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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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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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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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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19_25_04_191</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19.25.4.007</articl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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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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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title>한국소설에 나타난 포스트휴머니즘의 상상력</article-title>
			<subtitle>-<xref ref-type="bibr" rid="B001">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를 중심으로</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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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title>The Imagination of Post-humanism Appeared in Korean Fictions</trans-title>
			<trans-subtitle>-Focused on Cho Ha-hyung’s <italic>Chimera’s Morning</italic> and <italic>A Prefabricated Bodhi Tree</italic></trans-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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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 id="aff01"><label>*</label>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aff><role>대우교수</role>
			<aff xml:lang="en">Sogang University</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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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 pub-type="ppub">
			<day>30</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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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ar>2019</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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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lume>25</volume>
		<issue>4</issue>
		<fpage>191</fpage>
		<lpage>221</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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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date-type="received">
				<day>29</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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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ar>2019</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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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date-type="accep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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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19</copyright-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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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문초록</title>
<p>본 연구는 최근 주요한 인문학적 테제로 등장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상상력이 한국문학, 특히 소설에 나타난 양상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본고에서는 2000년대 초반 활동했던 작가인 조하형의 두 소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2004)</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2008)</xref> 두 편을 집중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p>
<p>‘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 탈근대적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 사상은 20세기 이후 급격히 발전한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관 나아가서는 인간중심적인 문명 자체를 바꿔온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p>
<p>포스트휴머니즘 비평은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하는 한편, 과거에 쓰인 고전 작품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인물들, 비-인간, 사물들을 발굴해서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최근 기존의 인문학이 지배하던 인간에 대한 관념이 전면적으로 바뀌어 자연과학·기술적 관점이 담론장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질문들은 철학의 큰 범주인 존재론, 인식론, 경험론적인 분야를 아우르는 동시에 문학과 과학 그리고 사회과학 전체의 참여를 요청함으로써 학제적인 연구 과제를 발생시키고 있다.</p>
<p>혹독한 재난이 닥친 세계를 배경으로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은 인간이 바이오테크놀로지에 의해 변형된 변종의 형태로,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해 제작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조하형 소설에 나타난 포스트휴머니즘적 사상은 텍스트에 재현된 세계의 형상와 인간의 정체성을 종합적으로 재고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과 위계질서 등을 다시 탐구하는 반성적인 계기가 된다.</p>
	</abstract>
	<trans-abstract xml:lang="en">
<title>Abstract</title>
<p>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post-humanistic imagination that has emerged as a major academic thesis in Korean literature, especially novels. In particular, this paper focuses on Cho Ha-hyung‘s two novels <italic>Chimera’s Morning</italic>(2004) and <italic>A Prefabricated Bodhi Tree</italic>(2008), published in the early 2000s, for intensive analysis.</p>
<p>Post-humanism can be seen as an extension of post-modernism that tried to overcome the limitations of modernity and seek to establish a new world view. In particular, this thought pays attention to the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how the rapid develop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 which has developed since the 20th century, has changed the view of humanity and human-centered civilization itself. At the concrete level, it is developing in the direction of constructing a new subject idea by reflecting and dismantling Western-, reason-, and male-centered power mechanisms that are the core of modern civilization.</p>
<p>Cho attempts to discover and re-illuminate the surrounding figures, non-humans, and objects that were not noticed in the classic works written in the past. This ideological flow reflects the fact that the concept of human beings, which had been dominated by the humanities in recent years, has been completely changed, and the natural science and technology perspective is applied to the discourse field in various ways. From the point of view of post-humanism, objects that have not been classified as humans and objects that were considered inferior to humans should be included in human or comparable levels. These questions generate interdisciplinary research tasks by involving the large categories of philosophy, such as ontology, epistemology and empirical fields, as well as calling for the participation of the entire literature, science and social sciences.</p>
<p>Against the backdrop of a disaster-hit world, <italic>Chimera’s Morning</italic> and <italic>A Prefabricated Bodhi Tree</italic> depict human beings <italic>as</italic> variants transformed by bio-technology, and creatures made out of the artificial intelligence built by computer simulations. Post-humanistic ideas in Cho’s novels provide a reflective opportunity to comprehensively reconsider the world’s shape and human identity reproduced in the text, and to re-explore boundary lines and hierarchy order that distinguish between human and non-human.</p>
		</trans-abstract>
		<kwd-group kwd-group-type="author">
		<title>주제어</title>
			<kwd>포스트휴머니즘</kwd>
			<kwd>재난</kwd>
			<kwd>인간</kwd>
			<kwd>비인간</kwd>
			<kwd>해탈</kwd>
			<kwd>생명공학</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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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과학</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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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eywords</title>
			<kwd>Post-humanism</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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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science</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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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 id="sec001" sec-type="intro">
<title>1. 들어가며</title>
<p>본 연구는 최근 주요한 인문학적 테제로 등장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적 상상력이 한국문학, 특히 소설에 나타난 양상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최근 인문학 담론장에서 새로운 의제로 떠오르면서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점차 본격적으로 이론적으로 정비되는 단계에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존의 문학을 읽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주는 동시에 동시대 작가들에게 낯선 상상력의 영역을 열어줌으로써 창작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 사상의 바탕이 되는 인간관의 전환과 극복을 통해 새로운 해방적 사유를 이룩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의 계보를 따져보면 그 기원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탈근대적 사유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사상은 20세기 이후 급격히 발전한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중심적인 문명 자체를 바꿔온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구체적인 층위에서는 근대적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는 서구, 이성, 남성 중심적 권력 메커니즘을 반성하고 해체하여 새로운 주체 관념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p>
<p>한국 현대문학에서 포스트휴머니즘적 세계관이 본격적인 이념형으로 제시되던 시기는 1990년대 이후다. 특히 장르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김영하, 백민석, 박민규 등의 소설에는 포스트휴먼적인 설정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괴물, 사이코패스, 로봇 등 초자연적인 설정에 바탕을 둔 캐릭터들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당시 문화계를 관통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적인 영향 아래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포스트휴머니즘 트렌드의 등장과 발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좀 더 넓은 범주를 가로지른 문화 현상 아래에 속하는 하위 항목으로 시작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 혹은 ‘인간성’의 개념에 대한 정치·윤리적 고찰이 더욱 주요한 논제로 대두됨에 따라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존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담론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p>
<p>사실 한국 현대문학사의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계보를 밝히려는 것은 이 연구의 목적이 아니다. 한국 문학에 나타나는 환상성에 대한 전통을 추적하다보면 포스트휴먼적 심상이나 관점이 풍부하게 발견된다. 만일 한국문학에서 포스트휴머니즘적 상상력의 본격적인 계보학을 연구하려면 전통적인 신화를 비롯해 동아시아적 계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텍스트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텍스트를 구분해서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문학의 담론장에서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이 본격적인 담론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문학적 성취에 도달한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포스트휴머니즘적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천착할 뿐만 아니라, 구조적 완성도와 문체의 독창성을 이룩한 텍스트를 통해 이론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현장을 살펴보는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취지에서 본고는 2000년대 초반 활동했던 작가인 조하형의 두 소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2004)</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2008)</xref> 두 편을 집중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p>
<p>조하형은 단 두 편의 장편소설로 리얼리즘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작가다. 이색적인 소재와 비의적인 세계관, 난해하고 실험적인 문체와 구조 등등 그의 소설이 보여준 특징은 당시 문단 소설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전 한국 소설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작풍으로 평지돌출의 이단아적인 취급을 받기도 했던 그의 소설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명쾌한 해석이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단에 제출된 작품이 단 두 편의 장편소설에 불과하다는 점, 당시에도 난해한 기술이었던 인공지능이나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몇 편의 평론 이외에는 그에 대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등은 지금도 조하형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단 두 편에 불과할지언정 조하형의 작품이 이룬 문학적 성과는 크다. 조하형이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절 한국 문학에서 SF는 여전히 생소한 장르에 속했고 적은 수의 독자들은 주로 외국 번역서를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조하형의 소설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계보와도 다르고 외국 SF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또한 조하형 자신이 SF로 제한해서 해석하는 경향에 반발했을 만큼 그의 소설은 특정 장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깊이와 사유의 경지를 다채롭게 펼친다. 차라리 그의 소설은 박상륭 등의 계보를 잇는 ‘지식인 소설’의 맥락에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p>
<p>모든 결함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조하형의 작품은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한국 문학의 현장에서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실상을 밝히고 텍스트로부터 그 사례를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론해야할 소설로 꼽힌다. 그의 작품들은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으로 읽을 때 작품이 품고 있는 입체적인 의미가 더욱 정확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물론 조하형의 소설은 담론의 조명을 받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일정하게나마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 본 연구자의 판단이다. 그의 소설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 실존과 세계에 임박한 위기를 핍진하게 그려낸다. 또한 조하형은 하이퍼텍스트 기법과 인터랙티브 서사 기법 등 당시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위적인 실험을 과감하게 시도한 바 있다.</p>
<p>작가의 활동이 단절된 이후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나 비평이 사실상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문학에 있어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조하형의 소설들을 다시 세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리라 본다. 그의 소설들은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 읽어도 여전히 예언적인 영감을 전해줄 만큼 시대를 앞서간 면모를 보여준다. 본 연구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이론적 도구 삼아 그의 소설들이 상상력의 편폭, 문체의 정교함, 주제의식의 깊이가 현대 문단이 요구하는 ‘문학성’의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p>
</sec>
<sec id="sec002">
<title>2. 세계의 변화: 전 지구적 재난</title>
<p>한국 담론장에서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휴머니즘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르가 무엇보다 SF와 판타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리얼리즘 소설이 오랫동안 우세적인 장르였던 한국 현대문학에서 포스트휴먼적인 특성을 보이는 캐릭터들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 영미권 문학의 경우 작품의 문자로 된 텍스트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 장르도 신속하게 문학연구의 영역에 포섭함으로써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이런 현상은 소수 마니아층의 취향에 머물러 장르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온 한국 SF와 판타지 장르의 한계와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굳이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아도 한국 문학의 풍경에서 컴퓨터, 로봇, 스마트 기기, 유전자 변형 생물 같은 첨단 기술 문명의 산물들이 작품이 전경에 등장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는 현실을 일단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p>
<p>그러나 최근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여러 가지로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나도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기기와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가 침투해 들어오면서 서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괄목할만한 현상이다. 이러한 다양한 장르 서사에는 본격 문학에서 폄하했던 외계 생물체, 로봇, 기계 장치 등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일찌감치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외국의 SF가 번역되어 대중의 폭넓은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헐리웃 영화와 TV 드라마들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으며 성장한 세대들이 작가와 독자로 성장하면서 한국문학에서도 다양한 장르가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문학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킨 원인은 외적인 영향보다 내적인 필연성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한국의 현실 자체가 새로운 기기와 장치 그리고 컴퓨터 시스템의 영향에 의해 급진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실로 실제 세계의 풍경과 경험을 급진적으로 바꾸고 있으며 세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감수성에 새로운 흐름을 생성해내고 있다. 이제 한국 소설이 재현하는 세계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대중화된 기기와 이들이 제공하는 환상적인 비전들은 ‘신기한’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몸의 감각, 인지의 범위,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일상적인 경험 그 자체가 된 것이다.</p>
<p>조하형의 두 작품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두 편 모두 혹독한 재난이 닥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류는 미래의 발전한 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은 인간이 바이오테크놀로지에 의해 변형된 변종의 형태로,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해 제작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다.</p>
<p>조하형의 장편소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은 산촌에 닥친 화재 장면으로 시작된다. “누렇게 타들어가는 소나무 숲 속”에서 방황하는 노인들과 “산성토양이 토해낸 희누른 안개”가 가득찬 마을은 재난의 전조를 알려준다. 사람들은 날개가 달린 조인(鳥人)의 형상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온전한 날개를 달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신인류와 구인류로 나뉘어 분열을 거듭한다. 소설은 격변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가운데도 열등한 신체 조건을 가진 데다 갈수록 병약해져 가는 노인들로 구성된 고립된 노인촌을 조명해서 그리고 있다.</p>
<p>　</p>
<p>　　처음에는 전부 ‘기형아’에 불과했다. 초음파 검사단계에서 필터로 걸러져 소각되거나 뒷골목 쓰레기통, 인적 뜸한 하수도, 공원 공중변소 따위에 버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주의자들과 신념을 가진 산모들과 시기를 놓친 미혼모들이 새로운 종(種)을 낳기 시작했다. 기형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세계의 풍경은 저속 촬영된 필름과도 같았다. 매순간 정지버튼을 누르면서 봐도, 비약이 있었다―벌레가 새를 낳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것들은, 이전의 그 무엇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노친촌 사람들의 8할은 모두 그 무렵에 태어났다. 두 세계가 단절되면서 어긋나던 그 시절. (...) 그 무렵의 세계는 아무런 원칙도 없는 진화공학 실험실 같았다. 희한한 형태의 반인반수(半人半獸)들이 태어나고 있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도 날개가 돋아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 41-42쪽</xref>)</p>
<p>　</p>
<p>한편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보다 한층 더 급박하게 닥쳐오는 재난 상황을 보여준다. 전체 2부로 구성된 소설의 내용은 각각 불에 의한 재난, 그리고 모래에 의한 재난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 동일한 인물들의 장치로 인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은 1부에는 ‘짝수 장(章)들’, 2부는 ‘홀수 장(章)들’이란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에 따라 총 20개로 이루어진 소 단락들이 번갈아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p>
<p>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모티프는 노자의 경전인 『도덕경』 13장에 나오는 “귀대환약신(貴大患若身)”이라는 구절이다. “재난을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란 의미의 이 경구는 각자 세상의 종말을 방불할만한 개인적 재난을 겪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되풀이 등장하면서 불교의 화두와 같은 난제로 여겨진다. 대표적으로 이 구절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에 적용하는 사람이 방재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철민이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인공지능 시스템을 이용해 재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p>
<p>　</p>
<p>　　재산을 몸처럼 귀하게 여길 것; 사이보그의 형식―재난을 몸의 세포와, 조직과, 기관으로 전화시키면서, 변신하고 확장할 것. 그리고, 하나의 ‘논리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 것; 자기를 바꾸는 것과 세계를 바꾸는 것, 자기를 긍정하는 것과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 일치하는 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논리-몸이 논리-공간 그 자체가 될 때, 그때. 이해는 아마도 그 지점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bold>재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라는 것이, 논리-몸의 수준이 아니라 논리-공간의 수준, 즉 시스템 레벨에서 발생한다는 걸 볼 수 있어야 했다.</bold>(<xref ref-type="bibr" rid="B001">『조립식 보리수나무』 85쪽</xref>, 강조는 인용자)</p>
<p>　</p>
<p>조하형 소설의 특징은 이러한 재난이 외부적 특이상태가 아니라 존재 내부의 내재적 조건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 소설 속에서 재난은 등장인물에게는 극심한 고통을 주면서 자신과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실제적인 위협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고착된 존재 양식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도록 촉발하는 계기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이 친숙해진 존재 양태를 탈피해 완전히 새롭게 변형되는 일은 죽음에 가까운 폭력이자 재앙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하형의 소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러한 재난이 끔찍한 불행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낡은 존재에서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도록 돕는 새로운 생명의 약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굳이 알기 쉬운 모습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곤충이 애벌레의 몸을 탈피해서 새로운 상태의 (더 진화한 모습에 가까운) 생물로 변형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하형의 소설이 체현하는 세계는 “재난을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라는 역설이 통하는 특별한 상황을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찬제는 이를 가리켜 ‘리듬’을 타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변형 생성의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설명한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 “리듬을 타기 시작하자, 세포 속의 분자들을 변형시키는 화학반응 같은 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이 변하고 있다.”(<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 306쪽</xref>)</p>
<p>일반적으로 조하형의 소설은 복잡한 과학이론과 선조적 구성을 따르지 않는 서사구조 등 개성적인 서사문법 등으로 인해 가독성이 낮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 대한 평론가들의 해석은 비교적 균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현란한 수사학으로 변주되어 있을 뿐 여러 대목에서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를 직설적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표현된 재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자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p>
<p>　</p>
<p>　　삶이란, 몸의 궤적, 움직이는 몸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는, 몸을 꺾고 뒤틀고 난도질하는 모든 재난에, 논리적인 불을 지르기를 원했다. 그때의 재난이란, 일상을 뒤흔들어놓는 모든 것의 총칭이었다―은총까지 포함해서. 일상 자체가, 사실은, 재난에 의해 네거티브한 방식으로만 정의될 수 있었다.</p>
<p>　　재난들: 너무 짧게 깎은 발톱에서부터 진도 9의 지진에 이르기까지, 아침에 깨진 거울에서부터 중심기압 900헥토파스칼의 태풍에 이르기까지, 일상을 꺾고 뒤틀고 난도질하는 모든 것들; 수학적 특이점들; 논리학적 폐허들.(<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 79쪽</xref>)</p>
<p>　</p>
<p>비단 조하형의 소설 뿐 아니라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한국문학의 풍경에서 재난과 파국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던 시기였다.<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 그러나 조하형의 소설 속의 재난이 다른 소설들의 그것과 구별되는 이유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끝나는 도정이 아니라, 기존의 존재들을 변환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계기로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연구자들은 조하형의 소설을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해석을 시도해왔다. “불과 모래는 우리가 사는 항상적 재난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라는 정여울의 독법이 그것이다. 조하형 소설 속의 재난은 인간이 포스트-휴먼적인 존재로 변모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로서 그려진다.</p>
<p>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의 재난은 주로 인간과 생물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유전공학적 재난이라면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의 경우는 인간의 몸과 정신 뿐 아니라 세계와 우주, 시공간 전체가 붕괴하는 듯 느껴진다는 점이다. “지각변동 이후의 하늘은, 우툴두툴한 타원형이었고, 절벽으로 둘러싸인 수 평방 킬로미터의 땅은, 시커먼 물이 흐르고 불길이 치솟는 포스트-인더스트리얼 폐허, 포스트-포스트모던 지옥, 그 자체였다.”(<xref ref-type="bibr" rid="B002">254쪽)</xref> 또한 이 소설의 재난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재난이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정신적인 해체와 재구성 과정과 거의 호응하면서 진행된다는 특성이 있다.</p>
</sec>
<sec id="sec003">
<title>3. 인간의 변화: 키메라에서 슈퍼인텔리전스까지</title>
<p>포스트휴머니즘 비평은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또는 개체entity)을 틀에 박힌 유형론에서 벗어나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하는 한편, 과거에 쓰인 고전 작품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인물들, 비-인간, 사물들을 발굴해서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최근 기존의 인문학이 지배하던 인간에 대한 관념이 전면적으로 바뀌어 자연과학·기술적 관점이 담론장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견지에서 보면 그동안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던 대상들,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겨졌던 대상들도 인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수준에 포함시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동물, 기계, 프로그램이나 알고리즘 같은 무정형의 개체, 심지어 신이나 외계인, 괴물 등 초자연적 대상들도 인간에 유사하거나 인간을 넘어서는 ‘주체’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로도 확장된다. 이러한 질문들은 철학의 큰 범주인 존재론, 인식론, 경험론적인 분야를 아우르는 동시에 문학과 과학 그리고 사회과학 전체의 참여를 요청함으로써 학제적인 연구 과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텍스트에 재현된 세계의 형상와 인간의 정체성을 종합적으로 재고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과 위계질서 등을 다시 탐구하는 반성적인 계기가 된다.<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p>
<p><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에는 “미친, 새로운 세계”라는 구절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인간이 종(種)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위격(位格)의 존재로 변형 혹은 진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키메라’로 대표되는 날개달린 인류의 탄생과 벌레들의 번식, 닭의 비상, 각종 식물과 동물들의 진화와 합체 등에 관한 심상이다.<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 세계가 바뀌면 그 안에 사는 인간도 바뀔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 발전한 과학 기술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21세기 이후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인간과 자연은 주체와 객체로 비대칭적으로 나뉘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대칭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최근 과학기술과 철학, 사회과학을 통섭시켜 사유하는 과학인문학자들의 주장이다.<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근대라는 사유의 틀에서 상정했던 인간은 비인간으로 여겨졌던 다양한 객체들(여기에는 사물 뿐 아니라 인류화 과정에서 배척되었던 모든 ‘다른 것’-동물, 신, 악마, 괴물 등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과 끊임없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루어 나가는 존재다. 인간은 비인간들과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 얽히고설켜 관계를 만들고 이 네트워크는 또 다른 잡종적 행위자를 만들어내서 그 행위자가 다시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무한한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해 나간다.</p>
<p>수 세기에 걸쳐 확립되었던 ‘인간’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비인간적’으로 규정해 배재해왔던 특성들과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심각한 재난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는 푸코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종말’이며 ‘주체의 사라짐’과 상응하는 사건이다. 이 소설들에 적용된 새로운 과학기술은 존재의 네트워크를 새롭게 재편성함으로써 혼종적 행위자들이 출현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조하형이 제시하는 독특한 포스트휴먼적 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에서 주인공인 김철수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포스트휴먼적 비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조하형의 소설은 기존 소설의 선조적 구성과 서사적 일관성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장면 역시 소설의 곳곳에 산재된 상태로 발견된다. 어떤 장면에서 김철수는 얼굴에 온갖 꽃이 무성한 모습으로 공중에서 추락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감방 벽을 벌레처럼 기어오르다가 변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대목에서건 김철수를 비롯한 작중인물들은 끔찍한 재난을 고통스럽게 겪은 후 존재가 폭발적인 변형의 순간을 만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p>
<p>　</p>
<p>　　① 태양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p>
<p>　　혼돈의 극한―펌핑이 왔다.</p>
<p>　　추락하면서, 폭발한다. 한 우주의 아침 이후, 그를 구성하던 56억 7천만 종의 몸들이, 56억 7천만 종의 속도로 팽창하다가 에너지의 소용돌이로 미치고, 56억 7천만 종의 아침들과 연결, 접속되면서, 스스로를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벽을 뚫고, 망을 넘어, 햇빛이 대지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대기에, 가득찬다.</p>
<p>　　(...) 오래된 얼굴이 쩡, 쩡, 갈라진다.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상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상처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게 분출해 얼굴 전체로, 몸 전체로, 번져 나간다.</p>
<p>　　아침은 어떻게 오는가?</p>
<p>　　고개를, 쳐들어라. 벽을 뚫고, 쓰러뜨리고. 보라. 아침을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라.</p>
<p>　　아침이, 왔다.</p>
<p>　　내가 바로 아침이다.(<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 338-339쪽</xref>)</p>
<p>　</p>
<p>　　② 태양이 지하로 내려온다. 그 순간.</p>
<p>　　죽어가던 나무가 초록의 불길로 타오른다, 그 순간.</p>
<p>　　초록이란 언어 코드가 걸러내는 노이즈 전체를 향해, 붕괴된 몸이 반응했다, 그 순간. 관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전류가, 몸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걸 느꼈다.</p>
<p>　　그녀의 날숨CO2이 사이보그 전나무의 들숨이 되고, 사이보그 전나무의 날숨O2이 그녀의 들숨이 되는 교환의 리듬이, 절단 불가능한 연속체의 폴리리듬으로 변해간다: 몸의 녹화, 얼굴의 녹화: 초록-사이보그.</p>
<p>　　탈진한 몸들이, 감각의 과부하 상태에서 경계를 넘어 흐르고, 초록 안에서, 초록이 되어, 초록과 함께 움직일 때, 기묘한 식물성 기쁨이 간전의 느낌으로 밀려왔다.</p>
<p>　　및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떠는, 파이토크롬, 크립토크롬 분자들: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변환되고, 새로운 분자들(C6H12O6)이 생성한다: 정오의 광합성: 자립이 화학, 변신의 연금술.</p>
<p>　　초록-사이보그는 그 순간, 시민의 불안과 공포, 난민의 분노와 절망을 내려놓고, 완전하게 불완전한 건축물을 비로소 이해했다: 논리적 구조물, 윤리적 구조물……그리고 초록이 아름답다.(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 337-338쪽</xref>)</p>
<p>　</p>
<p>①은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의 등장인물 김철수가 인간으로서 최후를 맞는 장면, ②는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의 인물이 ‘<italic>반토막난여자-사이보그</italic>’에서 ‘초록-사이보그’로 극적으로 변형되는 장면이다. 이 두 대목은 한쌍의 데칼코마니를 연상하게 할 만큼 닮았다. 두 장면 모두 변형의 직접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은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태양과의 접촉이다. 태양의 강력한 에너지에 접속하는 순간 재난은 절정에 이르면서 낡은 존재 양식은 완전히 파괴되고 인간들은 이전보다 확장된 존재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에는 닭을 날게 하려고 실험을 거듭하는 박영구, 독고영감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행, 혹은 비상(飛翔)을 통해 재난이 뒤덮은 세계를 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결국 세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사람은 거꾸로 날개를 포기한 채 벌레가 되어서 기어서 넘는 방법을 선택한 김철수다. 이는 조하형 소설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이상주의적인 초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깊숙이 밀착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와 상통하는 몸으로 재조립하는 상태를 추구한다.<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 이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진짜 진화란, 미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 평형상태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미친, 새로운 세계를 넘어가는 거야.(...) 우린 지금 새로운 종(種)을 물질적으로 창조하려는 게 아냐. 다만, 신체의 수신장치를 재배치하는 것, 일상적 경험과 관련된 두뇌 신경세포들의 회로가 아니라, 시냅스의 심층부, 양자적 장(場)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것”(<xref ref-type="bibr" rid="B001">181쪽</xref>)</p>
<p>한편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에서 한계를 넘어가는 장면은 컴퓨터 정보 처리를 통해 재난이 닥쳐온 세계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반복하고 나서 펼쳐진다. 이러한 순간은 역시 재난으로 인해 폐허에 이른 후에야 갑작스럽게 도래한다. 이철민은 “가망이 없었다. 폐허-사이보그는 예정된 미래였다. 폐허를 만들어놓고 다른 변신을 말할 수 있는가?”(<xref ref-type="bibr" rid="B002">218쪽</xref>)는 절망 섞인 토로를 한 후에야 “같은 질문을 백 번쯤 반복했을 때” 마침내 폐허-사이보그가 아닌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에 성공했다고 보고한다. 소설은 이러한 변형 가능성의 발견을 일종의 종교적 구원의 은유를 빌린 “사이보그 보리수가 나타났다”라는 진술로 표현한다. “백 번의 질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임계선을 넘어가기 위해; 신경망이 재배치되고, 늘 보던 것이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xref ref-type="bibr" rid="B002">218쪽</xref>) 그리고 소설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폐허의 보리수는 어떻게, 자멸하는 폐허-사이보그의 길을 피할 수 있었는가?”(<xref ref-type="bibr" rid="B002">219쪽</xref>)라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이번에는 또 다시 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작업이 필요했다고 진술한다.</p>
<p>　</p>
<p>　　인지시스템의 네거티브 피드백이, 외부 교란을 기존 코드로 포획하는 과정이라면, 모순과 역설의 공안은, 관습적 해석을 수행하는 인지시스템의 코드를 깨뜨리는, 논리-폭탄,처럼 작동하지. 각성의 모멘트는, 학문이나 경전의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어 달성되는 게 아니라, 오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실패한 인지시스템 자체가,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재조립되는 순간이라는 거야. <bold>지평의 변화는 결국, 인지시스템 자체가 변하는 거니까. 그 순간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메타몰픽 모멘트지.</bold> 유전자 활성 패턴이 극단적인 형태로 재조립되는. 신경망이 극한의 배치에 도달하는. 그런, 거기에는 지독한 고통이 따르지. 알고 있지 않나? 상처가, 필요한 거야. 넘어가기 위해서는.(<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 264-265쪽</xref>, 강조는 인용자)</p>
<p>　</p>
<p><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재난-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드는 공학자인 이철민의 작업 과정에 소설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생명공학적 상상력을 활용했던 것과 달리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보공학적·인지과학적인 상상력이다. 이 소설은 재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처리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이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소설 속에 펼쳐진 여러 재난 상황들조차 컴퓨터 시스템이 만든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사건이 진전될수록 이철민이 컴퓨터로 만든 시뮬레이션과 ‘현실세계’의 이철민을 둘러싸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재난 상황은 서로 구분되기 힘들 정도로 상호침투되어 간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소설 자체’가 이철민이 만든 ‘재난-시뮬레이션’과 ‘메타-재난-시뮬레이션’에 대한 ‘메타-메타-재난-시뮬레이션’이라는 추론까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설 속에 재현된 가상세계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교차되는 상황들은 소설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소설에서 언급하는 ‘시뮬레이션’은 소설 속에서 허구적인 ‘글쓰기’ 자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일종의 메타픽션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는 조하형이 적극적으로 이 소설을 통해 유도하는 효과이기도 하다. 소설의 본문에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괴델과 에셔, 그리고 현실을 가상으로 파악하는 불교의 교리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명들은 메타픽션적인 효과를 증폭시키는데 기여한다. 더욱이 이 소설은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현실과 가상이 서로를 둘러싸고 겹겹이 싸고 있는 복잡한 구조를 취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줄거리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게 느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p>
<p>이 소설은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에 그치지 않고 시뮬레이션의 시뮬레이션, 또는 그 이상 층위의 인지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재귀적 지성을 강조하고 있다. 소설은 이철민과 그의 연인인 김희영의 입을 빌려 이러한 재귀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이 ‘자의식’이 작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한다. 이 소설은 ‘보리수나무’라는 불교 사상의 핵심 상징을 제목과 주요 오브제로 사용함으로써 이 소설의 주요 이념이 인공지능 공학과 동양의 불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다.<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 이 소설은 자신의 논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최신 과학기술은 물론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폭넓게 망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은 최근 미래 기술의 대표격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다. 소설의 설명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을 방불할 ‘지능’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 역시 이러한 재귀적이고 메타로직에 근거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인공지능의 원리가 불교의 교리와 통한다고 보는 것이 이 소설이 펼치는 논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p>
<p>이 소설에 등장하는 불교적 상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설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보리수나무’다. 수천번에 달하는 시뮬레이션을 반복한 다음에야 출현한다는 보리수나무는 아무리 섬세하게 코딩된 프로그램에도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 있다는 공학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인지과학적 용어로는 새로운 경지의 산출, 즉 ‘창발(emergence)’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창발이란 “주어진 물리적 조건 아래 연결망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속성을 만들어내”<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는 것을 뜻한다. 신경망체계 뿐만 아니라 대략적으로 연결된 모든 집합체에는 창발적인 특성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인지과학자들은 바로 이렇게 우연적으로 개입되는 특성이 다름 아닌 인지능력이 발생하는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바로 이러한 인지과학을 소설에 접합시키고 있다.</p>
<p>　</p>
<p>　　인지과학자들 중에는, 시뮬레이션 능력의 진화로 의식의 발생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철민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학습하던 생물은,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을 획득함으로써 압도적으로 유리한 생존 기계가 될 수 있었는데, 자의식은, 세계를 시뮬레이션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자신을 다시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철민에 따르면, 유식불교는 바로 시뮬레이션의 시뮬레이션, 마음이 마음을 보는 자기지시적 마음에서 발생했다고 했다. (...) 그런데, 그런 식의 논의는 필연적으로 무한퇴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시뮬레이션하는 자신을 시뮬레이션하는 자신을......시뮬레이션하는 식으로. 원효가 중국 유식불교를 비판해 들어가는 지점도, 바로 거기라고 했다.(<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 138-139쪽</xref>)</p>
<p>　</p>
<p>소설은 정보공학자와 인지과학자의 주장을 빌려 시뮬레이션이 악무한처럼 발생하는 이러한 체계야말로 자의식이 발생하는 조건이자 그것이 스스로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가 발생하는 지점이라고 설명한다. 소설은 이러한 논리적 악순환을 표현하기 위해 김희영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산불로부터 피해 달아나다가 거듭 링반데룽(숲에서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상)에 빠지는 모습을 그려낸다. 자의식에 기반을 둔 지능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위기 또는 프로그래밍의 언어를 사용하면 일종의 버그(bug)가 될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자가당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소설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유식불교와 마뚜라나, 바렐라의 인지생물학을 계속 활용하고 있다.</p>
<p>이 소설은 “재난의 논리-공간에서, 모든 논리적 난제를 해결한 논리-몸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극한의 변신: 알고리듬 모듈을 수정하며 변신하고 확장한 논리-몸은, 궁극적으로, 재난의 논리-공간 그 자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기존의 존재태를 초월해 자신을 규정하고 지배해온 프로그램과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개별적 몸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스템 레벨의 논리-공간으로 확장되는 것, 이는 연결론에 중점을 두는 인지과학에서 개별 대상이 아닌, “신경망의 많은 구성단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단위활동의 복잡한 패턴”<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 결과 이철민은 자신이 “사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자”로 변형되는 것을 느끼며 이를 “신의 형상에 가깝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교적인 용어로 치환하면 ‘해탈’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한 시뮬레이션의 자기 복제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퇴행’이나 ‘버그’ 같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닌 인간의 인식 또는 앎의 본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뮬레이션 된 세계 혹은 의식은 비본질적이거나 허무한 가상이 아닌, 삶과 세계 그 자체라는 주장은 유식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p>
<p>조하형의 포스트휴머니즘적 비전의 특징은 인간이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사물이 되고 사물이 오히려 인간적인 인지 능력을 갖는 장면을 상호교차하면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순간이 되면 인간과 사물 즉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짓는 경계가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리고 이들은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데, 이 단계가 되면 불교 등의 종교적 해탈의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하형의 소설이 제시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비전은 ‘키메라’와 같은 유전공학적 변종을 넘어서서 인공지능을 이용한 ‘슈퍼인텔리전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가 되는 국면까지 발전하게 된다.</p>
<p>　</p>
<p>　　―괴델만 논리적으로 사유했던 게 아냐. 붓다 역시, 사실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사유해 갔어. 12연기(緣起)는 완벽하게 논리적이며, 그래서 윤리적이고, 아름답기도 한 거야. 하지만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사유해 간 결과, 붓다가 도달하는 영토는, 논리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여. (...) <bold>그들이 난파하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붓다는 어딘가로 넘어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bold>(<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 150쪽</xref>, 강조는 인용자)</p>
<p>　</p>
<p>그렇다면 인류가 소설에서 등장하는 기술을 사용해 종교적 해탈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에서 김철수가 “아침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질문에서 “내가 바로 아침이다.”라는 대답으로 나아가는 것,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에서 붓다를 언급하는 장면 등은 소설에서 포스트휴머니즘적 상상력이 극단에 이르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결말에 도달하게 됨을 보여준다.<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 이는 소설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과학기술의 놀라운 성취는 인간 능력 뿐 아니라 정신적 단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에 대해 두려움과 경이를 숨기지 않고 있다.</p>
</sec>
<sec id="sec004">
<title>4. 나가며: 예언적 비전으로서의 포스트휴머니즘</title>
<p>‘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알린 케서린 헤일즈는 “포스트휴먼 주체는 혼합물, 이질적 요소들의 집합, 경계가 계속해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물질적 정보적 개체이다.”<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라고 규정한 바 있다. 조하형의 소설들은 이러한 포스트휴먼 주체가 어느 정도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한계까지 밀어붙인 극단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사실은, 우리의 세계가 ‘소설’이라는 논리와 상상력의 실험을 현실의 상황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맞춤아기(designer baby)와 유전자 가위 기술을 통해 생명체를 마음대로 조작하기에 이른 생명공학의 발달과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만드는데 성공한 컴퓨터공학의 성공이 바로 이러한 상상이 기우에 그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조하형의 소설을 비롯한 문학에서의 포스트휴머니즘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점차로 예언적 비전의 형태를 띠어 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많은 SF문학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공지능 로봇이나 유전공학으로 만든 괴물, 초인의 형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p>
<p>포스트휴머니즘적 전망은 과학기술이 인류를 위협하고 파국을 불러올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심과 권력의지에 사로잡혀 더 강력한 기능을 획득하려는 맹목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는 일부 개발자들과 거대 기업에게 반성의 기회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자기 조정을 거치지 않은 과학 개발의 폐해는 지난 세기의 여러 역사적 사실(핵무기를 비롯한 군비 경쟁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에서 반면교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억압’과 ‘지배’가 아닌 ‘해방’과 ‘깨달음’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직접적·부가적 효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시뮬레이션은 적지 않게 존재한다. 서구 근대 문명이 지배해온 세계에서 익숙하게 학습·재생산되어 온 서사 외에도 수많은 신화, 철학, 판타지 등이 근대를 극복하고 펼쳐질 포스트휴머니즘 세계를 위한 밑그림으로서 잠재되어 있다. 문학은 그 대안을 찾고 기존의 진부한 인식과는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사고실험의 영역으로 언제나 남겨져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불(기술)’을 쥔 우리가 어떤 세상과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가능한 선택지를 만들고 결과를 산출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러한 경고에 대한 해결책 가운데 유효한 대안은 인간이 만들어낼 놀라운 피조물의 ‘형상’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인간에게 낙관적이고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제시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존재로 조정될 때까지 우리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사고 실험, 즉 논리적 시뮬레이션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그 결과 도출된 형상 가운데 인류의 미래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유효한 모델들을 계속 추출하는 데 문학적 상상력이 도움이 된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xref>는 포스트휴머니즘적 비전이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지 않고 생물학적 창발이나 존재론적 해탈 같은 다양한 이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불교 사상의 중심인 연기론은 철학에 그치지 않고 현대 과학의 역학 체계, 뇌과학과 신경망 이론, 인지 생물학을 효과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모델로서 거론되고 있다.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을 완벽하게 성취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이러한 문학들은 기술에 대한 비관론을 극복하고, 인공지능을 유효하게 활용할 뿐 아니라 인공지능을 비롯한 비-인간 개체들과 공생하는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망은 포스트휴머니즘이 철학과 문학 등의 인문학은 물론 물리학과 공학에서 나아가 문학과 종교학의 영역과 통섭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p>
</sec>
</body>
<back>
<fn-group>
<fn id="fb001"><label>1)</label><p>노대원은 포스트휴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신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유의 영향을 통해 배태되었다. 그러나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근대적 ‘인간’과 휴머니즘의 상실과 몰락을 엄연한 사실로 경험하고 있는 시대의 사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4">노대원, ｢포스트휴머니즘 비평과 SF: 미래 인간을 위한 문학과 비평 이론의 모색｣, 『비평문학』 제68호, 한국비평문학회, 2018, 110-111쪽</xref>.</p></fn>
<fn id="fb002"><label>2)</label><p>이지용은 포스트휴머니즘 사상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필자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post-human)은 1960년대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포스트구조조의의 탈중심적이고 탈이념적인 해체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와 맞물려 인문예술분야에 폭넓게 확산되는 형태로 처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로 인해 파생된 인식 방법론이 포스트휴머니즘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달 현황과 맞물리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14">이지용, ｢한국 SF의 장르적 특징과 의의-근대화에 대한 프로파간다부터 포스트휴먼 담론까지｣, 『대중서사연구』 제25호, 대중서사학회, 2019, 57쪽</xref>.</p></fn>
<fn id="fb003"><label>3)</label><p>조하형의 두 소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열림원, 2004)</xref>과 <xref ref-type="bibr" rid="B002">『조립식 보리수나무』(문학과지성사, 2008)</xref>는 앞으로 본 논문에서 인용할 때는 작품명과 함께 쪽수만 병기하기로 한다.</p></fn>
<fn id="fb004"><label>4)</label><p>“명명(命名)은 폭력이 될 수 있다: SF 코드든 판타지 코드든,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그 코드들을 적절하게 조합하는 대신, 하나의 하위 장르 코드를 들이대고, 그 코드로 포획하기 위해 텍스트를 난도질하는 경우.” <xref ref-type="bibr" rid="B016">조하형, ｢[작가의 편지] 몇 개의 주석들; 『키메라의 아침』에 관한｣, 『문학과사회』 제21권 3호, 2008, 304쪽</xref>. 이러한 작가의 반발에 대해 처음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을 SF로 규정한 평론을 쓴 바 있는 평론가 박진은 다음과 같이 다른 비평문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는 당시 SF와 장르문학을 대하는 비평계와 작가의 시각차를 예각적으로 드러낸 논쟁이었기 때문에 분량이 조금 길지만 이 논문에 상당부분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사실 자체를 그가 완강히 부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신인류 조인(鳥人)을 포함하여 트랜스제닉 동식물들이 통제불능으로 양산되는 SF적인 시공간을 폭발적인 강렬함으로 창조해낸 소설임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은 SF의 &#x003C;코드로 포획하기 위해 텍스트를 난도질&#x003E;해야 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명백히 리보펑크적인 슬립스트림이다. 그런데도 조하형은 &#x003C;이 글은 기본적으로,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무엇이 아닌가, 어디에 사용할 수 없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글은 기본적으로, 자기 무덤을 파면서 대답하는 글이다&#x003E;라고 말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설이 SF 장르 용어로 불리는 데 대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소설도 아닌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을 쓴 작가에게서, &#x003C;본격문학&#x003E;과 장르문학을 이분법적으로 이계화하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SF적인 소설을 쓰고도 자신의 소설이 갖는 문학적인 의의를 강조하고 싶다면(이는 내 책의 기본 관점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그 자신마저 옭아매고 있는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에 대항해야 할 것이다(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한 일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8">박진,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는 왜 『키메라의 아침』의 아침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작가세계』 제20권 4호, 2008, 335쪽</xref>.</p></fn>
<fn id="fb005"><label>5)</label><p>심지어 조하형의 소설의 경우 SF 장르가 아닌 알레고리 소설을 지향한다는 데 안도감을 표하는 경향도 있었다고 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7">박진, ｢장르들과 접속하는 문학의 스펙트럼｣, 『창작과비평』 제36권 2호, 2008, 33쪽</xref>.</p></fn>
<fn id="fb006"><label>6)</label><p>따라서 이 소설은 1부에서 2부로 이어지는(이는 책에 묶인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순서대로 독해할 수도 있고, 장 순서대로 1부와 2부를 넘나들면서 읽어도 되는 독특한 구조를 취한다. 이는 소설의 플롯이 독자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체,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놓은 셈인데 이는 작가가 이 소설을 독립적으로, 혹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해서 읽을 수 있는 모듈(modular) 방식으로 썼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모듈적인 성격의 구조는 이미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에서도 실험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차미령의 분석이 이미 상세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그 부분을 인용해놓는다. “작가는 텍스트 블록과 링크라는 복잡하고 다소 생소한 장치를 종이책 속으로 끌어들이되 하이퍼텍스트의 핵심적 특징인 서사의 다양성을 꾀하는 대신 텍스트 전체를 무수한 파편들의 꼴라주로 만드는 길을 택함으로써, 이런 형식 자체가 뒤섞인 텍스트의 시공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환상적 장치가 되게끔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xref ref-type="bibr" rid="B017">차미령, ｢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 『창작과비평』 제34권 2호, 2006, 269쪽</xref>. <xref ref-type="bibr" rid="B011">음영철은 ｢인쇄텍스트의 하이퍼텍스트성 연구｣(『스토리앤이미지텔링』 제2호, 건국대학교 스토리앤이미지텔링연구소, 2011, 167쪽)</xref> 라는 논문에서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을 가리켜 한국소설에서 인쇄텍스트 중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한 비선형성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평가했다.</p></fn>
<fn id="fb007"><label>7)</label><p><xref ref-type="bibr" rid="B015">정여울,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상의 재앙: 편혜영, 윤이형, 조하형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한국현대문학회, 2011.6, 53쪽</xref>.</p></fn>
<fn id="fb008"><label>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0">우찬제, ｢서사도단(敍事道斷)의 서사｣, 『문학과사회』 제22권 1호, 2009, 300쪽</xref>.</p></fn>
<fn id="fb009"><label>9)</label><p><xref ref-type="bibr" rid="B015">정여울,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상의 재앙: 편혜영, 윤이형, 조하형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한국현대문학회, 2011.6, 48쪽</xref>.</p></fn>
<fn id="fb010"><label>1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3">김형중, ｢기어서 넘는 벌레, 상처를 긍정하는 몸｣, 『문학과사회』 제21권 3호, 2008, 322쪽</xref>.</p></fn>
<fn id="fb011"><label>11)</label><p>이러한 설명에 대해 포스트휴먼은 고전의 의인화 기법을 넘어서서 “결과적으로는 인간을 중심에 두는 개념 자체에서 탈피해서 비본질적이고 비중심적인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제의식과 방법론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보충 설명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자께 감사드린다.</p></fn>
<fn id="fb012"><label>12)</label><p>박진은 이러한 특성을 명명하기 위해 SF 용어인 ‘리보펑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p></fn>
<fn id="fb013"><label>13)</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홍성욱, 『인간·사물·동맹: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이음, 2010, 7-8쪽</xref>.</p></fn>
<fn id="fb014"><label>1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9">슈테판 헤어브레히터, 『포스트휴머니즘』, 김연순·김응준 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2, 22쪽</xref>.</p></fn>
<fn id="fb015"><label>15)</label><p>조하형은 자신이 소설에서 도달한 ‘넘어서기’를 ‘초월’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단호한 거부 의사를 표명한다. “개체성의 초월, 초월적 합일, …… 그런 건 “SF적 인식의 전환” 같은 것이 아니다. 클리쎄를 반복하는 일이 전환인가? 초월의 서사를 답습하는 일이 전환인가? 그런 유의 초월적 형이상학이야말로,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거부했던 것, 바로 그것이다. ‘여기’를 초월해(네트가 있는/네트로 상징되는) ‘저기’로 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성을 초월해 순수 정신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유의 이야기야말로, <xref ref-type="bibr" rid="B001">『키메라의 아침』</xref>이 형이상학적 질병으로 간주했던 것, 바로 그것이다.” <xref ref-type="bibr" rid="B016">조하형, ｢[작가의 편지] 몇 개의 주석들; 『키메라의 아침』에 관한｣, 『문학과사회』 제21권 3호, 2008, 308-309쪽</xref>.</p></fn>
<fn id="fb016"><label>16)</label><p>이로 인해 조하형의 소설은 하이퍼텍스트와 모듈식 구조 등 다양한 서사적 실험을 수행한다. “재난의 일상화로 인해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관습적 서사구조도 무의미해진다. 조하형은 현실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서사의 해체적 구성으로 은유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5">정여울,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상의 재앙: 편혜영, 윤이형, 조하형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한국현대문학회, 2011.6, 53쪽</xref>.</p></fn>
<fn id="fb017"><label>17)</label><p>이는 이철민이 탐독하는 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현재 공식 업무에서는 손을 뗀 상태였다. 학교에 안식년을 신청했고, 방재연구소에도 휴가를 신청했다. 연락처를 폐쇄해 사람들을 피하고, 세상 소식을 느슨하게 따라 잡으면서, 『불교논리학』이나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判批量論)』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 같은 책이나 읽고, 자기만의 ‘메타-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일에만 미쳐 있었다.”(44쪽)</p></fn>
<fn id="fb018"><label>18)</label><p><xref ref-type="bibr" rid="B019">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몸의 인지과학』, 석봉래 역, 김영사, 2017, 154-155쪽</xref>. 자기조직화와 상호협력이 일어나는 연결조직에서 나타나는 것이 창발성이며, 두뇌 같은 신경망 조직 역시 이러한 창발적 속성을 지닌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p></fn>
<fn id="fb019"><label>19)</label><p>이러한 모순은 뇌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뇌과학은 뇌를 관찰하는 주체가 관찰자의 ‘뇌’라는 사실에서 바로 이러한 자기지시적 한계를 시작점부터 노출하고 있다. 뇌를 뇌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지, 여부는 뇌과학이 과학적 객관성을 얼마나 담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언제나 회귀한다.</p></fn>
<fn id="fb020"><label>20)</label><p><xref ref-type="bibr" rid="B019">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몸의 인지과학』, 석봉래 역, 김영사, 2017, 170쪽</xref>. 이 단계에서 인지란 “단순한 구성단위들의 연결망에서 통일된 전체 상태가 창발되는 것”으로 규정된다.</p></fn>
<fn id="fb021"><label>21)</label><p>유식불교에서는 세상을 꿈에 곧잘 비유하며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요체로 삼는다. “유식의 참모습을 깨닫기 전까지는 ‘세상은 마음이 변한 것’임을 알 수 없다.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참으로 깨닫기 전까지는 항시 생사의 꿈 가운데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생사장야(生死長夜)라고 말씀하셨다. ‘생사의 긴 밤.’ 즉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듯이 깨어 있어도 나고 죽음이 한 순간의 꿈인 줄 모른다. 『반야심경』에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한 부분을 생각해보자.(...) ‘거꾸로 된 꿈의 생각에서 멀리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6">목경찬, 『유식불교의 이해』, 불광출판사, 2012, 43-44쪽</xref>.</p></fn>
<fn id="fb022"><label>22)</label><p>닉 보스트롬은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인류의 능력을 넘어서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슈퍼인텔리전스’라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보스트롬에 따르면 인류는 그런 슈퍼인텔리전스의 출현에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개발을 멈추지 못한 채 파우스트적 파국으로 향하는 전철을 밟고 있는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5">닉 보스트롬, 『슈퍼인텔리전스: 경로, 위험, 전략』, 조성진 역, 까치, 2017</xref>.</p></fn>
<fn id="fb023"><label>23)</label><p>김형중은 조하형 소설의 이러한 귀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영탄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불교와 SF의 이 기이한 결합! 디지털 글쓰기와 박상륭 식 소설쓰기의 이 절묘한 결합!” <xref ref-type="bibr" rid="B003">김형중, ｢기어서 넘는 벌레, 상처를 긍정하는 몸｣, 『문학과사회』 제21권 3호, 2008, 328쪽</xref>.</p></fn>
<fn id="fb024"><label>2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8">케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역, 플래닛, 2013, 25쪽</xref>.</p></fn>
</fn-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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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고문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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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열림원</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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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하형, 『조립식 보리수나무』,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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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기어서 넘는 벌레, 상처를 긍정하는 몸</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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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포스트휴머니즘 비평과 SF: 미래 인간을 위한 문학과 비평 이론의 모색</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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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장르들과 접속하는 문학의 스펙트럼</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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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는 왜 『키메라의 아침』의 아침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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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과학기술학으로 이해한 재난의 자기동일성(identity)에 대한 시론(試論): 라투르와 하이데거의 접점으로서의 재난</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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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한국 SF의 장르적 특징과 의의-근대화에 대한 프로파간다부터 포스트휴먼 담론까지</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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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상의 재앙: 편혜영, 윤이형, 조하형을 중심으로</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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