E;, 『매일신보』, 1926.2.20.</xref></p></fn>
<fn id="fb059"><label>5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동경대심원대법정에서 중대법 박열부부 공판개정&#x003E;, 『동아일보』, 1926.2.27.</xref></p></fn>
<fn id="fb060"><label>6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증인신청을 각하&#x003E;, 『동아일보』, 1926.2.28.</xref>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한 진술이 끝난 후 박열은 1925년 12월 22일 작성한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 1924년 12월 30일 작성한 ｢나의 선언｣, 1924년 2월에 작성한 ｢어느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에게 주는 글｣을 낭독했다. <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303-304쪽</xref>.</p></fn>
<fn id="fb061"><label>6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동경대심원대법정에서 중대법 박열부부 공판개정&#x003E;, 『동아일보』, 1926.2.27.</xref></p></fn>
<fn id="fb062"><label>6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어데까지 반항적. 재판장도 실색, 조선 이름의 김문자, 제일일 오후의 속보&#x003E;, 『동아일보』, 1926.2.28.</xref></p></fn>
<fn id="fb063"><label>6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03">『매일신보』</xref> 1926년 3월 2일자에 1차 공판장 사진이 실렸다. <xref ref-type="bibr" rid="B002">『동아일보』</xref>에는 사진 세 장(박열과 금자문자의 대면, 공판정, 당일 주의자들의 검속당하는 광경)이 실렸는데 다 흐리다.</p></fn>
<fn id="fb064"><label>6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공판과 재판장의 실태&#x003E;, 『동아일보』, 1926.3.2</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박열 공판정에서...일부러 죄인을 만들면 몰라도 불연이면 소위 증거도 불성립. 5시간 동안이나 포시변호사의 열렬한 변호 방청객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사회결함을 공격&#x003E;, 『조선일보』, 1926.3.8.</xref></p></fn>
<fn id="fb065"><label>6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호담한 태도로 변복하고 출정&#x003E;, 『동아일보』, 1926.2.28.</xref></p></fn>
<fn id="fb066"><label>6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공판과 재판장의 실태&#x003E;, 『동아일보』, 1926.3.2.</xref></p></fn>
<fn id="fb067"><label>6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x003C;역지사지하면 동정. 박열부처는 천재...재판장 목야 박사 담&#x003E;, 『시대일보』, 1926.3.3.</xref></p></fn>
<fn id="fb068"><label>68)</label><p>판결 언도는 3월 1일 공판 결심을 한 후 일주일 가량 안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언도 기일이 연기되었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의 사형, 금자는 종신? 판결 압둔 그들 운명&#x003E;, 『동아일보』, 1926.3.6</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박열 판결은 금월 하순&#x003E;, 『조선일보』, 1926.3.9.</xref></p></fn>
<fn id="fb069"><label>6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의 사상행위와 환경, 牧野 재판장의 관찰&#x003E;, 『동아일보』, 1926.3.4.</xref></p></fn>
<fn id="fb070"><label>7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박열사건에 鑑하여&#x003E;, 『조선일보』, 1926.3.17.</xref></p></fn>
<fn id="fb071"><label>7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부에 사형언도, 3월 25일&#x003E;, 『동아일보』, 1926.4.21.</xref></p></fn>
<fn id="fb072"><label>7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매일신보』</xref>의 기사화 방식은 전혀 달랐다.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박열 등 사형, 허무주의를 대하고 우주적멸을 몽상&#x003E;, 『매일신보』, 1926.3.26.</xref></p></fn>
<fn id="fb073"><label>7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사형수 박열부처에게 무기징역으로 특사&#x003E;, 『매일신보』, 1926.3.27.</xref></p></fn>
<fn id="fb074"><label>7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박열부부의 구명 은사 5일 오후 5시반 형무소장이 兩名에게 성지 직접 전달&#x003E;, 『매일신보』, 1926.4.7</xref>; <xref ref-type="bibr" rid="B029">후세 다쓰지,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현석 역, 현인, 2017, 334-337쪽</xref>.</p></fn>
<fn id="fb075"><label>7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부 생별&#x003E;, 『동아일보』, 1926.4.25.</xref></p></fn>
<fn id="fb076"><label>7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부, 무기로 감형(4월5일)&#x003E;, 『동아일보』, 1926.4.24.</xref></p></fn>
<fn id="fb077"><label>7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대역범 박열의 애인, 복역 중 옥중에서 자살&#x003E;, 『동아일보』, 1926.7.31.</xref></p></fn>
<fn id="fb078"><label>7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자애란 무엇인가 세상은 오직 허무&#x003E;, 『동아일보』, 1926.7.31</xref>; <xref ref-type="bibr" rid="B004">&#x003C;불경죄수 박열 처, 金子文子의 적막!&#x003E;, 『시대일보』, 1926.7.31.</xref></p></fn>
<fn id="fb079"><label>7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남자다운 여자 上村변호사 담&#x003E;, 『동아일보』, 1926.7.31</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주의를 위하야 水火도 불사, 上村변호사 담&#x003E;, 『조선일보』, 1926.7.31.</xref></p></fn>
<fn id="fb080"><label>8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아츰해를 바라보면서 麻繩으로 結頸, 남편 박열에게는 절대로 안 알려&#x003E;, 『동아일보』, 1926.8.1</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은사에게 보낸 문자의 서간 발견&#x003E;, 『조선일보』, 1926.8.1.</xref></p></fn>
<fn id="fb081"><label>8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금자문자의 유해는 조선에 매장, 그의 남편 박열의 고향인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x003E;, 『동아일보』, 1926.8.2.</xref></p></fn>
<fn id="fb082"><label>8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금자문자 유해 운반도중 검속&#x003E;, 『동아일보』, 1926.8.4</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문자의 유해는 시형에게 내주어&#x003E;, 『동아일보』, 1926.8.7</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절도죄로 처분? 문자 유골을 가져간 사람&#x003E;, 『동아일보』, 1926.8.7.</xref></p></fn>
<fn id="fb083"><label>8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문자의 유골은 청구강산에 永葬. 박정식씨가 동경 도착한 후 받아 가지고 돌아올터이다&#x003E;, 『조선일보』, 1926.8.5.</xref></p></fn>
<fn id="fb084"><label>8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친형 渡東, 문자의 유골을 가지러&#x003E;, 『동아일보』, 1926.8.16.</xref></p></fn>
<fn id="fb085"><label>8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x003C;문자 유해 수취, 愛弟도 면회. 하관에서 박정식씨 담&#x003E;, 『조선일보』, 1926.8.17.</xref></p></fn>
<fn id="fb086"><label>8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금자문자 유해 도착, 박정식씨가 가지고&#x003E;, 『동아일보』, 1926.8.30.</xref></p></fn>
<fn id="fb087"><label>8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궁내성 사건의 수감범을 재심, 박렬부부의 괴사진의 정톄?&#x003E;, 『동아일보』, 1926.8.15.</xref></p></fn>
<fn id="fb088"><label>8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立松 예심판사가 취조 당시에 촬영, 의문 중에 있던 박렬부처의 사진 취조중 판사가 박힌 것으로 판명&#x003E;, 『동아일보』, 1926.8.25.</xref></p></fn>
<fn id="fb089"><label>8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처사진 사건의 그후, 촬영 찰라 광경 사진을 박히든 당시의 전후광경&#x003E;, 『동아일보』, 1926.8.27.</xref></p></fn>
<fn id="fb090"><label>9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처사진 사건의 그후, 인간애로 촬영 사진 박은 날자는 작년 사월 구일...立松氏 담&#x003E;, 『동아일보』, 1926.8.29.</xref></p></fn>
<fn id="fb091"><label>9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문제의 사진은 예심정에서 절취, 진상 일체를 박열 자백&#x003E;, 『매일신보』, 1926.9.1.</xref></p></fn>
<fn id="fb092"><label>9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서기가 절취하여 모 정당에 賣食해&#x003E;, 『동아일보』, 1926.8.26.</xref></p></fn>
<fn id="fb093"><label>9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사진 사건으로 결국 내각 와해? 촬영시기 문제로&#x003E;, 『동아일보』, 1926.8.28</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사진 사건에 정부 총사직이 가, 本黨 간부의 의견 / 귀족원 태도, 박열사진 사건에 대한 / 박열사진 사건으로 인한 인책 사직 단연 불위 / 政本少壯組 정부 규탄운동 개시, 박열사진 사건에 대하야 / 박열사진 사건의 정부회답 여하로 단연 정계은퇴 小川平吉 전 법상 결의 / 박열사진 사건의 책임은 당연, 江木法相에 있다 小川平吉 時代일지라도&#x003E;, 『동아일보』, 1926.8.29.</xref></p></fn>
<fn id="fb094"><label>9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부처의 괴사진 사건과 사법성 당국의 발표&#x003E;, 『동아일보』, 1926.9.3.</xref></p></fn>
<fn id="fb095"><label>9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촬영 시일은 5월 2일 결혼식은 허전, 박렬부쳐의 괴사진사건과 사법성의 제2차 성명&#x003E;, 『동아일보』, 1926.9.4.</xref></p></fn>
<fn id="fb096"><label>96)</label><p>연구자에 따라 5월 2일 괴사진 촬영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268-276쪽</xref> 참고.</p></fn>
<fn id="fb097"><label>97)</label><p>사진 촬영한 날이 10월 7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촬영 시일 판명, 대정 14년 10월 7일 박열이 자서 발견&#x003E;, 『동아일보』, 1926.9.11</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괴사진의 촬영 시일은 작년 10월 7일이다&#x003E;, 『매일신보』, 1926.9.11.</xref></p></fn>
<fn id="fb098"><label>9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x003C;양간수 수감&#x003E;, 『매일신보』, 1926.12.17.</xref></p></fn>
<fn id="fb099"><label>9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石黑銳一郞氏의 박열옥중생활기(一)&#x003E;, 『동아일보』, 1926.9.18.</xref></p></fn>
<fn id="fb100"><label>10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石黑銳一郞氏의 박열옥중생활기(二)&#x003E;, 『동아일보』, 1926.9.19.</xref></p></fn>
<fn id="fb101"><label>10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사진은 옥중 掃夫가 전달 石黑이가 얻게 된 경로&#x003E;, 『동아일보』, 1926.10.21.</xref></p></fn>
<fn id="fb102"><label>10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사진 진상...立松 판사의 전후성명&#x003E;, 『동아일보』, 1926.10.25.</xref></p></fn>
<fn id="fb103"><label>10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정부규탄 국민대회 개최, 각 사상단체연합회가 박열문제로, 여당은 불중시 박열사진사건, 政本의 추궁&#x003E;, 『동아일보』, 1926.9.14</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내각탄핵 대연설회 20단체연합 박열문자사건에 관하야&#x003E;, 『동아일보』, 1926.9.22</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각파연합대간친 芝公園서 국민대회 각파일치의 倒閣運動, 박열문제로&#x003E;, 『동아일보』, 1926.10.14</xref>; <xref ref-type="bibr" rid="B003">&#x003C;내각을 倒하라&#x003E;, 『매일신보』, 1926.10.21.</xref></p></fn>
<fn id="fb104"><label>10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양재판장 인책사직 박열문자사건으로&#x003E;, 『동아일보』, 1926.9.23.</xref></p></fn>
<fn id="fb105"><label>10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전국사법관 소집회의, 박열사건 위신면회책&#x003E;, 『동아일보』, 1926.10.18.</xref></p></fn>
<fn id="fb106"><label>10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今村 소장만의 징계는 불가, 박열사건에 대하야 정우회측의 의견&#x003E;, 『동아일보』, 1926.10.2</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控所치안을 방침, 今村 소장 징계재판&#x003E;, 『동아일보』, 1926.12.29</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징계사건 상고, 동경재판소장의 박열문자 문제 관련으로&#x003E;, 『동아일보』, 1926.12.30</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今村 징계재판 대심원에 송부, 박열사건으로&#x003E;, 『동아일보』, 1927.1.20.</xref></p></fn>
<fn id="fb107"><label>107)</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268쪽</xref>; <xref ref-type="bibr" rid="B008">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이학사, 2008, 164쪽</xref>.</p></fn>
<fn id="fb108"><label>10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6">&#x003C;박열과 금자문자관계 괴문서 전문. 일본전국을 震駭하든 그 내용과 경과(1-4)&#x003E;, 『중외일보』, 1927.1.23.-26.</xref></p></fn>
<fn id="fb109"><label>10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법정에서 태연 포옹, 감방에서 양인 동거, 박렬부처 괴사진 괴문서 내용, 금자문자의 사인은 불명&#x003E;, 『동아일보』, 1927.1.21</xref>; <xref ref-type="bibr" rid="B005">&#x003C;철창감방이 결혼식방 임신한 채 문자 변사.. 소위 괴문서사건 해금&#x003E;, 『조선일보』, 1927.1.21.</xref></p></fn>
<fn id="fb110"><label>110)</label><p>김중한은 재판에서 1년 판결을 받았는데, 구류일수가 형기를 초과해 판결 후 곧 출옥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의 공범 김중한 공소 공판, 검사는 일심대로 삼년구형&#x003E;, 『동아일보』, 1927.2.4</xref>;<xref ref-type="bibr" rid="B002"> &#x003C;언도는 1년반인데 형기는 48일...박열사건 공범 김중한&#x003E;, 『동아일보』, 1927.2.5</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일년 판결 받은 박열사건의 김중한&#x003E;, 『동아일보』, 1927.2.6; &#x003C;박열사건의 김중한을 해하려고 국수파가 책동, 출옥 후에 위험한 신변&#x003E;, 『동아일보』, 1927.2.10</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공범자 김중한씨 입경&#x003E;, 『동아일보』, 1927.2.25.</xref></p></fn>
<fn id="fb111"><label>11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좌경파가 무서워 박열을 大阪으로 이감? 무슨 일이 있을까봐 옮긴다고, 病監에 잇는 中病勢는 少差&#x003E;, 『동아일보』, 1927.6.4</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병태 方進, 피까지 토하며 매우 중태, 病監으로 이전 요양&#x003E;, 『동아일보』, 1927.10.20.</xref></p></fn>
<fn id="fb112"><label>112)</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무정부주의 박열 사건에 관련되었던 정태성 이경순 홍두표 三被告 공판&#x003E;, 『동아일보』, 1928.12.24.</xref></p></fn>
<fn id="fb113"><label>113)</label><p>『혜성』 제1권 제7호(1931.10.15.) 제8호(1931.11.15.), 제2권 제1호(1932.1.15.) 제3호(1932.3.15.)에 최상덕이 &#x003C;金子文子 獄中手記&#x003E;(1-4)를 소개했다.</p></fn>
<fn id="fb114"><label>11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의 전향 전장의 용사 감격&#x003E;, 『동아일보』, 1938.3.1</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전향한 박열에 위문한 수병에게 총독이 감사장 발송&#x003E;, 『동아일보』, 1938.6.9</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박열 헌납금 총동원 연맹기금으로&#x003E;, 『동아일보』, 1938.7.13</xref>;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人間南총독 박열에 감사장&#x003E;, 『동아일보』, 1938.8.4.</xref></p></fn>
<fn id="fb115"><label>115)</label><p><xref ref-type="bibr" rid="B028">하승우, 『아나키즘』, 책세상, 2008, 112-124쪽</xref>. 직접행동은 1881년 런던 국제 아나키스트 회의에서 채택한 투쟁방법으로,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필요할 경우 폭력을 배제하지 않고 파업, 태업, 사보타지, 제너럴 스트라이크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xref ref-type="bibr" rid="B023">오장환 엮음, 『일제하 한국 아나키즘 소사전』, 소명출판, 2016, 55쪽</xref>.</p></fn>
<fn id="fb116"><label>116)</label><p><xref ref-type="bibr" rid="B031">再審準備會 編, 『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黑色戰線社, 1977)</xref>에 『흑도』 1호, 2호가 실렸다.</p></fn>
<fn id="fb117"><label>117)</label><p>1925년 3월 1일 탈고했다거나 예심판사 다테마쓰에게 주었다는 것은 ｢음모론｣ 앞뒤에 밝혀져 있다. ｢음모론｣은 <xref ref-type="bibr" rid="B031">再審準備會 編. 『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黑色戰線社, 1977)의 89-96쪽</xref>에 실렸고, 후세 다쓰지가 낸 책(<xref ref-type="bibr" rid="B029">『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현석 역, 현인, 2017, 192-205쪽</xref>)에도 실렸다. 당시에 ｢음모론｣ 집필 중이라는 사실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2">&#x003C;옥중에서 결혼할 박열과 애인 문자, 독방에 갇혀 있는 범인 박열은 ｢음모론｣을&#x003E;, 『동아일보』, 1925.11.26.</xref></p></fn>
<fn id="fb118"><label>11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9">후세 다쓰지,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현석 역, 현인, 2017, 192-198쪽</xref>.</p></fn>
<fn id="fb119"><label>119)</label><p>이호룡은 박열이 ｢음모론｣에서 테러적 직접행동만이 유일한 수단임을 밝히고 있다고 했다. <xref ref-type="bibr" rid="B026">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 지식산업사, 2001, 267-268쪽</xref>.</p></fn>
<fn id="fb120"><label>120)</label><p>인용문 번역은 조아라(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박사수료)가 했다. 원문은 <xref ref-type="bibr" rid="B031">再審準備會 編, 『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黑色戰線社, 1977, 93-95쪽)</xref> 참고.</p></fn>
<fn id="fb121"><label>121)</label><p>박열은 ‘연극’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극작가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가 1922년 박열 등 조선인 청년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했고, 박열은 아키타와 개인적으로 교류했다. 한편, 박열이 쓴 ｢조선의 민중과 정치운동｣(『현사회』 4호)에도 “아! 연극이냐 아니면 민중을 기만하고 현재의 자본가국가의 권력에 아부하려고 하는 것이냐.”라고 하며 일본 볼셰비키를 비판한다. 또한 1926년 3월 25일 대심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박열이 조선말로 뭐라고 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요미우리신문』(1926.3.26.)에 기사화된 내용에 따르면 박열은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xref ref-type="bibr" rid="B020">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141-142쪽, 329쪽</xref>.</p></fn>
<fn id="fb122"><label>122)</label><p>드라마티스트 기법이란, 등장인물이 극작가 의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거나, 자기 방식으로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과 상황을 조정하는 경우를 주로 칭한다. 김지연, 한국 현대극의 메타드라마적 특성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43-47쪽.</p></fn>
<fn id="fb123"><label>123)</label><p>본고에서는 식민지조선의 신문을 통해 보여진 재판정의 상황을 강조하며 ‘혼례식장’다운 점을 지적했지만, 실제 재판장에서 오고간 ‘말’들을 함께 본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 강연장’다운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공판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써온, 자신들의 생각을 담은 글들을 낭독했다. 4차 공판 때 가네코 후미코는 이렇게 말했다. “판사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온 지 햇수로 4년인데 그 동안 나의 사상에 대해 어딘가에서 강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판정에서 강연을 한 기분입니다.”(<xref ref-type="bibr" rid="B031">『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 773쪽</xref>) 그러나 이들이 재판장에서 한 말들을 식민지조선의 신문은 전할 수 없었다. 식민지조선의 신문 자료를 토대로 논의하는 본고의 전제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지 않았다.</p></fn>
<fn id="fb124"><label>124)</label><p>다이쇼 데모크라시란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부터 호헌3파 내각에 의한 개혁들이 이루어진 1925년까지 거의 20여 년간 일본의 정치를 비롯해 널리 사회 문화 각 방면에 현저하게 나타난 민주주의적 경향을 가리킨다. <xref ref-type="bibr" rid="B015">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오석철 역, 소명출판, 2011, 5-9쪽</xref>.</p></fn>
<fn id="fb125"><label>125)</label><p>사회적 드라마는 사회의 “갈등 상황에서 생겨나는 무조화적aharmonic 혹은 반조화적disharmonic 과정의 단위”로서 네 단계 행위 국면(위반, 위기, 교정, 재통합)으로 구성된다. <xref ref-type="bibr" rid="B018">빅터 터너, 『인간사회와 상징 행위』, 강대훈 역, 황소걸음, 2018, 45-46</xref>쪽.</p></fn>
</fn-group>
<ref-list>
<title>참고문헌</title>
<ref-list><title>1. 기본자료</title>
<!-- 『東京朝日新聞』-->
<ref id="B001">
<label>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東京朝日新聞</source>
</element-citation>
</ref>
<!-- 『동아일보』-->
<ref id="B002">
<label>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동아일보</source>
</element-citation>
</ref>
<!-- 『매일신보』-->
<ref id="B003">
<label>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매일신보</source>
</element-citation>
</ref>
<!-- 『시대일보』-->
<ref id="B004">
<label>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시대일보</source>
</element-citation>
</ref>
<!-- 『조선일보』-->
<ref id="B005">
<label>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조선일보</source>
</element-citation>
</ref>
<!-- 『중외일보』-->
<ref id="B006">
<label>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other">
<source>중외일보</sourc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ref-list><title>2. 논문과 단행본</title>
<!--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애영 역,이학사, 2012.-->
<ref id="B007">
<label>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가네코</surname><given-names>후미코</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애영</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2</year>
<source>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source>
<publisher-name>이학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일본에서의 투쟁』, 이학사, 2008.-->
<ref id="B008">
<label>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명섭</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8</year>
<source>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일본에서의 투쟁</source>
<publisher-name>이학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김상웅, 『박열평전』, 가람기획, 1996.-->
<ref id="B009">
<label>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상웅</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96</year>
<source>박열평전</source>
<publisher-name>가람기획</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김용수, 『퍼포먼스로서의 연극 연구』,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ref id="B010">
<label>1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용수</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7</year>
<source>퍼포먼스로서의 연극 연구</source>
<publisher-name>서강대학교출판부</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규수 역, 어문학사, 2012.-->
<ref id="B011">
<label>1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나리타</surname><given-names>류이치</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2</year>
<source>다이쇼 데모크라시</source>
<publisher-name>어문학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노영희, ｢가네코 후미코의 조선체험과 사상형성에 관한 고찰｣, 『일어일문학연구』 34집, 1999, 207-230쪽.-->
<ref id="B012">
<label>1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노</surname><given-names>영희</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99</year>
<article-title>가네코 후미코의 조선체험과 사상형성에 관한 고찰</article-title>
<source>일어일문학연구</source>
<volume>34집</volume>
<fpage>207</fpage><lpage>230</lpage>
</element-citation>
</ref>
<!-- 노영희, ｢세토우치 하루미(瀨戶內晴美)의 『餘白의春』론｣, 『비교문학』 24권, 1999, 253-173쪽.-->
<ref id="B013">
<label>1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노</surname><given-names>영희</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99</year>
<article-title>세토우치 하루미(瀨戶內晴美)의 『餘白의春』론</article-title>
<source>비교문학</source>
<volume>24권</volume>
<fpage>253</fpage><lpage>273</lpage>
</element-citation>
</ref>
<!-- 루츠 무스너·하이데마리 울 편, 『문화학과 퍼포먼스』, 문화학연구회 역, 유로, 2009.-->
<ref id="B014">
<label>1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무스너</surname><given-names>루츠</given-names></name>
<name><surname>울</surname><given-names>하이데마리</given-names></name>
</person-group>
<collab collab-type="translator">문화학연구회</collab>
<comment>역</comment>
<year>2009</year>
<source>문화학과 퍼포먼스</source>
<publisher-name>유로</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오석철 역, 소명출판, 2011.-->
<ref id="B015">
<label>1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마쓰오</surname><given-names>다카요시</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오</surname><given-names>석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1</year>
<source>다이쇼 데모크라시</source>
<publisher-name>소명출판</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형설출판사, 1978.-->
<ref id="B016">
<label>1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collab>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collab>
<year>1978</year>
<source>한국아나키즘운동사</source>
<publisher-name>형설출판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이기우ㆍ김익두 역, 현대미학사, 1996.-->
<ref id="B017">
<label>1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터너</surname><given-names>빅터</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기우</given-names></name>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익두</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1996</year>
<source>제의에서 연극으로</source>
<publisher-name>현대미학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빅터 터너, 『인간사회와 상징 행위』, 강대훈 역, 황소걸음, 2018.-->
<ref id="B018">
<label>1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터너</surname><given-names>빅터</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강</surname><given-names>대훈</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8</year>
<source>인간사회와 상징 행위</source>
<publisher-name>황소걸음</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세토우치 하루미, 『운명의 승리자』, 금용진ㆍ양종태 공역, 상일문화사, 1973.-->
<ref id="B019">
<label>1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세토우치</surname><given-names>하루미</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금</surname><given-names>용진</given-names></name>
<name><surname>양</surname><given-names>종태</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공역</comment>
<year>1973</year>
<source>운명의 승리자</source>
<publisher-name>상일문화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역, 산처럼, 2003.-->
<ref id="B020">
<label>2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야마다</surname><given-names>쇼지</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선태</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03</year>
<source>가네코 후미코</source>
<publisher-name>산처럼</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이진희 역, 논형, 2008.-->
<ref id="B021">
<label>2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야마다</surname><given-names>쇼지</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진희</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08</year>
<source>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source>
<publisher-name>논형</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야스다 히로시, 『세 천황 이야기-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정치사』, 하종문ㆍ이애숙 역, 역사비평사, 2009.-->
<ref id="B022">
<label>2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야스다</surname><given-names>히로시</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하</surname><given-names>종문</given-names></name>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애숙</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09</year>
<source>세 천황 이야기-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정치사</source>
<publisher-name>역사비평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진수미 역, 현암사, 2016.-->
<ref id="B023">
<label>2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고프먼</surname><given-names>어빙</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진</surname><given-names>수미</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6</year>
<source>자아연출의 사회학</source>
<publisher-name>현암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오장환 엮음, 『일제하 한국 아나키즘 소사전』, 소명출판, 2016.-->
<ref id="B024">
<label>2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editor">
<name><surname>오</surname><given-names>장환</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엮음</comment>
<year>2016</year>
<source>일제하 한국 아나키즘 소사전</source>
<publisher-name>소명출판</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이규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의 한국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25집, 2003, 407-432쪽.-->
<ref id="B025">
<label>2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규수</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3</year>
<article-title>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의 한국인식</article-title>
<source>한국근현대사연구</source>
<volume>25집</volume>
<fpage>407</fpage><lpage>432</lpage>
</element-citation>
</ref>
<!--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 지식산업사, 2001.-->
<ref id="B026">
<label>2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호룡</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1</year>
<source>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source>
<publisher-name>지식산업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ref id="B027">
<label>2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호룡</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5</year>
<source>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source>
<publisher-name>지식산업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하승우, 『아나키즘』, 책세상, 2009.-->
<ref id="B028">
<label>2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하</surname><given-names>승우</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9</year>
<source>아나키즘</source>
<publisher-name>책세상</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후세 다쓰지ㆍ장상중ㆍ정태성,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현석 역, 현인, 2017.-->
<ref id="B029">
<label>2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후세</surname><given-names>다쓰지</given-names></name>
<name><surname>장</surname><given-names>상중</given-names></name>
<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태성</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현석</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7</year>
<source>운명의 승리자 박열</source>
<publisher-name>현인</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金一勉, 『朴烈』, 合同出版, 1973-->
<ref id="B030">
<label>3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金</surname><given-names>一勉</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73</year>
<source>朴烈</source>
<publisher-name>合同出版</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再審準備會 編. 『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 黑色戰線社, 1977.-->
<ref id="B031">
<label>3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collab collab-type="editor">再審準備會</collab>
<comment>編</comment>
<year>1977</year>
<source>金子文子·朴烈裁判記錄</source>
<publisher-name>黑色戰線社</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瀨戶內晴美, 『餘白の春』, 中央公論社, 1972.-->
<ref id="B032">
<label>3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瀨戶內</surname><given-names>晴美</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1972</year>
<source>餘白の春</source>
<publisher-name>中央公論社</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Carlson, Marvin, Performance: A Critical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2004.-->
<ref id="B033">
<label>3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Carlson</surname><given-names>Marvin</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4</year>
<source>Performance: A Critical Introduction</source>
<publisher-loc>London</publisher-loc>
<publisher-name>Routledge</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Schechner, Richard, Performance Studies: An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2002.-->
<ref id="B034">
<label>3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Schechner</surname><given-names>Richard</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2</year>
<source>Performance Studies: An Introduction</source>
<publisher-loc>London</publisher-loc>
<publisher-name>Routledge</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ref-list>
</back>
</artic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