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type="text/xsl" href="/resources/xsl/jats-html.xsl"?>
<article article-type="research-article" dtd-version="1.1" xml:lang="ko" xmlns:mml="http://www.w3.org/1998/Math/MathML"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mlns:xsi="http://www.w3.org/2001/XMLSchema-instance">
<front>
	<journal-meta>
		<journal-id journal-id-type="publisher-id">jpn</journal-id>
		<journal-title-group>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journal-title-group>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publisher>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publisher>
	</journal-meta>
	<article-meta>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19_25_03_181</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19.25.3.006</article-id>
		<article-categories>
			<subj-group>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subj-group>
		</article-categories>
		<title-group>
			<article-title>좀비, 엑스 니힐로의 주체와 감염의 윤리</article-title>
			<trans-title-group xml:lang="en">
				<trans-title>Zombie, the Subject Ex Nihilo and the Ethics of Infection</trans-title>
			</trans-title-group>
		</title-group>
		<contrib-group>
			<contrib contrib-type="author" xlink:type="simple">
				<name-alternatives>
				<name name-style="eastern"><surname>서</surname><given-names>동수</given-names></name>
				<name name-style="eastern" xml:lang="en"><surname>Seo</surname><given-names>Dong-Soo</given-names></name>
			</name-alternatives>
			<xref ref-type="aff" rid="aff01">*</xref>
			<aff id="aff01"><label>*</label>신한대학교 교양교육원</aff><role>조교수</role>
			<aff xml:lang="en">Shinhan University</aff>
			</contrib>
		</contrib-group>
		<pub-date pub-type="ppub">
			<day>30</day>
			<month>8</month>
			<year>2019</year>
		</pub-date>
		<volume>25</volume>
		<issue>3</issue>
		<fpage>181</fpage>
		<lpage>209</lpage>
		<history>
			<date date-type="received">
				<day>16</day>
				<month>7</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rev-recd">
				<day>14</day>
				<month>8</month>
				<year>2019</year>
			</date>
			<date date-type="accepted">
				<day>16</day>
				<month>8</month>
				<year>2019</year>
			</date>
		</history>
		<permissions>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19</copyright-year>
		</permissions>
		<abstract>
<title>국문초록</title>
<p>본고의 목적은 좀비서사를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교 분석하는데 있다. 기존의 연구는 좀비를 후기 자본주의의 영혼 없는 노예-소비자나 사물화 된 노동자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환멸의 세계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도입시킬 주체로 보고자 했다.</p>
<p>첫째, 좀비는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주체의 표상을 넘어 체제 외부를 욕망하는 각성한 주체로 볼 수 있다. 언캐니의 관점에서 보았듯이 좀비는 우리가 억압해야 할 그 무엇(thing)이었다. 좀비의 속성은 대타자를 위협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그렇기에 반드시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해야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런 면에서 좀비를 환대하는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곧 ‘인간다움의 근본’을 만나는 것이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엑스 니힐로의 주체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둘째, 좀비로 인한 감염의 사태는 새로운 윤리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좀비의 식인행위는 산 노동의 피를 빠는 뱀파이어의 이기주의적 사랑과는 다르다. 좀비의 식인행위는 감염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각성의 시간과 순간을 나누는 것이며 연대의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좀비의 어슬렁거림은 연대를 위한 기다림이며, 인간을 향한 공격성은 적극적인 환대의 다른 이름이다. 셋째, 좀비 서사의 종말론적 상황은 새로움을 향한 또 다른 사건이 시작이다. 좀비의 분노는 단지 괴물성을 드러내는 장치에 멈추지 않고 세계의 파국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좀비들의 분노와 폭력은 기만적인 가상의 세계를 정지시켜 새로운 미래를 가능케하는 메시아적 폭력의 은유이다.</p>
<p>좀비의 출현과 이에 대한 대중의 호응은 대안 주체와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열망이다.</p>
</abstract>
	<trans-abstract xml:lang="en">
<title>Abstract</title>
<p>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ompare zombie narratives in relation to the Other. In previous research, the view of zombies as post-capitalist soulless consumers or workers has been frequently expressed. But in this article, I wanted to look at zombies as the main cause of the collapse of the world and a new future.</p>
<p>First, zombies do not only mean the representation of the consumer in the late capitalist era. Rather, it is an awakening subject desiring the outside of the system. As you can see from the Uncanny’s point of view, zombies are something that we should oppress as freaks and monsters that threatened the Other. To be a zombie in this way is to meet one’s other self, the “Fundamentals of Humanity,” and it is the moment when everything becomes the subject ex nihilo, the new beginning. Second, the concept of infection shows a new ethic. Zombie cannibalism is different from the selfish love of a vampire who sucks a worker’s blood. Zombie cannibalism is an infection, which is a model of Christian love for one’s neighbor. It is a moment of awakening and the beginning of solidarity. It is on the waiting for the solidarity that the zombie hangs in such a way, and the attack on the human being is an active illusion. Third, the situation of the end of a zombie narrative is another event for newness. The anger of a zombie serves not just to show monsters, but acts as a catalyst that accelerates the world’s catastrophes. The anger of zombies is the messianic violence that stops the false world, and presents a new way.</p>
<p>The emergence of zombies and the popular response to them embody a desire for the possibility of a new subject and world.</p>
	</trans-abstract>
			<kwd-group kwd-group-type="author">
		<title>주제어</title>
			<kwd>좀비</kwd>
			<kwd>엑스 니힐로의 주체</kwd>
			<kwd>감염</kwd>
			<kwd>윤리</kwd>
			<kwd>혁명</kwd>
		</kwd-group>
	<kwd-group  xml:lang="en">
		<title>Keywords</title>
			<kwd>zombie</kwd>
			<kwd>subject of ex nihilo</kwd>
			<kwd>infection</kwd>
			<kwd>ethic</kwd>
			<kwd>revolution</kwd>
		</kwd-group>
	</article-meta>
</front>
<body>
<sec id="sec001" sec-type="intro">
<title>1. 서론</title>
<p>본고의 목적은 좀비서사를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교 분석하는데 있다. 한때 우리에게 익숙했던 이방인들, 즉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분명 사회를 설명하는 매개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성적으로 또는 인간을 초과하는 거대한 힘으로 억압된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는 자들이었다. 반면에 좀비는 퇴락한 존재, 결코 매혹의 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존재였다. 죽음에서 부활했지만 초점 없는 동공과 부패하는 회색의 살가죽, 그 훼손된 신체를 끌고 인간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다가오는 대상은 그야말로 비체(非體)이자 환멸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 환멸의 신체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좀비국가, 좀비경제, 반공좀비, 좀비비평 등 ‘좀비’라는 명사는 오늘의 현상을 비추는 은유로 작동하고 있다.</p>
<p>대중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된 좀비는 그 인기만큼이나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좀비는 대중문화 외에도 정치, 경제, 미학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본고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연구 중 하나는 좀비를 후기 자본주의의 사물화된 노동자로 보는 견해이다. 영혼마저도 사물로 전환시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은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르면서 일하는 속박된 좀비, 인간이 아닌 사물일 뿐이며 혁명의 가능성마저 소멸된 완벽한 노예적인 사회의 개인으로 보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 또 하나는 혁명적 주체로서 좀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경우이다. 주로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를 참조하면서 미국 사회의 폐쇄적인 인종차별주의, 베트남전에 대한 갈등,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의 분출과 전복의 가능성으로 좀비를 바라보는 경우이다.<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 이 같은 연구들이 좀비를 통해 현 사회와 우리의 초상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또한 필요한 것은 좀비에게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화상을 찾는 일일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p>
<p>이를 위해 다음의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좀비를 현실의 은유로 보고자 한다. 좀비가 만들어내는 대파국의 상황은 스크린을 넘어 오늘의 현실과 겹쳐져 있다. 영화 속 절멸의 위기는 현실 속 전쟁, 테러, 전염병, 지진과 쓰나미 등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상상과 현실이 중첩되어 있는 파타포적인 사태는 이방인 좀비의 서사를 현실의 은유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p>
<p>둘째, 누가 좀비를 괴물로 전유하는가이다. 괴물이 인간에 내재한 두려움의 외화라면 좀비 역시 두려움의 은유로 볼 수 있다. 좀비의 외형적 기괴함뿐만 아니라 인간을 초과하는 과잉된 힘도 분명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좀비를 통해 전해오는 두려움의 정체와 이들을 두려운 존재로 만든 주체는 누구인지, 더불어 이들에게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가 누구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을 ‘상상된 괴물’로 만든 주체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좀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부두교의 악마성과 아이티 노예라는 기억이 합산해낸 결과이다. 아프리카 종교에 덧씌워진 마술적 이미지와 ‘좀비=영혼 없는 노예’라는 집단기억은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넘어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상실과 박탈의 궁극적 기호인 좀비는 식민지 노예제에 특유한 방식의 감각적 지배에 대한, 그리고 아이티 독립에 수반된 강요된 자유노동 상태에 대한 반응”<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 속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좀비를 후기자본주의의 수동적 소비자로 읽는 것에는 좀비가 영혼 없는 노예라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간과된 점은 누가 그들을 ‘노예-좀비’로 만들었냐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영혼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빼앗아 간 자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좀비의 웅얼거림에서 들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영혼을 약탈해 간 자들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또는 영혼의 되돌림을 향한 간절한 외침이다.</p>
<p>셋째,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좀비의 위상을 재고하고자 한다. 좀비 서사는 “아이티 점령기간에 특히 극심해진 강제 노동과 모욕의 20세기 역사뿐 아니라 식민화의 이야기”<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문화는 아이티 혁명의 정신적, 물리적 연대의 중심이었던 부두교를 거세시키거나 노예-좀비를 고착화, 괴물화하는 것에 여전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괴물의 허울을 벗기는 순간 좀비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존재이자 윤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좀비를 재조명하는 것은 그들에게 덧씌워진 괴물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자 이들에게 진정한 이름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수 있다.</p>
</sec>
<sec id="sec002">
<title>2. 언캐니 그리고 엑스 니힐로(ex nihilo)의 주체</title>
<p>좀비를 언캐니와 관련해서 바라본 자는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이다. 그에 따르면 로봇의 호감도는 인간과의 유사성에 비례해 상승하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호감도가 추락하는, 이른바 불쾌함의 계곡(uncanny valley)에 빠진다는 것이다. 불쾌함의 계곡의 저점에 시체(corpse)가 있으며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좀비라는 것이다. 시체는 생명력이 결여된 존재이지만 적어도 움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비는 바로 그 지점, 결여된 존재가 살아 움직인다는 점(living dead)에서 가장 섬뜩한 존재라는 것이다. 모리 마사히로는 인간과 로봇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언캐니의 계곡을 빠져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p>
<p>하지만 과연 구별 불가능함이 섬뜩함을 극복하게 해줄까? 1937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통치전략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했을 때 일본 본토에서 이를 강하게 반대했던 이유는 바로 구별불가능 때문은 아니었을까? 1941년 안석영 감독이 제작한 영화 &#x003C;지원병&#x003E;에는 조선인 춘호가 일본제국의 군대에 지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춘호가 일본 제국의 군복을 입고, 일본어로 군가를 부르는 이 장면이야말로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 아니었을까? 같은 동양인이면서 동일한 복장에 동일한 언어를 쓰는 존재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불가능 한 상태는 섬뜩함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두려움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를 구별할 수 없는, 차이가 소멸되는 그 지점은 편집증적인 근대적 주체에게는 고통 그 자체이다.</p>
<p>그렇다면 이 구별불가능성은 인간과 좀비에게도 적용가능한가. 너무도 명백한 두 존재의 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낯익음은 언캐니(unheimlich)에서 찾을 수 있다. 옌칭은 ‘두려운 낯설음’ 혹은 ‘낯익은 낯설음’이라는 언캐니의 속성을 ‘지적인 불확실성’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어떠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나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경우”<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이다. 특정 상황 속에서 밀납인형이나 마네킹이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달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좀비를 향한 두려움도 여기서 기인한다. 너덜거리는 신체와 식욕이라는 하나의 욕망만을 지닌 저 불쾌한 존재는 어쩌면 우리와 가장 먼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닮은 존재일 수 있다. 논자들의 지적처럼 좀비를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을 구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living dead’ labor) 신자유주의의 증인”<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으로 보거나 조지 로메로의 &#x003C;시체들의 새벽&#x003E;(1978)에서 좀비를 향해 “그들은 우리야(They are us)”<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라고 말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임리히(heimlich) 안에 운하임리히(unheimlich)의 의미가 내재해 있듯이, 좀비의 공포는 이처럼 ‘낯익은 낯섦’과 ‘낯선 낯익음’ 간의 공존이 만든 감정이다.</p>
<p>언캐니는 좀비와 인간의 상동성 혹은 두려움의 기원을 찾는데 그치지 않는다. 언캐니의 중요성은 억압된 것의 귀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 &#x003C;월드워Z&#x003E;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전 UN조사관 제리가 좀비와 조우하는 장면이다.</p>
<fig id="p001"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1&#x003E;</label>
	<caption>
		<title>영화 &#x003C;월드워Z&#x003E;의 한 장면</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1.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fig id="p002"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2&#x003E;</label>
	<caption>
		<title>영화 &#x003C;에일리언&#x003E;의 한 장면</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2.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위의 두 장면은 사실 하나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억압된 것, 즉 실재와의 만남이다. 좀비와 인간이 닮았다는 가정은 좀비가 지닌 어두운 면 때문이다.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을 영화 &#x003C;에일리언4&#x003E;을 통해 분석한 바 있다. 복제인간인 리플리는 어느 실험실에서 자신의 실패작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흉측한 괴물 그 자체였다. 그 가운데 자신을 닮은 괴물, 즉 리플리의 얼굴을 한 괴물이 자신을 죽여달라고(kill me) 애원하자 리플리는 화염방사기를 발사한다. 지젝은 이 괴물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또 다른 나, 즉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죽여야 했던 우리 안의 괴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x003C;월드워Z&#x003E;에 적용하면 제리가 맞닥뜨린 좀비란 곧 억압해야 했고, 건널 수 없는 심연에 가두어 두어야 했던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x003C;<xref ref-type="fig" rid="p002">사진2</xref>&#x003E;는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래서 회피하고픈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은유이다. 좀비 영화는 억압의 대상을 문명과 질서의 장벽을 무화시키고(&#x003C;월드워Z&#x003E;) 계급의 구조를 전복시키며(&#x003C;랜드 오브 데드&#x003E;) 또는 이성으로는 결코 포획되지 않는 마성적인 힘(&#x003C;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x003E;) 등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젝은 좀비야말로 인간성의 원초적 단계, 즉 인간성의 중심에 있는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것이며, 좀비를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은 낯선 존재를 만날 때 느끼는 충격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하지 않았던 인간다움의 근본과 직면하는데서 오는 충격으로 보았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p>
<p>좀비가 억압당한 내 안의 또 다른 나 곧 ‘인간다움의 근본’을 출현시킨다는 점에서 언캐니하다. 그런데 그 섬뜩함이란 과연 누구의 섬뜩함인가? 인육을 향해 달려오는 저 거대한 무리에게서 뿜어나오는 괴물성에 섬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우리 안의 또 다른 얼굴을 ‘괴물-좀비’로 치환 했는가? 정신분석에서는 그를 대타자라고 부른다. 상징계의 주인인 대타자는 ‘아버지의 법’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부여한다. 대타자의 진리는 카오스에 코스모스를 도입하며, 도덕법을 통해 금지된 욕망과 허용된 욕망을 구분하며, 금지된 주이상스를 상징계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문명을 건설한다. 즉 “하나의 세계는 중핵의 주이상스를 억압하는 공인된 대타자의 담화로 지탱된다.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지탱되는 방식이자, 정치 공동체가 집단적 욕망을 필터링하며 스스로 보존되는 방식”<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인간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이며, 그들은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어떻게 분열되는지”<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 보여주는 좌표이다. 따라서 좀비로 은유된 폭력성(충동의 기표)은 “상징계의 규범과 통제에서 벗어난 좌표 또는 비좌표”<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라는 점에서 위험한 대상으로 상징화해야 하는 것이다.</p>
<fig id="p003"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3&#x003E;</label>
	<caption>
		<title>영화 &#x003C;월드워Z&#x003E;의 한 장면</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3.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그렇다면 좀비의 섬뜩함과 두려움의 실제적인 방향은 우리가 아닌 대타자를 향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괴물로 치환해 억압했던 그것(thing)이 다시 출현했을 때 그 놀라움과 공포는 고스란히 대타자의 몫이다. 저 억압되지 않은 ‘인간다움의 근본’ 혹은 “자연 상태의 인간 본연의 모습”<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이란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워진 상징계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심지어는 실재(the real)의 전면적인 출현이라는 대파국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x003C;<xref ref-type="fig" rid="p003">사진3</xref>&#x003E;의 혼란과 당황스러움이란 견고하리라 믿었던 대타자의 세계가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 그 자체이다. 이처럼 좀비는 인간이 “억제할 수 없는 잉여의 한계경험들을 가리킴으로써 에고가 결코 모든 것의 지배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시켜준다.</p>
</sec>
<sec id="sec003">
<title>3. 감염과 환대의 윤리학</title>
<p>영화 &#x003C;월드워Z&#x003E;의 초반은 좀비 서사의 루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갑작스런 좀비의 출현과 이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한 남자가 좀비에게 물리고, 주인공 제리는 그를 바라본다. 인형의 카운트다운 소리에 맞춰 불과 10초 만에 좀비로 변하는 남성에게서 주목할 부분은 그의 눈빛이다.</p>
<p>생명력 없는 저 회색의 눈빛은 인간에서 괴물-좀비로 넘어가는 신호가 아니다.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생물학적 정지 속에서 그는 인간의 눈이 아닌 좀비의 눈으로 전환된다. 좀비 영화의 공통된 점은 눈빛이 변화되는 순간을 클로즈업 해 시청자에게 선사하는데, 이 영상기법은 마치 그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이른바 각성의 상태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 각성의 상태란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했으며, 아니 보리라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봤을 때의 표정이다. 영화 &#x003C;스카이라인&#x003E;(2010)과 &#x003C;버드박스&#x003E;(2018)에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섬광을 본 여인이 눈빛의 변화와 함께 경이의 표정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신체강탈자’의 공통 요소인 시선(영혼)의 탈취가 빼앗김이 아닌 외부와의 조우이듯 저 눈빛은 상징계의 외부인 실재를 만나는 순간이다. 이는 현실(reality)이야말로 실은 가상(fantasm)이며 자신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가짜 욕망의 주체였음을 깨닫는 ‘각성의 시간’이다. 그런 차원에서 저 눈빛이야말로 대타자의 힘에 감금되었던 충동과 조우하는 순간이며, 가짜 욕망의 주체였던 자신의 몰락을 경험하는 ‘충격’과 ‘경이’ 그 자체이다.</p>
<fig id="p004"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4&#x003E;</label>
	<caption>
		<title>영화 &#x003C;월드워Z&#x003E;의 한 장면</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4.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　</p>
<p>　　아이는 텅 빈 하늘의 무한성에 매혹된다.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아이는 내면을 잃고 경계를 벗어나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아토포스적 외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 Ent-Eignis,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재앙. 그러나 이 재앙은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 여기에 바로 재앙의 변증법이 있다. 재앙의 변증법은 영화 &#x003C;멜랑콜리아&#x003E;의 구성 원리로도 작동한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p>
<p>　</p>
<p>영화 &#x003C;멜랑콜리아&#x003E;에서 일곱 살 난 아이가 하늘의 무한성에 매혹되어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즉 타자가 되어보는 사건은 그대로 좀비에 물려 고통스럽게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과 겹치고 있다. 대타자의 바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의 침입’이 필요하며, 이는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재앙이다. 하지만 그 죽음을 통해 토포스(topos)의 주체에서 아토포스(atopos)<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의 주체로 옮아가는 ‘어마어마한 기쁨’의 사건을 맞볼 수 있다. 이러한 기쁨의 사건을 예시하는 영화가 제이 리 감독의 &#x003C;좀비 스트리퍼스&#x003E;(2008)이다.</p>
<p>　</p>
<p>　　느낌이 어때?</p>
<p>　　눈과 별 같아. 깨끗한 별들의 담요 아래 눈 위에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어. 그리고 너무나 많은 별들이 있었지. 난 그 광대하고도 고결한 공간을 이해할 수 없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이해해. 내가 그것들의 일부가 된 걸 느껴. 그것은 무한한 공간이야.<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p>
<p>　</p>
<p>싸구려 바에 갑작스럽게 난입한 좀비로 인해 좀비가 된 스트립 쇼걸 릴리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어야 하는 그저 그런 댄서가 아니다. 좀비가 된 그녀는 경험할 수 없었던 세계를 보고 감각하고 있다.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는 저 장면은 공교롭게도 밤하늘에 매혹당한 &#x003C;멜랑콜리아&#x003E;의 아이와 겹친다. 이전의 존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 거듭나는 이 사건을 그녀는 무한한 공간과의 일체감으로 표현한다. 좀비로 거듭난 그녀는 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좀비가 된 채 무대에 올라 선 릴리스, 그녀의 춤은 대타자의 법에 따라 욕망을 학습하고 재현하듯 정해진 레퍼토리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반복적인 동작이 아니다. 그녀는 기존의 상투적인 춤과는 완전히 절연한 새로운 춤을 춘다. 그녀의 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무한한 시공간과의 일체감에서 발현된 것이다. 기이하고도 의미화되지 않는 그녀의 춤에 사람들은 완전히 매혹당한다.<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릴리스’, 즉 “그 사람이 아니며, 동시에 그라는 존재, 그가 현시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변성, 근본적인 부재이다. 엄격하게 말해, 그는 ‘원래의 그가 아님impropriété 그 자체”<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이다. 예수가 부활사건을 통해 “더 이상 동일자가 아닌 동일자”가 되었듯이, 그녀의 좀비로의 전환은 죽음의 지속이 아닌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아나스타시스 άνάστασις)이다. &#x003C;랜드 오브 데드&#x003E;에서 한낱 상징계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던 그들이 좀비가 됨으로써 비로소 외부를 바라보는 혁명적 주체로 거듭났듯이, 좀비에게 물린 사태야말로 실재와의 조우를 가능케 하는 ‘진리사건’의 출현이다.<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 좀비에게 물린 인간의 고통은 대타자의 자녀로 남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고정관념의 껍질을 깨고 새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이기도 하다. 고통 속에 몸이 뒤틀리고 시뻘겋게 충혈되는 눈빛 그리고 찾아오는 상징계 내 주체의 몰락은 모든 것의 정지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영도(零度), ‘엑스 니힐로(ex nihilo)의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죽음 이후의 예수의 부활이 결코 인간으로의 재생이나 소생이 아닌 그리스도로의 전환이듯, 또 영화 &#x003C;메트릭스&#x003E;의 ‘앤더슨’이 몰락함으로써 ‘네오’로 신생(新生)하듯 상징계 주체로서의 종말, 즉 “서서히 죽어 가는 것 안에 바로 구원이 존재”<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한다는 사건은 파국적 재난이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재앙의 변증법을 보여준다.</p>
<p>하지만 감염이 진정한 구원인 이유는 바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형상 좀비와 뱀파이어의 식인(흡혈) 행위는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흡혈이 마르크스의 비유처럼 산노동의 피를 빠는 착취라면 좀비의 식인은 ‘이웃 사랑’의 전파이다. 뱀파이어의 흡혈은 ‘이웃에 대한 공격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즉 이웃의 노동을 착취하며, 이웃의 동의도 없이 성적으로 도구화하며, 이웃의 재화를 착복하고, 굴종시키고, 고통을 강제하고, 학대하여 죽게 만드는 이타주의적 이기주의의 사랑이다. 또 그것은 매우 유순한 방식, 즉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다. 이는 이웃의 개념을 내 자아의 유사물로 여기는, 즉 자신을 위한 이웃의 사랑이다.’<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p>
<p>하지만 좀비가 인간의 살을 먹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 좀비의 감염 사건이 시사하는 것은 너와 나의 연대이자 개방성이다. 좀비에게 먹는 행위는 실재와의 조우를 경험하는 사건을 나누는 것이자 아토포스(atopos)의 주체로 거듭나는 계기이다. 그 사건은 인간이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맹목적이며 공격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좀비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좀비는 살균된 “쾌락을 나누는 나의 동포가 아니라 극단적 역겨움과 이질성을, 나의 자아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는 외부의 이웃”<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이다. 상징계의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그 너머를 욕망하는 존재로 전환시켜준다는 점에서 좀비는 쾌락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이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예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유대교의 질서 속에서 극단적인 역겨움과 이질성의 존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도 역겹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웃-예수가 말한 “내 살을 먹으라”는 좀비의 감염 사건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좀비가 인간의 살점을 먹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내어주는 것이며 동시에 좀비 안에 인간이, 인간 안에 좀비가 공존하는, 이른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르는 사랑의 실천이다.</p>
<p>이웃-좀비의 윤리성이 갖는 특이점이 여기에 있다. 복음서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제는 사랑의 주체가 우리이며, 타자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예수는 이 상황을 역전시킨다. 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대한 답(이웃의 ‘정의’)을 하지 않는다. 대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스스로 이웃이 ‘될 것’(“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을 요구한다. 이웃을 규정하는 순간이란 곧 ‘비-이웃’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예수는 이웃을 규정하고 한계 지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웃이 되라고 명령한다. 좀비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현재이다. 좀비는 레비나스의 이웃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 <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가 아니다. 좀비는 우리가 요구하지 않음에도 사랑을 베푸는 존재이다. 그들의 어슬렁거림은 연대를 위한 한없는 기다림이며, 인간을 향해 돌진하는 공격성은 적극적인 환대의 다른 이름이다.<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 그런 면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이다.</p>
</sec>
<sec id="sec004">
<title>4. 폭발하는 혁명성과 메시아적 폭력</title>
<p>실재를 마주한 새로운 주체들의 모습은 조지 로메로의 &#x003C;랜드 오브 데드&#x003E;(2005)에서 볼 수 있다.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은유화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좀비는 상징계의 표상인 인간세계를 전복시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좀비 서사의 중심인 종말론적 사태는 결국 문명의 몰락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파국을 환대하는 것이다.</p>
<fig id="p005"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5&#x003E;</label>
	<caption>
		<title>장벽은 타 넘는 좀비들</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5.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fig id="p006"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6&#x003E;</label>
	<caption>
		<title>&#x003C;스타쉽 트루퍼스&#x003E;의 한 장면</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6.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fig id="p007"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7&#x003E;</label>
	<caption>
		<title>영화 속 이스라엘 장벽</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7.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fig id="p008"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8&#x003E;</label>
	<caption>
		<title>가자지구의 장벽</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8.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x003C;<xref ref-type="fig" rid="p005">사진5</xref>&#x003E;는 &#x003C;월드워Z&#x003E;에서 이슬라엘의 장벽을 넘어가고 있는 좀비의 모습이다. 장벽 안에서 종교행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노래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점차 커지자 이에 자극 받은 좀비들이 장벽을 향해 몰려든다. 거대한 좀비 무리들이 자신들의 몸을 받침대로 삼아 장벽을 타넘는 이 장면은 매우 정치적이다. 장벽을 타넘는 거대한 좀비 떼는 &#x003C;<xref ref-type="fig" rid="p006">사진6</xref>&#x003E;처럼 우굴거리는 벌레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장벽과 그곳 주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이다.<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장벽을 타넘은 좀비들에 대한 묘사방식 때문이다. 걷는 좀비(walking dead)에서 뛰는 좀비(running dead)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가 분노하는 좀비이다. 조지 로메로의 초창기 좀비물이나 드라마 &#x003C;워킹데드&#x003E;시리즈, &#x003C;새벽의 황당한 저주&#x003E;(2004), &#x003C;좀비(The Dead)&#x003E;(2010) 등 이른바 걸어다니는 좀비들에게서는 분노를 찾기 어렵다. 그들은 단지 초점 없는 동공으로 인간을 바라보며 걸어올 뿐이다. 하지만 걷는 좀비에서 달리는 좀비로의 전환이 보여준 변화는 바로 분노하는 좀비의 등장이었다. 이 분노는 영화 &#x003C;28일 후&#x003E;에서처럼 분노 바이러스로 인한 증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구체적인 설명을 삭제한 채 괴물 이미지의 클리셰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분노야말로 아버지의 법에 의해 억압당해야 했으며, 물신의 지배와 소비하는 주체로서만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비루함에 대한 폭로이자 폭발이다. 단 한 번도 허용되지 않았던,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간절했던 것이었기에 좀비의 분노는 괴물의 비이성이 아닌 실존의 도래이다.</p>
<p>인간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의 공격성과 폭력성은 이제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지만 &#x003C;월드워Z&#x003E;는 거기에 또 다른 ‘분노’를 추가하고 있다. &#x003C;월드워Z&#x003E;의 분노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좀비의 분노를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장벽을 넘기 위해 서로의 신체를 사다리로 삼거나 장벽 안으로 몸을 던진 후 곧바로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은 적개심 그 자체이다. 자살특공대를 연상시키는 좀비들에게서 팔레스타인의 억압된 분노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금지된 욕망과 허용된 욕망을 가르는 도덕법인 장벽은 이웃을 위험하고도 혐오스러운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한다. 영화 &#x003C;스타쉽 트루퍼스&#x003E;가 이방인 이웃을 벌레로 은유했다면(&#x003C;<xref ref-type="fig" rid="p006">사진6</xref>&#x003E;), 영화 &#x003C;월드워Z&#x003E;는 현실 속 가지지구의 분리장벽과 영화 속 장벽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x003C;<xref ref-type="fig" rid="p007">사진7</xref>&#x003E;, &#x003C;<xref ref-type="fig" rid="p008">사진8</xref>&#x003E;). 하지만 문명, 즉 아버지의 세계가 허상임을 직시한 좀비들의 연대는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분노은행’<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처럼 거대한 적개심의 동시적 폭발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붕괴시킨다.</p>
<fig id="p009" orientation="portrait" position="float">
	<label>&#x003C;사진9&#x003E;</label>
	<caption>
		<title>&#x003C;워킹데드&#x003E;시즌6</title>
	</caption>
	<graphic xlink:href="../ingestImageView?artiId=ART002495851&amp;imageName=jpn_2019_25_03_181_p009.jpg" position="float" orientation="portrait" xlink:type="simple"></graphic>
</fig>
<p>좀비 영화에서 인간과 좀비,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혹은 인간세계의 마지막 보루의 은유로 자주 등장하는 장벽은 한편으론 아버지의 법이 얼마나 취약한 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x003C;워킹데드&#x003E;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장벽들은 물리적 취약성과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의 허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장벽 밖의 좀비들처럼 주이상스란 항상 상징계 내부를 응시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법은 실재와의 대면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시스템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x003C;<xref ref-type="fig" rid="p009">사진9</xref>&#x003E;의 장벽의 균열처럼 방어시스템 자체의 모순이다. 대타자는 언어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통해 외부의 욕망을 억압하려 하지만 그 언어 자체의 모순에 의해 균열은 항상 내재해 있다. 상징계의 법이란 그 자체 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한 균열들 사이로 실재의 침입(증상)이 도래하는 것이다.</p>
<p>논자들 가운데는 좀비의 전복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좀비의 폭력성과 의식의 정지를 한계로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폭력성의 끝은 휴머니즘 문명의 종말이며 동시에 의식 없음으로 인해 정치적 주체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 하지만 문명의 종말에 대한 우려는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미련이며, 의식 없음에 대한 걱정은 팔루스의 기표만이 의미를 생산한다고 믿는 편견이다. 과연 좀비는 의식(영혼) 없는 영락물(零落物)일까? 좀비의 사고(思考)부재는 정체성과 인식의 근원인 언어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p>
<p>하지만 좀비의 웅얼거림 혹은 비명(괴성)은 의미 없음의 기표가 아니라 상징계의 기표로는 포획될 수 없는 공백의 증상 같은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대타자의 언어로 상징화할 수 없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x003C;랜드 오브 데드&#x003E;와 &#x003C;워킹데드&#x003E;에서 보이는 좀비들의 연대가 과연 의식 없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벤야민의 언급처럼 그들의 언어는 차이의 표시기호로 전락한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에게 이름(본질)을 부여했던 아담의 언어에 가깝다. &#x003C;랜드 오브 데드&#x003E;에는 좀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인간이 쏴 올린 폭죽의 불꽃에 매혹당한 좀비들이 나온다.(“좀비들이 불꽃만 보면 넋을 잃거든.”) 불꽃에 매료된 좀비들은 주술에 걸린 듯 꼼짝 못한 채 불꽃만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응시의 주체는 좀비가 아니라 대타자이다. 불꽃에의 홀림이란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 영혼을 빼앗긴 현대의 소비자처럼 대타자가 욕망하는 것 외에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주술이다. 그런데 이 주술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동료 좀비의 웅얼거림이다. 좀비는 동료좀비의 그 웅얼거림과 불꽃의 소멸로 인해 응시당하는 자에서 다시 응시하는 자로 돌아온다. &#x003C;워킹데드&#x003E;시즌6(1화)에 등장하는 좀비 무리들, 공교롭게도 채석장에 몰려있는 수천, 수만의 좀비들이 어슬렁거리는 장면에서 파업현장을 떠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거대한 좀비 무리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은 그대로 시위대열과 오버랩 된다. 여기서도 그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어내는 것은 그들의 ‘웅얼거림’이다.<xref ref-type="fn" rid="fb031"><sup>31)</sup></xref> 상징계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저 소리들을 중심으로 좀비는 개별적 존재에서 혁명을 향한 연대의 무리가 된다. 의미 없는 기표들의 자동반복처럼 들리는 저 웅얼거림은 &#x003C;가디언즈 오브 겔럭시&#x003E;에 나오는 ‘그루트’의 언어와도 닮았다. 상징계 안에서 “아이엠 그루트”만을 반복하는 그루트의 언어는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차이 없는 기표의 반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직 ‘로켓 라쿤’만이 그 차이 없는 기표에서 다양하고도 진정한 의미를 읽어낸다. 예수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가 유대교 외부를 욕망하는 자들을 향한 언어였듯이, 좀비들의 언어도 상징계의 외부에 서 본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동료 좀비들의 언어를 통해 그들은 대주체의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오고 다시 혁명을 향한 연대의 길을 간다.</p>
<p>이렇게 본다면 문명의 몰락에 대한 우려와 영혼 없음에 대한 지적은, 조르주 소렐의 입장에서는 위선이다. 대타자를 향한 좀비의 폭력이란 “완강한 적을 섬멸할 목적으로 어떤 위선적 관용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백일하에 벌어지는 전쟁”<xref ref-type="fn" rid="fb032"><sup>32)</sup></xref>이다. 좀비의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xref ref-type="fn" rid="fb033"><sup>33)</sup></xref>이 되어 그것이 완전히 방전될 때까지 싸우는 이 전쟁이야말로 진정한 종말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파국을 일종의 세계의 구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거대한 재난처럼 “끔찍한 사건들은 사람들에게서 최악의 것과 함께 최상의 것, 즉 용기와 연대, 공동체를 위한 희생 등을 이끌어낸다”<xref ref-type="fn" rid="fb034"><sup>34)</sup></xref>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말론은 상징계의 복원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위선이다. 좀비가 출현시킨 종말은 한줌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종말이다. 세계의 환타즘을 완전히 종식시켰을 때 ‘시작의 끝’이 아닌 진정한 ‘끝의 시작’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좀비가 만들어내는 종말의 순간이야말로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정지시켜 공백을 응시하는 시간이며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엑스 니힐로의 시간이다. &#x003C;워킹데드&#x003E; 시즌1에 나오는 공백이 된 도시의 모습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던 그곳에 갑작스런 정지가 진입하자 하나의 거대한 정물화를 보는 착각을 준다. 이러한 엑스 니힐로의 도래야말로 소렐이 말한 “경박한 사회를 훌쩍 넘어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의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비의 폭력은 사물화 된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아적 폭력이다.</p>
</sec>
<sec id="sec005" sec-type="conclusions">
<title>5. 결론</title>
<p>이상으로 엑스 니힐로의 주체로서 좀비의 가능성을 고찰해보았다. 초창기와 달리 오늘의 좀비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되고 있다. 호러물에 국한되지 않으며 좀비 역시도 창백하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혁명적이며 인간과 감정을 교감하는 등 여러 양태로 변화되고 있다. 좀비의 변주 가능성은 상업적 효과의 극대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좀비의 다양성은 곧 해석의 다양성과 함께 새로이 도래할 미래의 욕망까지도 담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앞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p>
<p>첫째, 좀비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주체의 표상을 넘어 체제 외부를 욕망하는 각성한 주체로 볼 수 있다. 언캐니의 관점에서 보았듯이 좀비는 우리가 억압해야 할 그 무엇(thing)있다. 좀비의 속성은 대타자를 위협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그렇기에 반드시 괴물로 억압해야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런 면에서 좀비를 환대하는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곧 ‘인간다움의 근본’을 만나는 것이자 상징계 주체의 몰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몰락이 재앙이 아닌 구원을 향한 새로운 사건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모든 것의 정지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지점, 즉 상징계의 욕망에 포섭되었던 환타즘의 주체에서 벗어나 엑스 니힐로의 주체가 등장하는 순간이다.</p>
<p>둘째, 좀비가 보인 감염의 사태는 새로운 윤리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좀비의 식인행위는 산 노동의 피를 빠는 뱀파이어의 이기주의적 사랑과는 다르다. 좀비의 식인행위는 감염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각성의 시간과 순간을 나누는 것이며 연대의 시작이다. 감염사건의 핵심은 낭시의 주장처럼 구원이 주체 자신으로부터 발원하는 게 아니라 타자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즉 타자가 죽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부활하는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5"><sup>35)</sup></xref> 그런 면에서 좀비의 어슬렁거림은 연대를 위한 기다림이며, 인간을 향한 공격성은 적극적인 환대의 다른 이름이다.</p>
<p>셋째, 좀비 서사의 종말론적 상황은 새로움을 향한 또 다른 사건이 시작이다. 최근의 양상 중의 하나는 분노하는 좀비의 등장이다. 걸어 다니는 좀비에서 달리는 좀비로의 전환은 역동성 외에도 분노라는 감정선을 도입하고 있다. 좀비의 분노는 단지 괴물성을 드러내는 장치에 멈추지 않고 세계의 파국을 앞당기는 촉매제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분노가 가리키는 지점은 도덕법의 장벽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붕괴시키는 사건이다. 상징계의 언어로는 해석되지 않는 좀비들의 웅얼거림과 그들의 연대는 분노와 결합하여 소렐이 말한 총파업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좀비들의 분노는 기만적인 가상의 세계를 정지시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메시아적 폭력의 은유이다. 좀비의 출현과 이에 대한 대중의 호응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왕복하는 소비주체의 무기력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는 대안 주체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p>
</sec>
</body>
<back>
<fn-group>
<fn id="fb001"><label>1)</label><p>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연구는 <xref ref-type="bibr" rid="B006">문강형준의 『파국의 지형학』(자음과모음, 2011)</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11">복도훈의 ｢walking dead, working dead 신자유주의와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의 발생｣(『플랫폼』, 인천문화재단, 2013, 18-21쪽)</xref>이다.</p></fn>
<fn id="fb002"><label>2)</label><p>이에 대해서는 <xref ref-type="bibr" rid="B001">권혜경의 ｢좀비, 서구 문화의 전복적 자기반영성｣(『문학과 영상』 10, 문학과영상학회, 2009, 535-561쪽)</xref>에 자세히 나와 있다.</p></fn>
<fn id="fb003"><label>3)</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수잔 벅 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2, 178-179쪽</xref>.</p></fn>
<fn id="fb004"><label>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수잔 벅 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2, 179쪽</xref>. 부두교와 좀비의 왜곡된 의미의 생산에 대해서는 <xref ref-type="bibr" rid="B004">라에네크 위르봉, 『부두교-왜곡된 아프리카 정신』, 서용순 역, 시공사, 2002</xref>에 자세히 나와 있다.</p></fn>
<fn id="fb005"><label>5)</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지그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역, 열린책들, 1996, 109쪽</xref>.</p></fn>
<fn id="fb006"><label>6)</label><p><xref ref-type="bibr" rid="B011">복도훈, ｢walking dead, working dead 신자유주의와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의 발생｣, 『플랫폼』, 인천문화재단, 2013, 21쪽</xref>.</p></fn>
<fn id="fb007"><label>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권혜경, ｢좀비, 서구 문화의 전복적 자기반영성｣, 『문학과영상』 10-3, 문학과영상학회, 2009, 548쪽</xref> 재인용.</p></fn>
<fn id="fb008"><label>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5">이동신, ｢좀비 자유주의:좀비를 통해 자유주의 되살리기｣, 『미국학논집』, 2014, 129쪽</xref> 재인용.</p></fn>
<fn id="fb009"><label>9)</label><p><xref ref-type="bibr" rid="B010">백상현, 『라캉의 인간학』, 위고, 2018, 327쪽</xref>.</p></fn>
<fn id="fb010"><label>1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역, 개마고원, 2016, 15쪽</xref>.</p></fn>
<fn id="fb011"><label>11)</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역, 개마고원, 2016, 129쪽</xref>.</p></fn>
<fn id="fb012"><label>12)</label><p><xref ref-type="bibr" rid="B016">이동신, ｢좀비 반 사람 반: 좀비서사의 한계와 감염의 윤리｣, 『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34쪽</xref>.</p></fn>
<fn id="fb013"><label>1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역, 개마고원, 2016, 13쪽</xref>.</p></fn>
<fn id="fb014"><label>14)</label><p><xref ref-type="bibr" rid="B023">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27-28쪽</xref>.</p></fn>
<fn id="fb015"><label>15)</label><p>특정한 장소(영역, 범주)에 구애됨이 없는, 비장소(非場所)의 의미.</p></fn>
<fn id="fb016"><label>16)</label><p>제이 리 감독, &#x003C;좀비 스트리퍼스&#x003E;, 2008년 제작.</p></fn>
<fn id="fb017"><label>17)</label><p>이 영화는 좀비도 매혹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비는 언제나 퇴락한 존재, 혐오와 환멸의 대상으로 그려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좀비는 매혹의 존재로 부각된다. B급 영화다운 비약이 존재하지만 좀비가 갖는 비현실적인 힘, 특히 좀비 스트리퍼의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춤 앞에 스스로 좀비가 되려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p></fn>
<fn id="fb018"><label>1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8">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말라』, 이만형·정과리 역, 문학과지성사, 2015, 53쪽</xref>.</p></fn>
<fn id="fb019"><label>19)</label><p>이러한 진리사건의 또 다른 예로 아이티 출신의 작가이자 프랑스로 망명한 르네 테페스트르의 『내 모든 꿈 속의 아드리아나』(1988)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좀비는 아이티에 거주하는 프랑스 여성 아드리아나 실로에이다. 그녀는 결혼식 날 좀비가 되는데,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원초적인 어두은 대지의 세포 속에, 촘촘한 곡식의 낱알 안에 융합되었으며, 동물, 식물, 광물의 세계에 눈 뜬 작멜의 땅 속으로 잠겨들었다.(…) 죽음과 삶이 동시에 서로 심하게 얽혀있는 영역을 경험한 후, 나는 동포들의 익숙한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대상들이 지닌 섬세한 복잡함을 더 생생하고 예민하게 느끼게 되었다. 바다, 하늘, 새들, 비, 나무들, 바람은 영원히 나와 가까이 이어졌다.” 이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교감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상징계 외부를 경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대한 논의는 <xref ref-type="bibr" rid="B017">이송이의 ｢현대 아이티 문학 및 아이티 이민문학에 나타난 “다중성”｣(『서강인문논총』 41, 서강대인문과학연구소, 2014, 197-229쪽.)</xref> 참조함.</p></fn>
<fn id="fb020"><label>20)</label><p><xref ref-type="bibr" rid="B022">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박환덕 역, 범우사, 1991, 14쪽</xref>.</p></fn>
<fn id="fb021"><label>21)</label><p>이타주의적 이기주의의 사랑에 대해서는 <xref ref-type="bibr" rid="B010">백상현, 『라캉의 인간학』, 위고, 2018, 254-256쪽</xref> 참조함.</p></fn>
<fn id="fb022"><label>22)</label><p>그것은 라캉이 말한 두 번째 이웃—보다 파괴적이며 이기주의 질서를 붕괴시키는—파괴적 주이상스의 이웃과 닮아 있다.</p></fn>
<fn id="fb023"><label>23)</label><p><xref ref-type="bibr" rid="B010">백상현, 『라캉의 인간학』, 위고, 2018, 258쪽</xref>.</p></fn>
<fn id="fb024"><label>24)</label><p>요한복음 6장 54절.</p></fn>
<fn id="fb025"><label>25)</label><p><xref ref-type="bibr" rid="B021">최원, ｢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 『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62쪽</xref>.</p></fn>
<fn id="fb026"><label>26)</label><p>이동신 역시 좀비에 물린 인물들의 신체 안에 사람과 좀비가 공존함을 지적한 바 있으나, 그에게 감염의 윤리 주체는 좀비가 아닌 인간에 두고 있다. 즉 감염의 서사가 인간에게 윤리적 선택의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 &#x003C;부산행&#x003E;의 용석과 석우를 통해 윤리성의 유무를 논하고 있다.(<xref ref-type="bibr" rid="B016">이동신, ｢좀비 반 사람 반: 좀비서사의 한계와 감염의 윤리｣, 『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33-51쪽</xref> 참조)</p></fn>
<fn id="fb027"><label>27)</label><p><xref ref-type="bibr" rid="B023">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50쪽</xref>.</p></fn>
<fn id="fb028"><label>28)</label><p>공교롭게도 영화 &#x003C;스타쉽 트루퍼스&#x003E;에도 담을 타 넘어 공격하는 외계행성의 벌레들을 섬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살해의 정당성은 벌레가 인간들을 위협하는 타자라는 이유뿐이다.</p></fn>
<fn id="fb029"><label>29)</label><p>슬로터다이크의 분노은행(rage bank)은 은행이 자본을 축적하듯 민중의 분노를 축적하여 혁명적 사건에 집단적인 에너지로 분출하는 사태를 말한다.(페터 슬로터다이크,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이덕임 역, 이야기가있는집, 2017.)</p></fn>
<fn id="fb030"><label>30)</label><p>이러한 논의로는 <xref ref-type="bibr" rid="B002">김민오, ｢좀비영화의 초현실주의적 미학 특성과 의미 연구｣(『인문과학연구』 43,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4, 257-280쪽)</xref>와 <xref ref-type="bibr" rid="B021">최원의 ｢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53-70쪽)</xref> 그리고 <xref ref-type="bibr" rid="B008">박혜영의 ｢콜로니얼 좀비의 귀환과 포스트콜로니얼 묵시록의 공포｣(『영미문학연구』 31, 영미문학연구회, 2016, 5-33쪽)</xref> 등이 있다.</p></fn>
<fn id="fb031"><label>31)</label><p>&#x003C;워킹데드&#x003E;에서 좀비들은 인간들이 만든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좀비들의 수동성이나 의식 없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리를 따라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이동하는 목적이란 결국 상징계와 그 주체들의 몰락을 향한 연대의 발걸음이라는 점이다.</p></fn>
<fn id="fb032"><label>32)</label><p><xref ref-type="bibr" rid="B019">조르주 소렐, 『폭력에 대한 성찰』, 이용재 역, 나남, 2007, 386-387쪽</xref>.</p></fn>
<fn id="fb033"><label>3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9">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역, 길, 2015, 167쪽</xref>.</p></fn>
<fn id="fb034"><label>3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역, 난장이, 2014, 254쪽</xref>.</p></fn>
<fn id="fb035"><label>3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8">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말라』, 이만형·정과리 역, 문학과지성사, 2015, 39-40쪽</xref>.</p></fn>
</fn-group>
<ref-list>
<title>참고문헌</title>
<!-- 권혜경, ｢좀비, 서구 문화의 전복적 자기반영성｣, 『문학과 영상』 10-3, 문학과영상학회, 2009, 535-561쪽.-->
<ref id="B001">
<label>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권</surname><given-names>혜경</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09</year>
<article-title>좀비, 서구 문화의 전복적 자기반영성</article-title>
<source>문학과 영상</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영상학회</publisher-name>
<volume>10</volume><issue>3</issue>
<fpage>535</fpage><lpage>561</lpage>
</element-citation>
</ref>
<!-- 김민오, ｢좀비영화의 초현실주의적 미학 특성과 의미 연구｣, 『인문과학연구』 43,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4, 257-280쪽.-->
<ref id="B002">
<label>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민오</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4</year>
<article-title>좀비영화의 초현실주의적 미학 특성과 의미 연구</article-title>
<source>인문과학연구</source>
<publisher-name>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publisher-name>
<volume>43</volume>
<fpage>257</fpage><lpage>280</lpage>
</element-citation>
</ref>
<!-- 김성범, ｢21세기 왜 다시 좀비 영화인가?｣, 『씨네포럼』 18, 동국대 영상미디어센터, 2014, 127-160쪽.-->
<ref id="B003">
<label>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성범</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4</year>
<article-title>21세기 왜 다시 좀비 영화인가?</article-title>
<source>씨네포럼</source>
<publisher-name>동국대 영상미디어센터</publisher-name>
<volume>18</volume>
<fpage>127</fpage><lpage>160</lpage>
</element-citation>
</ref>
<!-- 라에네크 위르봉, 『부두교—왜곡된 아프리카 정신』, 서용순 역, 시공사, 2002.-->
<ref id="B004">
<label>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위르봉</surname><given-names>라에네크</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서</surname><given-names>용순</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02</year>
<source>부두교—왜곡된 아프리카 정신</source>
<publisher-name>시공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역, 개마고원, 2016.-->
<ref id="B005">
<label>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커니</surname><given-names>리처드</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지영</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6</year>
<source>이방인, 신, 괴물</source>
<publisher-name>개마고원</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 자음과모음, 2011.-->
<ref id="B006">
<label>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문강</surname><given-names>형준</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1</year>
<source>파국의 지형학</source>
<publisher-name>자음과모음</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박지윤, ｢지젝의 좀비 개념을 통한 좀비론 구성｣, 『현대사상』 6, 대구대 현대사상연구소, 2010, 61-86쪽.-->
<ref id="B007">
<label>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지윤</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0</year>
<article-title>지젝의 좀비 개념을 통한 좀비론 구성</article-title>
<source>현대사상</source>
<publisher-name>대구대 현대사상연구소</publisher-name>
<volume>6</volume>
<fpage>61</fpage><lpage>86</lpage>
</element-citation>
</ref>
<!-- 박혜영, ｢콜로니얼 좀비의 귀환과 포스트콜로니얼 묵시록의 공포｣, 『영미문학연구』 31, 영미문학연구회, 2016, 5-33쪽.-->
<ref id="B008">
<label>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혜영</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6</year>
<article-title>콜로니얼 좀비의 귀환과 포스트콜로니얼 묵시록의 공포</article-title>
<source>영미문학연구</source>
<publisher-name>영미문학연구회</publisher-name>
<volume>31</volume>
<fpage>5</fpage><lpage>33</lpage>
</element-citation>
</ref>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역, 길, 2015.-->
<ref id="B009">
<label>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벤야민</surname><given-names>발터</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최</surname><given-names>성만</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5</year>
<source>역사의 개념에 대하여</source>
<publisher-name>길</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백상현, 『라캉의 인간학』, 위고, 2018.-->
<ref id="B010">
<label>1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백</surname><given-names>상현</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8</year>
<source>라캉의 인간학</source>
<publisher-name>위고</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복도훈, ｢walking dead, working dead 신자유주의와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의 발생｣, 『플랫폼』, 인천문화재단, 2013, 18-21쪽.-->
<ref id="B011">
<label>1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복</surname><given-names>도훈</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3</year>
<article-title>walking dead, working dead 신자유주의와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의 발생</article-title>
<source>플랫폼</source>
<publisher-name>인천문화재단</publisher-name>
<fpage>18</fpage><lpage>21</lpage>
</element-citation>
</ref>
<!-- 복도훈, ｢북한과 디스토피아-‘좀비국가’ 표상을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24-3, 대중서사학회, 2018, 292-320쪽.-->
<ref id="B012">
<label>1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복</surname><given-names>도훈</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8</year>
<article-title>북한과 디스토피아-‘좀비국가’ 표상을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대중서사연구</source>
<publisher-name>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volume>24</volume><issue>3</issue>
<fpage>292</fpage><lpage>320</lpage>
<pub-id pub-id-type="doi">10.18856/jpn.2018.24.3.009</pub-id>
</element-citation>
</ref>
<!-- 수잔 벅 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2.-->
<ref id="B013">
<label>1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모스</surname><given-names>수잔 벅</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성호</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2</year>
<source>헤겔, 아이티, 보편사</source>
<publisher-name>문학동네</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역, 난장이, 2014.-->
<ref id="B014">
<label>14</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지젝</surname><given-names>슬라보예</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현우</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외 역</comment>
<year>2014</year>
<source>폭력이란 무엇인가</source>
<publisher-name>난장이</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이동신, ｢좀비 자유주의:좀비를 통해 자유주의 되살리기｣, 『미국학논집』 46권 1호, 한국아메리카학회, 2014, 119-145쪽.-->
<ref id="B015">
<label>15</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동신</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4</year>
<article-title>좀비 자유주의:좀비를 통해 자유주의 되살리기</article-title>
<source>미국학논집</source>
<publisher-name>한국아메리카학회</publisher-name>
<volume>46권</volume><issue>1호</issue>
<fpage>119</fpage><lpage>145</lpage>
</element-citation>
</ref>
<!-- 이동신, ｢좀비 반 사람 반: 좀비서사의 한계와 감염의 윤리｣, 『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33-51쪽.-->
<ref id="B016">
<label>16</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동신</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7</year>
<article-title>좀비 반 사람 반: 좀비서사의 한계와 감염의 윤리</article-title>
<source>문학과영상</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영상학회</publisher-name>
<volume>18</volume><issue>1</issue>
<fpage>33</fpage><lpage>51</lpage>
</element-citation>
</ref>
<!-- 이송이, ｢현대 아이티문학 및 아이티 이민문학에 나타난 “다중성”｣, 『서강인문논총』 41, 서강대인문과학연구소, 2014, 197-229쪽.-->
<ref id="B017">
<label>17</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송이</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4</year>
<article-title>현대 아이티문학 및 아이티 이민문학에 나타난 “다중성”</article-title>
<source>서강인문논총</source>
<publisher-name>서강대인문과학연구소</publisher-name>
<volume>41</volume>
<fpage>197</fpage><lpage>229</lpage>
</element-citation>
</ref>
<!--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말라』, 이만형ㆍ정과리 역, 문학과지성사, 2015.-->
<ref id="B018">
<label>18</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낭시</surname><given-names>장-뤽</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만형</given-names></name>
<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과리</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15</year>
<source>나를 만지지 말라</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지성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조르주 소렐, 『폭력에 대한 성찰』, 이용재 역, 나남, 2007.-->
<ref id="B019">
<label>19</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소렐</surname><given-names>조르주</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용재</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2007</year>
<source>폭력에 대한 성찰</source>
<publisher-name>나남</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지그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역, 열린책들, 1996.-->
<ref id="B020">
<label>20</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프로이트</surname><given-names>지그문트</given-names></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장진</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1996</year>
<chapter-title>두려운 낯설음</chapter-title>
<source>창조적인 작가와 몽상</source>
<publisher-name>열린책들</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최 원, ｢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 『문학과영상』 18-1, 문학과영상학회, 2017, 53-70쪽.-->
<ref id="B021">
<label>21</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person-group>
<name><surname>최</surname><given-names>원</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7</year>
<article-title>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article-title>
<source>문학과영상</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영상학회</publisher-name>
<volume>18</volume><issue>1</issue>
<fpage>53</fpage><lpage>70</lpage>
</element-citation>
</ref>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박환덕 역, 범우사, 1991.-->
<ref id="B022">
<label>2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person-group-type="author">
<name><surname>키르케고르</surname></name>
</person-group>
<person-group person-group-type="translator">
<name><surname>박</surname><given-names>환덕</given-names></name>
</person-group>
<comment>역</comment>
<year>1991</year>
<source>죽음에 이르는 병</source>
<publisher-name>범우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ref id="B023">
<label>23</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book">
<person-group>
<name><surname>한</surname><given-names>병철</given-names></name>
</person-group>
<year>2015</year>
<source>에로스의 종말</source>
<publisher-name>문학과지성사</publisher-name>
</element-citation>
</ref>
</ref-list>
</back>
</artic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