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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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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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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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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19_25_04_289</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19.25.4.010</articl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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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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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title>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60년대적 구성</article-title>
			<subtitle>-<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의 『世界一周無錢旅行記』(1962)</xref>를 중심으로</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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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title>South Korean Society and Disciplined Travel Fantasy in the 1960s </trans-title>
			<trans-subtitle>-Focusing on Kim Chan-Sam’s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1962)</xref></trans-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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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 id="aff01"><label>*</label>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기초학부</aff><role>초빙강의교수</r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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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 pub-type="p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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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lume>25</volume>
		<issue>4</issue>
		<fpage>289</f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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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19</copyright-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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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문초록</title>
<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의 『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가 발표된 1962년은 민간인의 해외여행이 강력히 규제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한 사회 전체를 통틀어 극소수에 불과했다. 국민 대부분은 저개발과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는 ‘국내’에 갇힌 채 대한민국의 바깥세상을 상상해볼 뿐이었다. 독자 대중은 갇힌 반도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을 김찬삼이라는 예외적 개인에 투사하며 대리만족해야 했다.</p>
<p>1960년대 남한 사회의 대중 독자에게 ‘김찬삼’이라는 캐릭터는 탈주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따라서 ‘김찬삼’은 대중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해야 했다. 이 표상은 남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세속적이고 탈정치화된 상식 이상이 되어선 안 됐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편향성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p>
<p>독자가 이 책에서 얻는 상상 지리지는 순도 높은 ‘비 공산권 국가로서의 세계’로 한정되어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콤플렉스가 남한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황에서, 그 이상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일은 대중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찬삼은 남한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럴 수 없는지 정확히 알았다.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는 독자들의 현실, 한국인을 ‘국내’에 가둬놓는 사회 현실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해선 안 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김찬삼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분석하여 1960년대 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의미를 고찰하는 한편, 우리 시대의 여행기가 여전히 지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묻고자 한다.</p>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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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Abstract</title>
<p>Kim Chan-sam’s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旅行記』</xref> was released in 1962. This was a time when the general public was strongly restricted from traveling abroad. Most of the people lived in ‘domestic’. Low development and political upheaval continued. The readership wanted a fantasy, which came out of a desire to escape from the peninsula. So was to become more popular around the popular characters called ‘Kim Chan-sam’.</p>
<p>Kim Chan-sam had to be a pushover to the public. This figure had to be secular and de-politicized. Above all, ideological bias had to be removed.</p>
<p>The book’s imaginary geography is the "world as a non-communist state" with a high purity. The Cold War ideology was prevalent throughout South Korean society. Kim Chan-sam knew exactly what he could and could not tell the South Korean reader. He couldn’t tell you the reality of my readers not being able to travel abroad. Not to mention a society locked up ‘domestic’ on the Korean reality. The study analyzes Kim Chan-sam’s storytelling strategy. Looking at the meaning of the travel fantasy,agenre of the 1960s, I would like to ask why travel writing in our time is still bound by its past limitations.</p>
		</trans-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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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제어</title>
			<kwd>김찬삼</kwd>
			<kwd>세계일주무전여행기</kwd>
			<kwd>환율</kwd>
			<kwd>계급</kwd>
			<kwd>규율된 여행 판타지</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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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eywords</title>
			<kwd>Kim Chan-sam</kwd>
			<kwd>A Round-the-world trip without money(世界一周無錢旅行記)</kwd>
			<kwd>Exchange rate</kwd>
			<kwd>The Class system</kwd>
			<kwd>Disciplined Travel Fantasy</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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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 id="sec001">
<title>1. 문제의식</title>
<p>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 ‘해외여행’의 의미는 여권 발급 과정부터 외환 사용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없는 계급체험의 문제였다. 원화(￦貨) 경제권에서 벗어나 달러(＄) 경제권으로 이동한 여행자는 명목환율(nominal exchange rate)과 실질실효환율(real effective exchange rate)에 의해 상대화된 국가 간 계급의 입체적 위상 구조 사이로 미끄러진다. 이 상황에 관한 특수한 임상기록지가 김찬삼의 첫 번째 여행서인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어문각, 1962)</xref>이다.</p>
<p>해외여행은 이민이나 이주 노동과 다르다. 한 나라 경제권에 장기 정주(定住)하면서 그 나라 화폐의 영향력에 규율된 경제적 신체로 구성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주하거나 포획당하지 않고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선택권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 해외여행이다. 이 일은 소유하거나 지원받을 수 있는 외화보유량에 따라 시효를 제약받는다. 여권(旅券)의 위력도 국적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의 국제적 경제가치에 비례한다. 국경을 벗어나 먼 이국에 떠나 있는 동안에도, 원화 경제권은 여행자의 신체에 덧씌워진다.</p>
<p>마르크스는 『자본』 3권 끝부분에서 수입 형성의 경로와 자본주의 내 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응을 이야기한 바 있다.<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 ‘계급’은 사회적 부의 배분과 그 취득 양식에 의해 구별되는 광범위한 집단성에 대한 문제이면서, 사회와 경제의 규정된 구조에 의해 인간(들)의 행동능력 범위가 어떻게 구성되거나 제약, 확장될 수 있는가의 쟁점이 동시에 맞물려 있다.<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 비슷한 소득수준과 소비 패턴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엇비슷한 행동능력의 범위는 계급의 신체성이 도식적으로 유형화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p>
<p>실제로는 정반대다. 계급화된 신체성을 위장하거나 적극적으로 망각하기 위한 소비, 이동, 일탈과 도발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여행자의 전형적인 욕망이기도 하다. 대중 서사에 드러난 여행 판타지도 기본적으로 이 욕망에 부응하고자 한다. 이 일 역시 간단치 않다. 정색하고 계급의 쟁점을 말끔히 지워버린다거나, 정치경제의 고민으로부터 초월한 듯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감성으로 퇴행하는 등의 서사 전략은 기계적으로 선택한다고 효과를 발휘하는 게 아니다.</p>
<p>1960년대 대표적 베스트셀러의 하나인 김찬삼의 여행기는 그 시기 독자 대중이 갈구하는 여행 판타지를 정확히 이해했다. 당대 독자가 원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었다. 반도에 갇힌 일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재료를 제공하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느끼지 않게끔 국내의 일상과 국외의 판타지를 봉합할 불온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섞는다. 후자의 요소로 김찬삼은 ‘애국’과 ‘민족주의’를 애용했다.</p>
<p>김찬삼이 연출한 세계여행가의 캐릭터도 1960년대 대중 독자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여행기 속의 김찬삼은 불가능한 목표를 현실로 이룬 ‘무전여행가(無錢旅行家)’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의 모험담은 저개발 국가 남한 대중들이 호감을 느낄 만한 요소로 가득했다. 타고난 계급, 노력 없이 얻은 부에 의존해 세계여행의 목표를 이룬 게 아니었다. 십 년여의 준비 기간 끝에 가까스로 성취한 일생의 과업이었다. 독자 대중은 이국만리에서 밥을 굶으며 고생길을 이어가는 김찬삼의 이야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 1인칭 화자 김찬삼의 ‘나’에 독자 자신을 일치시키는 독서 역시 어색하지 않았다.</p>
<p>전후 저개발 국가의 국민이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서술하되, 구질구질한 고생담만 늘어놓지 않았다. 이 책을 매뉴얼 삼아 세계여행에 나선다는 건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선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독자가 김찬삼의 여행기에서 더 많이 원했던 건 판타지였다.</p>
<p>이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독자의 환상에 부응하는 서사였을까? 김찬삼은 자신의 표적 독자로 여성보다는 남성을 겨냥하고 있다. 여러 나라를 넘나들 때마다 그는 이국 여성과의 교제담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여행지의 인상은, 거기서 만난 여성의 육체미를 칭찬하는 서사에 쉬이 겹친다.</p>
<p>이국 여인이 판타지라면 여행의 필수 불가결한 도구인 화폐는 비루한 현실의 거울이다. 국경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국민의 이동성을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원화는 보장하지 못했다. 해외로 나가려면 반드시 달러가 필요했다.</p>
<p>한국 정부의 외환 조달 능력은 1960년대 내내 취약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3인의 정권이 명멸했던 1960년대 초까지도 천 명 단위의 일반 여행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외환배정제도의 우선순위는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이 먼저였다. 이 시기에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한 사회 전체를 통틀어 극소수에 불과한 특권 계급뿐이었다. 국민 대부분은 저개발과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는 ‘국내’에 갇힌 채 대한민국의 바깥세상을 상상해볼 뿐이었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가 발표된 1962년은 민간인의 해외여행을 한층 강력히 규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학 목적의 여권 발행조차 허가가 녹록지 않았던 때다. 그런 만큼 반도 바깥세상을 향한 대중의 호기심, 세계 체험에 대한 갈증도 커졌다.</p>
<p>이 책은 고위관료나 사회 저명인사가 쓴 이전 시대의 점잔빼는 여행기와 스타일 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김찬삼은 독자 대중의 판타지에 부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사를 조직하되, 시대와 불화하지 않는 수준에서 계급과 정치경제의 쟁점을 지웠다.<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 대신에 1960년대 남한 대중문화에서 무난히 통용됐던 흥행 코드인 애국, 애족, 성(性)에 관한 유머를 활용했다. 이것은 여행 작가 김찬삼의 서술 원칙이면서, 당대 대중 독자가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제조 방식이었다.</p>
<p>김찬삼의 여행기를 다룬 기존 연구는 여행기의 대중적 상품성에 주로 주목했다. 우정덕은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를 중심으로 1960년대 대중 독자의 등장과 상품으로서의 기행문의 의미를 정리했다.<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 관광학계에서도 이 텍스트의 의미를 분석한 바 있다. 송영민과 강준수의 연구는, 김찬삼의 여행기가 ‘관광’ 개념을 대중화시키는 데 미친 영향을 평가했다.<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p>
<p>그리고 본 연구는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을 통해 당대 해외여행을 둘러싼 정치경제와 계급의 조건, 세계여행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가 작동되는 방식을 검토하려 한다. 선행 연구가 놓쳤던 맥락을 되짚어 김찬삼 여행기에서 특징적으로 결핍된 요소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하다.</p>
<p>해외여행과 계급 문제를 굳이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지금의 여행 문화와 담론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바깥, 일상의 외부를 희구하는 대중의 욕망은 어느 시대에나 계급과 무관하지 않다. 이 욕망의 기제를 지배 질서는 상시로 조율한다. 그 전형적 작동 방식을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의 흥행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연구가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고찰할 핵심 키워드로 ‘계급’을 내세우는 이유 역시, 규율된 여행 판타지의 구성 기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p>
</sec>
<sec id="sec002">
<title>2. 환율, 이동, 계급</title>
<p>해방 이후 1960년대에 이르도록 여권 발행 규제는 외환 관리의 한 방법으로 활용됐다. 일반인의 여권 발급이 어려웠던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p>
<p>관용 여권을 제외한 일반여권 발행은 1955년에는 연간 천 건 이하였고,<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 1962년에도 일반여권 발행 규모가 연간 이천 건에 미치지 못했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 그나마도 일반여권 취득자의 절반이 해외유학생이었다. 한국 정부의 취약한 외환 조달 능력이 문제였다. 여권 발행은 외화(달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정부로부터 공인받는 외환배정제도의 일환이기도 했다. 일반 여행자의 숫자가 겨우 몇백 명 증가하는 것만으로 외환 수급에 위기가 닥쳤던 당시 현실에서, 여권 취득은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었다.</p>
<p>이승만, 장면, 박정희 3인의 정권이 명멸했던 1960년대 초, 부족한 외환은 원조자금과 유엔군 지출 경비로 메꿀 수밖에 없었다.<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 정부 보유 외환이 최우선으로 사용될 곳은 전재(戰災) 복구와 국민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이었다. 민수용 물자의 도입자금 확보를 위한 외환 공매 역시 배정신청자격을 엄격히 제한했다.<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 남한 사회의 계급 구조가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구조화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p>
<p>정권의 생사가 결정되는 변수도 환율이었다. 시장에서의 수급 요인에 의해서 환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미 간 교섭을 통해 결정되는 상황에서, 어느 정권도 미국과 불화해서는 안정적인 집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p>
<p>이런 현실에서 가난은 남한 사회 어디에나 만연했다. 1953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63달러였다. 9년 뒤인 1962년까지 겨우 25달러를 올려 87달러가 되었고, 이후 1966년에서야 100달러에 가까스로 도달했다.<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p>
<p>이 시기 뉴욕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편도 비행권의 가격이 270달러였다.<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 87달러로는 북으로는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고 바다가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반도를 떠날 방법이 없었다.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유학을 위해 도미하는 수준을 넘어 세계여행을 시도한다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p>
<p>‘여권’과 ‘달러’는 1960년대 남한 사회의 폐쇄성과 계급적 위계를 집약하는 표상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부(富)를 축적해야 해외여행을 현실적으로 계획해볼 수 있었을까? 문제는 환율이었다. 195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환율은 500환 대 1달러였다. 이후 환율은 1960년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1000환 대 1달러가 되었고 이어 1300환 대 1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500환 대 1달러 시절에 비하면 한국 국민의 재산 가치가 달러로 환산 시 1/3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p>
<p>예를 들어 60만 환을 달러로 환전한다고 할 때, 1955년까지는 1200달러 정도를 바꿀 수 있었지만, 환율이 3배까지 급등한 상황에서는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500달러도 채 안 된다. 1962년 화폐개혁이 있기 전, 쌀 한 가마에 3만 환 정도 하던 시절이었고 60만 환은 집 한 채 가격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 다시 말해 집 한 채를 팔아도 달러로 치면 500불도 못 되는 돈이기 때문에, 당시 한국에서 미국 LA까지의 항공료 2000달러<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를 내려면 최소한 집을 네 채 이상을 팔아야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p>
<p>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원화는 세계로 나가려는 국민에게 원활한 이동성을 보장하는 화폐가 아니었다. 해외여행은 자국 화폐를 여행국의 화폐로 바꿔 소비하는 일이기에, 자국 화폐의 가치가 여행자 국민의 행동능력의 범위를 좌우한다.</p>
<p>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 일반여권을 취득하고 외화를 바꿔서 멀든 가깝든 반도의 바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해외여행 자격 심사의 관문을 통과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계급의 역량을 확인하고 수혜를 누리는 일이었다. 재력만이 아니라 학력 자본, 상징 자본, 인맥 자본까지 총동원해야 기회에 닿을 수 있었다. 이중 무엇 하나 갖춘 게 없는 하층계급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을 수 없었다.</p>
<p>해외여행 자율화 조치<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가 시행되기 전까지, ‘관용(官用)’ ‘공용(公用)’, ‘상용(商用)’, ‘문화관계(文化關係)’ 용무에 제한하여 해외여행은 허락받을 수 있었고, 여행 용무에 따라 해당 주무부(主務部) 장관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신문·잡지·단행본으로 발표된 여행기를 살펴보더라도, 필자들에게 국제여행의 1차 목적은 무엇보다도 공무 수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p>
<p>AP 본사의 초대로 미국을 방문했던 합동 통신사 사장 김동성의 여행기 『미국 인상기』(국제문화협회, 1948)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민국 유엔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조병옥의 해외 여행기인 『特使 유·엔 紀行』(덕홍서림, 1949), 대한노총 간부 자격으로 미국에서 열린 국제 자유 노련 대회에 참가했던 유기태의 ｢국제자유노련대회참가와 세계일주기행｣(『신천지』, 1950년 4월호), 그리고 같은 해 『신천지』 5월호에 실린 ｢美洲瞥見記｣의 필자인 고희동 역시 대한미술협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겸임하던 인물로 미국 방문 민간사절단의 단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모윤숙이 『문예』<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에 연재했던 ｢세계기행: 내가 본 세상｣ 역시 조병옥과 함께 UN특사 자격으로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던 활동 기록이다.<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 이들은 여행 경비를 국가 또는 국내외의 유력단체로부터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적 편의도 보장받았다.</p>
<p>그렇다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활동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일반인의 경우엔 해외에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김찬삼은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를 『金燦三 3次世界旅行: 世界의 나그네』( 삼중당, 1972)의 ｢世界旅行을 하려면｣이라는 장에 기술했다. 여급발급에서 출국, 입국 수속, 세계 각지의 교통편과 환전요령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p>
<p>우선 여권신청 과정부터 살펴보자. 주무부 장관의 추천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행 예정자는 외무부 양식에 맞춰 외무부 장관에게 여권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때 함께 첨부해야 하는 서류로는 주무부 장관의 해외여행 추천서, 여행자 신원 조사서, 납세필증 증명서, 지정 병원의 건강 진단서, 호적 초본, 사진, 그리고 36세 미만 남자라면 국방부 장관의 여행 허가서를 덧붙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용(商用) 여행자의 경우에 수출 실적 증명서가 더 필요하다.</p>
<p>경찰의 신원조사 과정도 까다롭다. 현주소와 본적지에서 각각 실시되기 때문에 최소 3주일 이상이 소요됐다. 전과가 있거나 경찰의 관심 대상이라면 신원조사를 통과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p>
<p>김찬삼은 중산층 이상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세완은 대법관까지 올랐던 인물로, 1930년 무용가 최승희 명예훼손 사건과 1933년 고리대금업자 판결인 베니스의 진재판(珍裁判) 판결, 1958년 정부통령선거 사건 판결, 1959년 동명여고 기숙사 사건 판결 등으로 세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p>
<p>대법관 아버지의 후광은 신원조사 단계에서 강력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상징 자본의 수혜였다. 하지만 검소하고 소박한 품성<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이었던 김세완은 아들의 세계여행에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았다.</p>
<p>전혜린의 독일 유학(1955-1959)이 유력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지원 덕분에 이뤄졌던 것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는 김찬삼의 세계여행기와 더불어 1960년대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의 하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뮌헨의 한 지역구인 ‘슈바빙(Schwabing)’은 독자 대중의 이국 취향을 자극한 명물로 손꼽힌다. 하지만 전혜린이 ‘슈바빙’에 부여한 뜻 모를 고뇌와 낭만의 정서는 해외 체험을 가능케 했던 그녀의 계급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었다.</p>
<p>글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대중 독자에게 어필한 특징도 달랐지만,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김찬삼은 경찰의 신원조사만큼은 매번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다. 이 점은 전혜린도 마찬가지였다. 김찬삼은 대법관의 아들 <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이었고 전혜린은 정치 거물의 맏딸이었다. 이 시기 신원조사 통과가 얼마나 까다롭고 절대적인 변수였는가는 다음의 신문 사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p>
<p>　</p>
<p>　　“현실적으로 行政機關및 國公企業의 人事制度에 있어서, 또는 海外旅行을 위한 旅券手續節次등에 있어서 成否를 左右할만한 절대적인 威力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바로 ‘身元調査制度’라는 것은 벌써부터 하나의 公公然한 상식처럼 되어왔다.”<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p>
<p>　</p>
<p>김찬삼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까지 검소하게 생활했다고는 하나, 가난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이 서른이 넘도록 세계여행의 꿈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p>
<p>그는 첫 번째 여행기의 서두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좋아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된 형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세계여행에 나섰다고 고백했다.</p>
<p>　</p>
<p>　　“나에겐 여행을 즐기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자전거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사고 전날까지 썼던 일기장에 ｢오늘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달리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는 십 년이나 십 오 년 뒤엔 남미(南美)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도 답사하리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일기장을 부둥켜안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하여 형님의 이상이었던 세계 일주 여행을 함으로서 소원을 풀어 드릴 양으로 세계지도를 벽에 붙이고 공상에 잠기며 제멋대로 지도에 여정(旅程)을 색연필로 기입하고 고치곤 했습니다.”<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p>
<p>　</p>
<p>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사연이면서, 김찬삼의 계급적 감수성을 반영하는 지점이기도 하다.</p>
<p>김찬삼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로 일하며 안정적인 월급쟁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법관 아버지를 모시며 한집에 살았기 때문에 집 걱정도 없었다. 김찬삼의 ‘꿈’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느 사람들에 비해 순정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여행을 현실로 욕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p>
<p>김찬삼이 하층계급의 삶과 비교해 월등히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해외여행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귀족적인 호사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할 순 없다.</p>
<p>그는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인천고등학교에서 지리교사를 하며 월급을 모았고 60여만 환의 종잣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과에 유학했다. 하지만 학업을 위한 진학이었다기보다는 세계여행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 미국 유학이라는 학력 자본이 세계여행의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다.</p>
<p>김찬삼은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국에서 그는 아시아에서 온 하층계급 이주민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세계여행의 꿈을 지켜내는 일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외환을 송금받아 기본적인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부터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유지할 수 있었던 경제적 지위가 해체된 채로 현지에서 자력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다. 참고로 전혜린도 독일 유학 시절에 경제 지원이 끊겨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p>
<p>하지만 김찬삼은 LA 비행장에 취직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초인적으로 일했다. 세계여행의 목표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몇 달 만에 수천 달러의 여행 자금을 모았다.<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 이 돈도 세계여행을 위한 최소 자금에 불과했다.</p>
<p>LA는 그에게 세계여행의 전초기지였다. 달러를 벌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았고, 한국에서보다 상대적으로 해외여행의 제한이 덜했다. 그는 이곳에서 세계 각국의 지리학연구소에 서한을 보내 초청장을 받는 준비를 착실히 했다. LA에서만 꼬박 1년을 머물며 세계여행 준비를 했다.</p>
<p>김찬삼의 여행기는 경제적 빈궁함에 시달리며 극기와 기지로 매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을 핵심적인 이야기 전개로 내세운다. 아래 인용한 대목도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p>
<p>　</p>
<p>　　“더구나 비행기로 여행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절약되지만 나 같은 무전 여행가에겐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수박 겉핥기로, 표면이나 겨우 보는 데 그치므로, 자동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 자동차는 개솔린 값만 있으면 어디까지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내겐 둘도 없는 여행의 이기(利器)였다. 어떤 할머니가 쓰던 중고품인 세단 차를 에누리하여 값싸게 사서, 나의 여행차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을 절약할 양으로 손수 고치기로 했다. 지렛대를 빌려다가 뜯어 버릴 것은 버리고 하여 자동차 속을 달리 꾸몄다. 즉 운전대는 나의 이동하는 서재를 겸하게 꾸몄고 운전대 뒤의 의자는 뜯어내어, 내 하숙 주인의 창고를 청소하여 준 대가로 받은 고물 침대(우리나라에 가져가면 훌륭한 침대가 될 것이다)를 넣었더니 안성맞춤으로 꼭 들어맞아 아담한 침실이 되었다. 따라서, 맨 뒤의 짐을 넣어 두는 곳엔 좀 부끄러운 일이나 길가에 버린 큰 유리병이며 깡통 등을 주워다가 자취 도구로 한 것이다. 그 유리병엔 내가 담근 독특한 통김치를 넣어 두기로 했다.”<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p>
<p>　</p>
<p>그의 글에 감명을 받는 사람들은 실로 다양했다. 그는 귀족처럼 꿈을 꾸되 그것을 현실로 이뤄내기 위해 근검절약했고 어떤 노동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여행기가 여러 계급을 넘나들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p>
</sec>
<sec id="sec003">
<title>3. 기식하는 의사(擬似) 제국주의자</title>
<p>1960년대 남한의 대다수 국민에게 ‘세계여행’은 사회의 폐쇄성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무관할 수 없었다. 이성욱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유행가인 &#x003C;인도의 향불&#x003E;, &#x003C;샌프란시스코&#x003E;, &#x003C;아리조나 카우보이&#x003E;, &#x003C;내가 울던 빠리&#x003E; 등을 비롯하여 1960년대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홍콩 등의 이국 취향의 표상물이 호출되는 까닭을 논하면서, 이를 남한 대중문화의 ‘억압된 욕망의 표정’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p>
<p>앞장에서 열거했던 김동성, 조병옥, 유기태, 고희동, 묘윤숙 등의 여행기는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 서사였다. 독자가 원하는 판타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대표 자격으로 해외를 방문한 필자들의 체험에선 반도 바깥에서 만끽하는 해방감을 감지할 수 없었다. 필자 자신이 국가이며, 남한 사회의 억압적 네트워크에 일조하고 있는 계급이기 때문이다.</p>
<p>그들과 비교해 김찬삼의 여행기는 대중 취향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31"><sup>31)</sup></xref>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는 1958년 9월부터 1961년 6월 22일까지 2년 10개월 동안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59개국을 여행한 남자의 여행기다. 동시기 한국에서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졌다. 1960년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했던 격변의 시기였다.</p>
<p><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는 출간 즉시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보름 만에 3판을 발행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대중의 억압된 욕망에 부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p>
<p>김찬삼은 1960년대 여느 평범한 한국 사람의 감성과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글쓰기를 할 줄 알았다. 특히 여체와 성교에 관련된 해외 풍속을 스토리텔링 하는 일에 의욕적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32"><sup>32)</sup></xref></p>
<p>김찬삼은 여행 중에 인종 차별 문제를 비롯하여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자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간단한 메모 수준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친다. 그 자신이 피해자일 때에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으려 했고, 기록 역시 단출하다. 불쾌한 감정에 빠져본들 긴 여행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테지만, 절제된 감정 조절이라고만 판단하기 어려운 장면이 많다.</p>
<p>미국 백인 학부모들이 흑백 공학(共學)에 반대하는 이유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해하기 힘든 남의 나라 사정이라며 적극적인 논평을 피했다.</p>
<p>　</p>
<p>　　“우생학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거니와, 백인들의 생리가 알아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법적으로는 공학이 인정되기 때문에, 흑인들도 위세를 부리는 듯했다. 종교 정신으로 이룩한 나라이면서도 흑인과의 갈등을 해결치 못할 뿐 아니라, 남의 나라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가보다. 또는 정신적인 것보다도 생리적인 필연적인 알력이 있는 것일까!”<xref ref-type="fn" rid="fb033"><sup>33)</sup></xref></p>
<p>　</p>
<p>남아공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결론만 내리지만, 기본적으로 백인 편에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p>
<p>　</p>
<p>　　“그러나 이 흑인들은 백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려고 노력하는 게 별로 보이지 않고, 그저 항거하는 대결 정신만을 갖고 있을 뿐, 파리 여성의 아름다운 나체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향락을 즐기며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 (중략) …… 서로, 특히 백인들은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이 염오(厭惡)의 악순환을 지양하는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인종 문제에 대한 소박한 결론이다.”<xref ref-type="fn" rid="fb034"><sup>34)</sup></xref></p>
<p>　</p>
<p>김찬삼으로서는 여행을 조력해준 각국 기관과 신문사의 백인들을 나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5"><sup>35)</sup></xref> 오히려 여행의 조력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여행가의 본분은 정치비평이 아니었다. 되도록 많은 나라를 돌며 다채로운 사람과 친교를 맺는 게 목적이라면, 인종 문제처럼 예민한 이슈에 필요 이상의 소신을 밝혀 불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p>
<p>다만 예외적이라 할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순간은 일본인과 마주칠 때다.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동질감보다는 식민 통치에 대한 민족적 악감정부터 떠올렸다.<xref ref-type="fn" rid="fb036"><sup>36)</sup></xref> 하지만 유럽의 식민지였던 남미 국가의 역사를 식민지 조선에 대입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특히 콜롬비아 편의 가톨릭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인식은 표면적인 인상 수준에서 겉돈다. 현지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내용도 다른 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과하다. 콜롬비아 편의 소제목 중 하나는 ‘외국 남자를 반기는 <xref ref-type="fn" rid="fb037"><sup>37)</sup></xref> 의식적으로 정치색을 줄이고 대중성에 집중하려 할 때마다 김찬삼이 선호하는 스토리텔링 방법이다.</p>
<p>1972년에 삼중당에서 다시 펴낸 <xref ref-type="bibr" rid="B002">『世界一周記』</xref>에서 콜롬비아 편의 내용이 보강됐지만, 1962년 판의 한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했다. 아래에 인용한 부분이 1972년 삼중당 판이다. 남아공에서 백인 차별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에서는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역사를 긍정한다. 미국이나 남아프리카 때와 마찬가지로 콜롬비아 여행을 조력해준 이들이 유럽계 백인이기 때문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38"><sup>38)</sup></xref></p>
<p>　</p>
<p>　　“아메리카 각지의 탐험이나 정복에 있어서 콜롬비아나 멕시코나 페루나 칠레에 대해서도 항상 카톨릭교 신부가 참가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들고 제일선에 나아가서 종교의 정신을 가지고 우선 원주민과 협의하도록 하여 되도록 피를 흘리는 투쟁을 피하려고 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뒤 식민지 통치에 있어서 가톨릭교가 행한 평화적이며 문화적인 사명은 훌륭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를 가나 주요한 도시의 중심에는 행정청이 있고 그 곁에는 반드시 중앙 사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같이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종래의 관념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으나 이것은 연구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9"><sup>39)</sup></xref></p>
<p>　</p>
<p>남아메리카의 역사 문제에 김찬삼이 적극적인 입장표명을 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쿠바혁명(1953-1959)의 여파로 반제국주의 좌파혁명이 남미 전체로 확산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xref ref-type="fn" rid="fb040"><sup>40)</sup></xref> 남미 각국에서 민족독립과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는 세력 역시 좌파였다. 일제 식민지를 겪었던 역사적 공통점에 동감한다는 이유로 좌파를 옹호하는 기록을 남긴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p>
<p>김찬삼이 방문할 수 있는 나라는 비 공산권 국가에 제한되어 있었다. 독자가 이 책에서 얻는 상상 지리지 역시 순도 높은 ‘비 공산권 국가로서의 세계’여야 했다. 격동의 시기에 있던 남미를 체험했음에도, 김찬삼으로서는 관광지 풍경이나 미녀 이야기 이상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자기 검열을 갑갑하게 여겼을까?</p>
<p>우정덕의 연구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xref ref-type="fn" rid="fb041"><sup>41)</sup></xref> 김찬삼의 세계 인식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과 의사 제국주의자의 태도에 치우쳐 있다. 자신을 조력하는 백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무전여행가(無錢旅行家)의 처세술로 이해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아프리카로 여정이 진행될수록 인종주의적 편견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p>
<p>1960년대 남한의 대중 독자는 의사 제국주의자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김찬삼은 꿈 많고 순박한 여행가일 뿐이었다. 이것은 우연히 시대를 잘 맞아 성공한 흥행 코드가 아니었다.</p>
<p>김찬삼은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미디어의 속성을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남한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럴 수 없는지 정확히 알았다.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는 독자들의 현실, 다시 말해 한국인을 ‘국내’에 가둬놓는 사회 현실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해선 안 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p>
<p>독자 대중은 갇힌 반도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을 김찬삼이라는 예외적 개인에 투사하며 판타지를 즐겼다.<xref ref-type="fn" rid="fb042"><sup>42)</sup></xref> 판타지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쏟는 일이다. 반대로 판타지는 강자의 논리와 감관에 기대 세상을 본다. 그러한 시선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도록 연출된 대중 서사가 김찬삼의 여행기였다.</p>
<p>그는 여행기에서 반복해 ‘미소’를 강조했다. 미소 하나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할 수 있다는 그의 ‘미소론’은, 다루기 불편한 온갖 주제에서 매끄럽게 탈출하는 스토리텔링 기술이기도 했다.</p>
<p>“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에스페란토는 소박한 미소(微少)였습니다. 인자스러운 동양적 미소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미소의 대화가 신이 주신 최상의 의사 표시의 교환이었습니다. 세계의 언어는 이천여 가지라고 합니다만, 그것을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xref ref-type="fn" rid="fb043"><sup>43)</sup></xref></p>
<p>이 말 자체는 틀린 게 없다. 하지만 김찬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우스갯소리와 미소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다.</p>
<p>세계여행자의 그럴듯한 미덕으로 김찬삼의 미소론이 독자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시대적 환경이다. 반도에 갇힌 한국인에게 ‘김찬삼’이라는 캐릭터는 탈주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따라서 ‘김찬삼’은 대중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해야 했다. 이 표상은 남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세속적이고 탈정치화된 상식 이상이 되어선 안 됐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편향성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것은 기계적 중립에 충실한 태도가 아니라, 강자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 자세의 문제다.</p>
<p>또 하나는, 그가 유독 자신을 ‘한국인’으로 소개하며 애써 미소로 대화한다는 점이다. 우루과이에서 한국계 성악가인 ‘죠이 김’의 선전 포스터를 봤을 때도, 그녀가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며 분노했다.</p>
<p>　</p>
<p>　　“내가 가기 두어 달 전에 이곳에서는 이 죠이 김이라는 한국 여자의 음악회가 있었다고 하며, 그때의 광고지를 가져왔다. 참 한국 옷이 보기 좋았다고 칭찬을 늘어놓기에 자세히 보았더니 일본 기모노를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이 죠이 김이 누구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일본 옷을 입고 태연히 한국인 행세를 한 것을 생각하니 등골에 식은땀이 났다. …… (중략) …… 우리나라 여자 옷은 몇십 년 전인가 세계 의상대회에서 제2위인가를 획득했다는데 그리 훌륭한 여자의 저고리와 치마를 왜 입지 않았을까가 아쉬웠다.”<xref ref-type="fn" rid="fb044"><sup>44)</sup></xref></p>
<p>　</p>
<p>그가 죠이 김의 사진을 보며 대행한 것은 1960년대 남한 대중의 시선이다. 외국인을 대하는 그의 미소 또한 ‘나는 곧 한국’이라는 대표의식의 발로다.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p>
<p>　</p>
<p>　　“그러나, 이번 세계 일주 여행이 비록 개인적인 지리학적 답사이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위대성을 알리려고 애썼으며, 더구나 우리나라의 이름조차 모르는 미개(未開)한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소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xref ref-type="fn" rid="fb045"><sup>45)</sup></xref></p>
<p>　</p>
<p>대중이 품는 기대에 ‘한국인 세계여행가’의 표상이 어긋나지 않아야 함을 김찬삼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작가 자신만이 아니라 독자 대중 모두 지켜야 할 반공과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국민 됨을 위반하지 않고자 했다. 이것은 규율된 판타지다. 이 판타지의 동조자는 여성보다는 남성이었다. 그의 책에 유독 많이 수록된 외국 여자 사진도 제한된 룰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해방감의 표현이었다.</p>
</sec>
<sec id="sec004">
<title>4. 연출된 민족주의와 미디어 활용술</title>
<p>김찬삼의 새로운 여행기에 대한 독자 대중의 관심은 단행본 출간 전, 동아일보에 연재가 진행되던 시절부터 뜨거웠다.<xref ref-type="fn" rid="fb046"><sup>46)</sup></xref></p>
<p>그의 첫 번째 신문연재가 있었던 1961년 6월 28일 동아일보 2면을 살펴보자. 그의 글은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旅行記｣</xref>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로 많은 분량으로 게재됐다. 김찬삼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사진 설명엔 ‘샌프란시스코에서 여행 준비를 마치고 알래스카로 등정하려는 필자’라고 되어있다. 이 기사 바로 아래에는 김팔봉(金八峯)의 역사 연재소설 『성군(星君)｣이 고색창연한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p>
<p>2면의 기사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의 담화문이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철두철미한 정신혁명과 희생적 봉사를 호소하는 요지의 글이다. 이 담화문과 김찬삼의 여행기 사이에는 근무 중 무단이탈하여 사창굴에 갔다가 적발된 순경 2명에게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는 기사가 끼어있다. 그밖에도 ｢親母를 살해한 간질병 환자｣ 같은 흉흉한 기사도 읽을 수 있다. 이날 2면에는 장 의장이 강조하는 정신혁명의 모범적 모델로 보이는 노인의 미담이 보도되어 있다. 어떤 노인이 자진하여 철도 주변 무허가건축을 제지하고, 철로를 무단횡단하지 못하도록 계몽운동을 펼쳐 교통부 표창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하단의 광고란에는 할리우드 영화의 제목들도 확인할 수 있다.</p>
<p>같은 지면 안에 현실과 판타지의 독물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둘은 서로 섞이지 않고 각각의 박스에 구획된다. 이러한 배치를 결정하는 심급에는 5·16 쿠데타 이후 경색된 사회 분위기가 작동한다. 김찬삼의 여행기는 사치성 세계여행이 아니라 ‘무전여행(無錢旅行)’이었기 때문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강조하는 모토와 충돌하지 않았다.</p>
<p>52회에 걸친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비슷비슷한 패턴의 기사 배치가 반복됐고 2면의 균형 또한 일관되게 지켜졌다. 김찬삼은 매회 독자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소재와 사진을 제공했다. 연재물 작가답게 독자의 반응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수완도 상당했다.</p>
<p>김찬삼은 첫 번째 세계여행기의 ｢후기｣에서 자신의 여행 비결을 밝히고 있다. 그의 가장 유용한 여행 도구가 신문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다.</p>
<p>　</p>
<p>　　““그러면, 이번 나의 <underline><bold>무전여행의 방법</bold></underline>을 말씀드리겠습니다. <underline><bold>도보(徒步)로 국경을 넘어서면, 맨 먼저 신문사를 찾아갔습니다.</bold></underline> 메시지를 내놓으며 내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나라에 오니 감개무량하다고 하며,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일들을 알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은 신기한 복장을 한 낯선 사람이니까 더욱 기쁘게 맞아주었습니다.</p>
<p>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로 번역하여, 여러 나라에 보낸 메시지엔 ｢<underline><bold>죄송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를 지도해 줄 분은 없을까요</bold></underline>(여기엔 은연중에 내게 침식을 제공해 줄 것을 바라는 뜻이 있음)｣하고 이미 알려 두었지만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underline><bold>구걸(求乞)</bold></underline> 같아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p>
<p>　　어떤 나라에서는, 그 나라 신문 기사에 넣기 위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예절(어버이를 섬기는 것 따위)을 내용으로 한 글을 주면 신문에 실릴 뿐 아니라, <underline><bold>원고료까지 톡톡히 주었습니다.</bold></underline></p>
<p>　　<underline><bold>이같이 신문사를 방문한 그 이튿날 문교부에 찾아가면 신문에서 봤다고 하면서 친절이 반겨 주었습니다.</bold></underline> 장관이 몸소 맞아주고, 문헌을 주기도 하며, 학교와 그 밖의 곳에 소개도 해주었습니다.</p>
<p>　　더욱 고마운 것은 거리에 나가면 시민들이 ｢한국 사람이 왔다｣고 하며 대환영하는 것입니다. 사인을 해달라고 할 대엔 우리 한글과 영어로 이름을 썼으며, 좌우명(座右銘) 같은 것을 써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겐 아주 신기한가 봅니다.</p>
<p>　　게다가 <underline><bold>그 나라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정치성을 떠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도를 찍은 ｢슬라이드｣를 보여 드리면 강의료를 주며, 교회 같은 데서는 초대할 때에 거마비(車馬費)까지 주었습니다.</bold></underline></p>
<p>　　그리고, 하숙집에는 나를 초대하겠다고 전화가 오기도 하고, 사람이 오기도 했습니다. 처음 가지고 할 땐 사양하지만 두 번째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이리하여 연줄로 여러 사람네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는 그 나라 사람의 국민성이나 생활 풍습을 아는 데는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xref ref-type="fn" rid="fb047"><sup>47)</sup></xref></p>
<p>　</p>
<p>신문 미디어를 뚫는 것이 기식/구걸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현지 보도를 통해 ‘한국인 세계여행가 김찬삼’의 방문을 알릴 수 있으면, 그 화제성을 이용해 정부 기관이나 대학에 접근할 수 있고, 원고료와 강의료를 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극동아시아에서 온 여행자에게 흥미를 느낀 사람들로부터 숙박 등의 도움을 받기도 수월했다.</p>
<p>김찬삼은 ‘세계여행가’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다. 거리의 시민에게 환영받는 방법, 어느 나라 대중에게든 어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략에 능통했다.</p>
<p>그는 자신을 만화 캐릭터 같은 이미지로 표상하는데 능했다. ‘한국에서 온 오랑우탄을 닮은 세계여행가’의 사진으로 해외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기사마다 이 사진을 제공했다. 국제적으로 먹히는 유머였다. 반응은 선진국보다는 제3세계 국가에서 더 열렬했다. 그의 용모가 이국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p>
<p>　</p>
<p>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다분히 있는 라렐이란 처녀가 나더러 솔로냐고 묻기에 카사도Cassado라고 했더니, “결혼 안 했더라면 내가 프러포즈할 텐데요.”</p>
<p>　　라고 대담한 말을 하는 데는 놀랐다. 그녀의 얼굴엔 야릇한 표정이 깃들인다. 초면에 농담 아닌 고백을 할 줄이야 몰랐다. 이곳 여성들은 매우 진취적이다.<xref ref-type="fn" rid="fb048"><sup>48)</sup></xref></p>
<p>　</p>
<p>위의 상황에 등장하는 여인은 농을 건 것에 불과하다. 김찬삼도 그걸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오히려 기능적인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여행기를 읽는 남성 독자에게 해외여행에 관한 성적 공상의 소재를 제공하는 일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에 수록된 사진 구성에서 외국 거리의 풍경이나 문물보다도 이국 여인의 사진이 빠지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p>
<p>그런데 세계여행을 마친 한국인에게 남한 사회는 무엇을 의심했을까? 반도 바깥을 체험한 뒤의 심적 변화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김찬삼은 남한 대중이 원하는 모범 답안대로 대답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김찬삼은 세계여행 이전보다 더욱 투철한 애국자, 민족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기 곳곳에 돌출하는 반일 감정의 기록은 다분히 의식적으로 서술된 스토리텔링이다. 김찬삼은 세계 각국에서 일본인과 마주칠 때마다 항시 불편한 감정을 품었고, 그 속내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귀국 전 마지막 방문국인 일본에서 이런 태도의 최종 결산을 한다. 이곳에서 그는 전후 일본의 경제 부흥을 바라보며 착잡한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p>
<p>거침없이 반일과 민족주의의 정념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여타의 정치적 입장은 무지와 무시로 이어갔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선 조금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이슈에 대해서도 인종주의와 관련된 상황에 한정해 소극적인 논평에 그칠 뿐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콤플렉스가 남한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황에서, 그 이상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일은 대중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p>
<p>그런 의미에서 1960년대 대중의 요구와 수준에 그의 글은 딱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조차 그의 여행기를 좋아했다. 1961년 10월에는 정보공보관 주최로 ‘김찬삼 세계일주 사진전’이 열렸고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49"><sup>49)</sup></xref> 정치색이나 계급색을 풍기지 않으면서 독자 대중과 시대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할 줄 알았던 이의 흥행술이다.</p>
</sec>
<sec id="sec005">
<title>5. 이야기되지 않는 여행기</title>
<p>김찬삼의 여행기는 오늘날의 대중 독자에게도 인기를 끌 수 있는 책일까?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율화 이후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행기가 쏟아져 나왔다. 여행기의 필자들도 대학생에서 가정주부까지 다양해졌다. 외국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도 극복돼서 오늘날의 독자 대중에게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는 예전 같은 아우라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50"><sup>50)</sup></xref></p>
<p>1960년대 해외 파견노동자와 생계를 위해 국외로 떠나가야 했던 이들<xref ref-type="fn" rid="fb051"><sup>51)</sup></xref>에게도 김찬삼의 여행기는 판타지일 뿐이었다. 그들은 김찬삼이 여행기에 담지 않은 ‘실제의 외국’과 ‘실제의 한국’을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듣지 않았다. 1960년대의 한국은 그들의 목소리가 닿기엔 너무 멀고 꽉 막힌 외국(外國)이었기 때문이다.</p>
<p>지금은 국민 10명 중의 한 명이 1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대다. 한국인이 해외여행에서 쓰는 돈만 해도 1년에 29조 5000억 원에 달한다.<xref ref-type="fn" rid="fb052"><sup>52)</sup></xref> 이런 시대에 김찬삼의 여행기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까?</p>
<p>이 질문은 시대와 불화하지 않는 ‘규율된 판타지’에 관한 성찰을 요구한다. 어느 시대에나 대중은 이런 유의 대중 서사를 찾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기를 끄는 여행 서사의 경향은 식도락이나 사진 찍기의 즐거움에 과도하게 몰두한다. 탈정치화의 경향은 김찬삼 여행기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다. 이러한 경향을 문제 삼는 담론조차 없다. 각박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났다면, 그 시간만큼은 한국 생각 따윈 안 하는 게 당연하다는 심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외국 풍광에서 무엇에 집중하고, 반대로 무엇을 애써 보려 하지 않는 걸까? 봤더라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행은 어느 시점이든 결국 끝나기 마련이고 우리의 일상은 판타지만으로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p>
<p>대중이 여행 판타지를 갈구하는 핵심 원인은 계급으로부터 비롯된다. 현실을 외면하려는 우리 정신의 아이러니 또한 계급에 집약돼 있다. 바로 그 계급의 화두가 제거된 판타지라는 공통점에서 우리 시대의 여행기는, 셀럽이 출간한 여행기든 소셜 네트워크의 게시물이든, 모두가 김찬삼의 적자(嫡子)다.</p>
</sec>
</body>
<back>
<fn-group>
<fn id="fb001"><label>1)</label><p>카를 마르크스, 『자본 Ⅲ-2』, 강신준 옮김, 길, 2010, 1085-1173쪽.</p></fn>
<fn id="fb002"><label>2)</label><p>피에르 부르디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최종철 옮김, 동문선, 1995, 17-18쪽.</p></fn>
<fn id="fb003"><label>3)</label><p>후원 기관을 구하지 못한 나라를 방문할 때에는 김찬삼은 사실상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의의 후원자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남미 여행과 달리 아프리카에선 공포와 기아의 행진을 이어가야만 했다. “아프리카 여행은 공포와 기아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죽음의 행진은 아니니, 비극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 선택한 여행임에랴. 아프리카에서 갖은 사경에 부딪힌 것도 모두가 나의 여행을 더욱 보람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포도 공포려니와 이 아프리카에선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는 날이 많았는데, 이것만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굶는 것보다 더 설운 것이 없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졌던 것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293쪽</xref>.</p></fn>
<fn id="fb004"><label>4)</label><p>이것은 비단 김찬삼 여행기만이 아니라 1960년대 대중 출판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했다. <xref ref-type="bibr" rid="B018">천정환, ｢개발/계발과 문학: 처세, 교양, 실존–1960년대의 “자기계발”과 문학문화｣, 『민족문학사연구』 40권, 민족문학사학회, 2009, 91-133쪽</xref> 참고.</p></fn>
<fn id="fb005"><label>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우정덕, ｢김찬삼의 &#x003C;세계일주무전여행기&#x003E; 고찰–1960년대 독서 대중의 세계 인식과 연결하여｣, 『한민족어문학』 56, 한민족어문학회, 2010, 427-455쪽</xref>.</p></fn>
<fn id="fb006"><label>6)</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송영민·강준수, ｢여행기의 가치 분석–김찬삼의 여행기를 중심으로｣, 『관광연구논총』 제30권 제1호, 한양대학교 관광연구소, 2018, 3-28쪽</xref>.</p></fn>
<fn id="fb007"><label>7)</label><p>&#x003C;외부부의 생태&#x003E;, 『경향신문』, 1955.7.13.</p></fn>
<fn id="fb008"><label>8)</label><p>&#x003C;민간인의 해외여행 억제조치 강구토록&#x003E;, 『경향신문』, 1962.4.18.</p></fn>
<fn id="fb009"><label>9)</label><p><xref ref-type="bibr" rid="B017">주익종, ｢1960년대 초·중반 한국의 환율 개정｣, 『경제사학』 제64호, 경제사학회, 2017, 161-188쪽</xref> 참고.</p></fn>
<fn id="fb010"><label>10)</label><p><xref ref-type="bibr" rid="B005">김낙년, ｢1950년대 외환배정과 경제적 지대｣, 『경제사학』 제33호, 경제사학회, 2002, 93-120쪽</xref> 참고.</p></fn>
<fn id="fb011"><label>11)</label><p>&#x003C;한국은행 추계–66년 국민소득 1인당 백7달라, 국민총생산은 백23달라&#x003E;, 『조선일보』, 1966.12.27. 참고로 1965년 1인당 국민소득은 97달러였다.</p></fn>
<fn id="fb012"><label>12)</label><p>Howard &#x0026; Adelaide Stein, The budget guide to Europe, 1962.</p></fn>
<fn id="fb013"><label>13)</label><p><xref ref-type="bibr" rid="B011">박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140-145쪽</xref> 참고.</p></fn>
<fn id="fb014"><label>1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4">『경제통계연보』, 한국은행, 1961, 234-235쪽</xref> 참고. 이 자료는 한국은행 사이트 경제통계시스템 Ecos를 통해 pdf파일로도 찾아볼 수 있다. <uri>http://ecos.bok.or.kr</uri>.</p></fn>
<fn id="fb015"><label>15)</label><p>1960년대 국제 항공요금은 100마일당 35달러 수준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LA까지의 거리가 5950마일이므로 2082달러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xref ref-type="bibr" rid="B008">로버트 B 라이시, 『슈퍼자본주의』, 형선호 역, 김영사, 2008, 137쪽</xref> 참고.</p></fn>
<fn id="fb016"><label>16)</label><p>1981년 8월 1일자로 여권법 시행규칙이 제정되면서 여권의 단복수 구분, 부부해외여행 연령 제한, 관계부처 추천 및 조회제도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등 여권발급절차가 크게 간소화되면서 해외여행 자유화의 물꼬가 트였다. 이후 친지 초청 방문(1982년 7월 1일), 관광여행(1983년 1월 1일) 등의 완화조치가 이어졌고 1989년 12월 해외여행 완전 자율화 조치가 이뤄졌다.</p></fn>
<fn id="fb017"><label>17)</label><p>모윤숙, &#x003C;내가 본 世上&#x003E;, 『문예』, 1949.9.; &#x003C;세계기행: 내가 본 세상&#x003E;, 『문예』, 1949.10.; &#x003C;세계기행 내가 본 세상(3)&#x003E;, 『문예』, 1950.2.; &#x003C;세계기행: 내가 본 세상(4)&#x003E;, 『문예』, 1950.3.</p></fn>
<fn id="fb018"><label>18)</label><p>이상의 여행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은 <xref ref-type="bibr" rid="B016">임종명, ｢1948년 남북한 건국과 동북아 열강들의 인식: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 미국기행문의 미국 표상과 대한민족(大韓民族)의 구성｣, 『史叢』 67, 역사학연구회, 2008</xref> 참고.</p></fn>
<fn id="fb019"><label>19)</label><p>김찬삼은 『燦三 3次世界旅行: 世界의 나그네』, 삼중당, 1972, 652-683쪽.</p></fn>
<fn id="fb020"><label>20)</label><p>이 시기 해외여행자와 공직자의 신원조사에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건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x003C;신원조사제도 시정에 고려해야할 문제점&#x003E;, 『조선일보』, 1963.10.26. 연좌제가 폐지된 신원조사에 대한 입법 추진은 1963년 10월에서야 이뤄졌다. &#x003C;연좌 지양한 신원조사제 입법도 착수&#x003E;, 『조선일보』, 1963.10.25. 하지만 수년 동안 본격적인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연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흐지부지되었다. &#x003C;3년의 지각이 되고만 연좌제 철폐의 논의&#x003E;, 『조선일보』, 1967.1.26. 이후 1967년 엄민영 내무부 장관의 명의로 신원조사에 연좌제 적용은 없다는 발표가 있었다. &#x003C;연좌제｣이미 폐지. 嚴敏永 내무부 신원조사에 폐단 없도록&#x003E;, 『조선일보』, 1966.5.17.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참고로 1971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도 연좌제 폐지였다. &#x003C;연좌제 없애고 전과자도 구제&#x003E;, 『조선일보』, 1971.4.27.</p></fn>
<fn id="fb021"><label>21)</label><p>그는 평소 남루한 복장을 다녔다고 한다. 면도 도구도 스무 살 때 구입했던 것을 79살 때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법관 신년 하례를 올리면서 낡은 군인 점퍼와 등산복 차림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낭비와 허례허식을 싫어해서 다 떨어진 등산양말도 버리지 않고 몇 번이고 기워서 신었다. 1973년 3월 11일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에도, 사고를 낸 총알택시 기사가 김세완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시골 노인쯤으로 알고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보다 아예 절명케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차를 돌려 2차 사고를 냈다고 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7">김찬삼 추모사업회 편,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이지출판, 2008, 37-42쪽, 298-300쪽</xref>.</p></fn>
<fn id="fb022"><label>22)</label><p>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은 해방 전에는 경찰 간부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헌병부사령관을 역임했다. 이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대한변호사회 회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 원로로 활동했다. 전봉덕이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라는 설도 있다. 전혜린은 자신의 책에서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과거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그녀의 글에 등장하는 아버지 전봉덕은 자애로운 교양인의 모습이다.</p></fn>
<fn id="fb023"><label>2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7">『세계의 나그네 김찬삼』</xref>의 첫 번째 장 역시 ｢선친, 대법관 김세완｣이다. 김찬삼이 저명한 여행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과 미덕 덕분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p></fn>
<fn id="fb024"><label>24)</label><p>&#x003C;신원조사제도 시정에 고려해야 할 문제점&#x003E;, 『조선일보』, 1963.10.26.</p></fn>
<fn id="fb025"><label>2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1-2쪽</xref>.</p></fn>
<fn id="fb026"><label>26)</label><p>김찬삼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학위를 따지는 못하고 1년 과정만을 수료했다. <xref ref-type="bibr" rid="B007">김찬삼추모사업회 편,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이지출판, 2008, 18-21쪽</xref>.</p></fn>
<fn id="fb027"><label>27)</label><p>이승하, &#x003C;‘자기 앞의 생’ 치열한 열정으로 살았던 천재 작가 전혜린&#x003E;, 『여성신문』, 2013.7.5. 참고. <uri>http://bitly.kr/fhgd4qH</uri>.</p></fn>
<fn id="fb028"><label>2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22쪽</xref>.</p></fn>
<fn id="fb029"><label>2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77-78쪽</xref>.</p></fn>
<fn id="fb030"><label>30)</label><p>이성욱, 『쇼쇼쇼–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 생각의 나무, 2004, 168쪽.</p></fn>
<fn id="fb031"><label>31)</label><p>동시기 지식인 기행 산문의 일반적인 유형에 관해선 김미영의 연구를 참고할 것. <xref ref-type="bibr" rid="B006">김미영, ｢1960-70년대 간행된 한국 지식인들의 기행산문｣, 『외국문학연구』 제50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13, 9-33쪽</xref>.</p></fn>
<fn id="fb032"><label>32)</label><p>여행기의 전반부인 1부 북미 편은 소제목에서도 김찬삼 스토리텔링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x003C;여자 변소에서 사진 찍다&#x003E;, &#x003C;생식 포교 이야기&#x003E;, &#x003C;미국 처녀 니나&#x003E;, &#x003C;에스키모의 러브 송과 춤&#x003E;, &#x003C;오로라와 처녀의 나체 기도&#x003E;, &#x003C;철정조대를 잠가야 할 미국 여성&#x003E;, &#x003C;산에서 미국 부인의 엉덩이를 밀어주다&#x003E;, &#x003C;섹시한 비키니 수영복의 광태&#x003E;.</p></fn>
<fn id="fb033"><label>3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82쪽</xref>.</p></fn>
<fn id="fb034"><label>3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201쪽</xref>.</p></fn>
<fn id="fb035"><label>35)</label><p>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는 남아공 YMCA와 현지 신문사인 ‘The Star’의 도움을 받았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200-201쪽</xref>.</p></fn>
<fn id="fb036"><label>36)</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世界一周無錢旅行記』</xref>의 내용을 보강한 1972년 삼중당 판 <xref ref-type="bibr" rid="B002">『世界一周記』</xref>에는 해외에서 일본인과 마주칠 때 그가 했던 행동이 1962년 판보다 상세히 적혀 있다.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음에도 영어를 쓴다거나(<xref ref-type="bibr" rid="B002">158쪽</xref>), 일본인의 도움을 받는 동안에도 식민지 시절을 떠올리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xref ref-type="bibr" rid="B002">151쪽</xref>) 김찬삼은 여행 기간 내내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를 묻는 상황이 되풀이됐고, 그때마다 열을 올려 한국을 자세히 소개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시절 일본군의 잔학성을 비판한 영국인의 말을 들을 땐, ‘진리의 순례자’가 되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350쪽</xref>.</p></fn>
<fn id="fb037"><label>37)</label><p>콜롬비아 여성’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125-126쪽</xref>.</p></fn>
<fn id="fb038"><label>38)</label><p>콜롬비아 문교부와 메디린 대학의 초대와 지원이 있었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126-128쪽</xref>.</p></fn>
<fn id="fb039"><label>3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2">김찬삼, 『世界一周記』, 삼중당, 1972, 156쪽</xref>.</p></fn>
<fn id="fb040"><label>40)</label><p>정이나,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운동 연구: 쿠바 혁명을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연구』 제31권 3호,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2018, 49-70쪽 참고.</p></fn>
<fn id="fb041"><label>41)</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우정덕, ｢김찬삼의 &#x003C;세계일주무전여행기&#x003E; 고찰–1960년대 독서 대중의 세계 인식과 연결하여｣, 『한민족어문학』 56, 한민족어문학회, 2010, 449-450쪽</xref>.</p></fn>
<fn id="fb042"><label>42)</label><p>그의 여행기는 1960년대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으며, 김찬삼은 각종 대중 강연과 방송에서도 맹활약했다. 그야말로 그는 1960年代産 스타였다. <xref ref-type="bibr" rid="B015">이임자, 『한국 출판과 베스트 셀러–1883-1996』, 경인문화사, 1998, 351쪽</xref>.</p></fn>
<fn id="fb043"><label>43)</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360쪽</xref>.</p></fn>
<fn id="fb044"><label>44)</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170쪽</xref>.</p></fn>
<fn id="fb045"><label>45)</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359쪽</xref>.</p></fn>
<fn id="fb046"><label>46)</label><p>1961년 6월 28일부터 총 52회에 걸쳐 ｢世界一周 無錢旅行記｣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2면에 연재되었다.</p></fn>
<fn id="fb047"><label>47)</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359-360쪽</xref>. 강조한 부분은 인용자.</p></fn>
<fn id="fb048"><label>48)</label><p><xref ref-type="bibr" rid="B001">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156쪽</xref>.</p></fn>
<fn id="fb049"><label>49)</label><p>&#x003C;대한뉴스&#x003E; 제335호, 1961.10.14.</p></fn>
<fn id="fb050"><label>50)</label><p>1994년 이후로 김찬삼은 방송과 강의 활동을 중단했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이었다. 2003년 7월 2일에 사망하기 전까지 러시아(1995)와 동남아시아(1996-1997)로 세계여행을 떠났다.</p></fn>
<fn id="fb051"><label>51)</label><p>1963년부터 1977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7800명의 광부와 1만 30명의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 보냈다. 1962년 10월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들여온 1억 5000만 마르크의 차관은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서중석,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265쪽 참고. 해외 파견노동자 뿐만 아니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계속된 국군파월(國軍播越)도 우리 국민의 비극적 해외 체험의 하나다.</p></fn>
<fn id="fb052"><label>52)</label><p>한국문화관광연구원 통계관리팀, ｢2018 국민여행조사 보고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9. 참고.</p></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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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고문헌</title>
<ref-list><title>1. 기본자료</title>
<!-- 김찬삼, 『世界一周無錢旅行記』, 어문각,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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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1962</year>
<source>世界一周無錢旅行記</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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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世界一周記』, 삼중당,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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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2</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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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찬삼</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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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1972</year>
<source>世界一周記</source>
<publisher-name>삼중당</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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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끝없는 旅路— 金爘三 2次世界旅行』, 삼중당,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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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3</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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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찬삼</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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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1972</year>
<source>끝없는 旅路— 金爘三 2次世界旅行</source>
<publisher-name>삼중당</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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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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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b>한국은행</collab>
<year>1961</year>
<source>경제통계연보</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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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ist><title>2. 논문과 단행본</title>
<!-- 김낙년, ｢1950년대 외환배정과 경제적 지대｣, 『경제사학』 제33호, 경제사학회, 2002, 93-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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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낙년</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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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2</year>
<article-title>1950년대 외환배정과 경제적 지대</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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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제33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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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영, ｢1960-70년대 간행된 한국 지식인들의 기행산문｣, 『외국문학연구』 제50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13, 9-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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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미영</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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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3</year>
<article-title>1960-70년대 간행된 한국 지식인들의 기행산문</article-title>
<source>외국문학연구</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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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추모사업회 편,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이지출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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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b collab-type="editor">김찬삼 추모사업회</col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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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8</year>
<source>세계의 나그네 김찬삼</source>
<publisher-name>이지출판</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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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B 라이시, 『슈퍼자본주의』, 형선호 역, 김영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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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역</comment>
<year>2008</year>
<source>슈퍼자본주의</source>
<publisher-name>김영사</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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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상운, ｢1961년 환율개혁의 경과와 의의｣, 『史叢』 제92호, 고려대학교역사연구소, 2017, 83-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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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1961년 환율개혁의 경과와 의의</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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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고려대학교역사연구소</publisher-name>
<issue>제92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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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상운, ｢이승만 정부 환율정책의 변용｣, 『역사와 경계』 제110호, 부산경남사학회, 2019, 345-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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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류</surname><given-names>상운</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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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9</year>
<article-title>이승만 정부 환율정책의 변용</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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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부산경남사학회</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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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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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6</year>
<source>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source>
<publisher-name>창비</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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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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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5</year>
<source>한국 현대사</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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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8</year>
<article-title>여행기의 가치 분석—김찬삼의 여행기를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관광연구논총</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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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우</surname><given-names>정덕</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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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김찬삼의 〈세계일주무전여행기〉 고찰—1960년대 독서 대중의 세계 인식과 연결하여</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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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임</surname><given-names>종명</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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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8</year>
<article-title>1948년 남북한 건국과 동북아 열강들의 인식: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 미국기행문의 미국 표상과 대한민족(大韓民族)의 구성</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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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1960년대 초·중반 한국의 환율 개정</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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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개발/계발과 문학; 처세,교양,실존—1960년대의 “자기계발”과 문학문화</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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