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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title xml:lang="ko">대중서사연구</journal-title>
		<journal-title>Journal of Popular Narrative</journal-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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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n pub-type="ppub">1738-3188</is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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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r-name xml:lang="ko">대중서사학회</publisher-name>
		<publisher-name>The Association of Popular Narrative</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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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jpn_2020_26_01_135</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18856/jpn.2020.26.1.005</articl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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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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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title>2010년대에 ‘학생운동’ 말하기<xref ref-type="fn" rid="fn01">*</xref></article-title>
			<subtitle>-1990년대와 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 구술과 ‘우리’의 구성</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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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title>Speaking Student Activism in the 2010s</trans-title>
			<trans-subtitle>-Experience of Student Activism in the 1990s and 2010s and the Composition of ‘We’</trans-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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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 id="aff01"><label>**</label>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aff><role>박사과정</role>
			<aff xml:lang="en">Yonsei University</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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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otes>
		<fn id="fn01"><label>*</label><p>이 논문은 2017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5A2A03068712)</p></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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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 pub-type="ppub">
			<day>28</day>
			<month>2</month>
			<year>2020</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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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lume>26</volume>
		<issue>1</issue>
		<fpage>135</f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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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statement>대중서사학회</copyright-statement>
<copyright-year>2020</copyright-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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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문초록</title>
<p>이 글은 2010년대에 이루어진 1990년대와 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 구술을 대상으로, 각 구술에서 ‘우리’가 그려지는 양상의 차이와 그 차이를 만들어낸 배경으로 2010년대의 조건이 만들어낸 일상적 경험의 누적을 주목한다.</p>
<p>2010년대에 채록된 1990년대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당시의 학생운동 문화에 대한 거리감이다.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경험한 구술자들의 말 속에서 당시 대학의 학생운동 문화는 사적 관계를 타고 이루어지며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동시에 그 ‘자연스러움’은 그것이 구술되고 있는 2010년대의 맥락에서는 ‘부자연’스럽거나 ‘이상한’ 것으로 이야기되며 현재의 구술자와는 일정한 거리감을 지닌 경험으로 의미화되었다.</p>
<p>이러한 양상은 90년대의 경험이 2010년대에 구술되고 있는 조건과 결부되어있다. 구술자들에게 과거의 경험을 구술하는 ‘현재’는 ‘촛불’ 이후이자 ‘강남역’ 이후로 설명되었고,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인 듯 묘사되며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발생케 한 계기로서 위치했다. 균질한 ‘우리’를 의심케 하는 이 질적 변화는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젠더 이슈가 가장 커다란 화두였던 2010년대 중반 이후를 살며 새로이 체득된 젠더적 감각에 기반을 둔다. 2010년대의 사회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에서는 ‘우리’의 구성이 더 이상 어떤 공통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수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집한 개인들과 같이 이해된다.</p>
<p>그리하여 2010년대의 학생운동 구술은 이런 것을 이미 일상의 감각으로 체화한 이들의 경험이 드러난다. 이들이 구성한 ‘우리’는 사적 관계와는 무관하거나 무관해야 하는 것이었고, 동질성이 가장 두드러진 집단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시위 당시와 그 자리 바깥에서까지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니었다. 관련 경험이 내내 조심스러운 태도로 구술되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p>
<p>이는 결국 ‘학생운동’, 나아가 사회운동과 ‘우리’로 결집하는 감각을 새로이 질문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운동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를 묻는 일의 효용을 질문한다. 곧, 운동에서 고정된 ‘우리’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의 필요성과 의미를 질문한다. 그리하여, 어떤 고정된 위치나 좌표가 과연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다.</p>
	</abstract>
	<trans-abstract xml:lang="en">
<title>Abstract</title>
<p>The article focuses on the student activism experience of the 1990s and 2010s and on the accumulation of everyday experiences created by the conditions of the 2010s against the backdrop of differences in how the composition of ‘we’ is portrayed in oral narrative.</p>
<p>What stands out in the 90s oral narratives on student activism experiences, which were compiled in the 2010s, is the distancing of the culture of student activism at that time. In the words of speakers who experienced university life in the 1990s, the culture of student activism at the university was created through private relationships, and was, needless to say, considered ‘natural’.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natural’ is said to be ‘abnormal’ or ‘strange’ in the context of the 2010s in which it is being talked about, and is meant to be an experience with a certain distance from the present speakers.</p>
<p>This aspect is associated with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 experience of the 90s is being described in the 2010s. The present, which explains past experiences to speakers, was explained after the 2016 candlelight protest and Gangnam Station femicide protest, and is described as a world that is qualitatively different from before, and is located as an opportunity to create a critical distance from past experiences. This qualitative change, which raises suspicions about the homogenous “we”, is based on a newly acquired sense of gender sensitivity, living since the mid-2010s, when gentler issues were the biggest topic in Korean society, among others. In the 2010s, the composition of ‘we’ is no longer understood as a community of people who share any commonality, but as individuals who unite despite numerous differences.</p>
<p>This reveals the experiences of those who have already embodied this in their everyday senses in the 2010s. The ‘we’ they formed should have nothing to do with private relationships, nor was homogeneity considered the most prominent group, so it was nothing that could explain the ‘me’ at the time of the demonstration and outside of the venue. It was in that context that the relevant experience was described in a cautious manner throughout.</p>
<p>This, in turn, raises the need to ask and understand a new sense of student activism and, moreover, social movements and the sense of unity as ‘we’. It should also be asked who is the main body of the movement and what is the use of asking it. Soon, the need and meaning of defining the fixed identity of ‘we’ in the movement should be questioned. Therefore, it should be asked what fixed positions or coordinates can really represent someone’s position.</p>
</trans-abstract>
		<kwd-group kwd-group-type="author">
		<title>주제어</title>
			<kwd>대학생</kwd>
			<kwd>대학교</kwd>
			<kwd>학생운동</kwd>
			<kwd>사회운동</kwd>
			<kwd>구술</kwd>
			<kwd>광장</kwd>
			<kwd>젠더</kwd>
			<kwd>세대</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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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eywords</title>
			<kwd>university student</kwd>
			<kwd>university</kwd>
			<kwd>student activism</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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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1990s</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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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community</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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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1. 들어가며: ‘학생’, ‘운동’, ‘학생운동’</title>
<p>1990년대에 태어나 201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학생운동’<xref ref-type="fn" rid="fb001"><sup>1)</sup></xref>은 도무지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멀찍한 무엇일 것이다. 2010년대의 ‘(대)학생’은 ‘공동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우연한 개인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학생’은 어떤 지향이나 경향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그 사람의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런 시대에 ‘운동’이 ‘movement’가 아니라 ‘exercise’로 먼저 이해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p>
<p>그래서 2010년대가 끝나고 2020년에 막 들어선 시기에 ‘학생운동’을 이야기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생경한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이 낯섦의 감각은 그저 그 주변의 용어나 사건들에 익숙하지 않은 문제이기보다는 나의 생활 세계와는 다른 문화를 접하는 것의 문제이다. 인터뷰 현장에서, 오가는 질문과 답에서, ‘학생운동’이라는 주제에서 겉도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들은 아무리 어떤 문화에 ‘들어간다’고 해도 완전히 ‘내부인’일 수 없는 나의 조건을 깨닫는 장면들이었음을 새삼스레 느꼈다.</p>
<p>이 글은 이 털어지지 않는 낯설고 생경한 감각, 1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학생이자 조사자, 연구자로서의 어색한 위치에 발 딛고 있다. 참여한 구술의 모든 장면에는 이 어색한 ‘나’의 존재가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든 구술자에게든 그 장면에 참여한 이들에게 어느 정도 의식되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자리의 비슷한 세대 사람들이 얼마간 공유하고 있는 90년대의 학생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그 ‘모른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그야말로 그 문화와 그것을 이루고 있었던 일상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p>
<p>그리하여 지난 시기의 학생운동 구술에서 1차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그 문화의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다만 보다 중요한 점은 그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말하느냐였다. 199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 구술은, 1980년대의 구술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거리감’이 당시에 관한 서사들을 관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도드라졌다. 당시의 문화적 당연함은 오늘날의 구술자들에게 얼마간은 멀찍한 거리에서, 종종 비판적으로 이야기되었다.</p>
<p>여기에는 그것이 구술된 시점, 2010년대의 맥락과 그간 누적된 계기들이 존재한다. 다름보다는 같음으로 상상되곤 했던 ‘우리’와, 균질한 ‘우리’라서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졌던 ‘같이’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의 경험들이 1990년대와 2010년대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학생운동’의 주체로 묶여 존재했던 ‘우리’와, 지금, 2010년대에 당시를 말하는 자신은 같은 사람이되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p>
<p>그리하여 오늘날 90년대가 어떤 공고함에 균열이 스며있던 시기로 새롭게 이야기될 때, 2010년대의 ‘학생’과 ‘운동’,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은 그런 감각을 일상화한 이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2010년대의 ‘학생’들에게 균질하지 않은 ‘우리’라는 감각은 ‘깨우쳐진’ 것이기보다는 이미 스며있는 일상의 감각이다. ‘우리’의 경계에 대한 일상적 의심과 ‘다름’에 대한 의식은 이들의 삶에서 다음의 키워드들로 갈무리된다: 불신, 의심, 경계 혹은 공포, 익명성, 그리하여 자기방어와 자기검열…. 이들의 세계에서 ‘우리’란 애당초 균질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시위’와 ‘운동’으로 뭉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것만은 같은’ 어떤 한 가지를 엄격하게 고수해야 했다.</p>
<p>이처럼 오늘날 새로운 운동의 풍경 뒤에는 시대를 지나오며 ‘우리’로서 결집하는 감각이 달라진 배경이 있다. 달라진 사회운동의 양상은 오늘날 조직 혹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세대론의 핵심적인 이슈로 다뤄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회운동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방법이나 방향을 논하기 전에 그 기저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의 감각이 있음을 먼저 발견할 필요가 있다.</p>
<p>1990년대와 2010년대는 달라진 사회운동의 양상과 그것을 만들어낸 감각을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기이다. 편의상 연대를 통틀어 지칭하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학생)운동과 젠더적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1990년대와 2010년대의 특정한 맥락에 주목하기로 한다.</p>
<p>학생운동에 관해서 1990년대 초반과 후반의 양상은 대조적이다. 90년대 초반부터 중반 무렵은 소위 ‘87년 체제’의 주역으로 꼽히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연장으로 학생운동 문화가 대학가에서 대중화되었던 시기인 동시에 제도적 민주화와 사회주의권 붕괴로 운동 내부의 동력을 잃어가던 시기로도 진단된다.<xref ref-type="fn" rid="fb002"><sup>2)</sup></xref> 90년대 후반은 소위 ‘96년 연대 사태’<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와 97년 IMF 등을 계기로 대학가에서 학생운동 세력이 급격히 사그라들고<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 ‘비운동권’ 학생회가 세력을 얻기 시작한 시기로, 그 이후 대학 내에서 대중적으로 조직화된 운동의 양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학생운동 ‘퇴조’의 역사와 맞물려 90년대의 학생운동의 성과나 사회적 의의에는 80년대의 그것에 비하여 별다른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고, 당시 학생운동 경험자들의 개인사에서는 ‘봉인된 기억’으로 자리해왔다.<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p>
<p>2010년대라는 시기는 그런 90년대 학생운동 경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젠더 이슈가 한국 사회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당시의 경험들이 새로이 해석되고 이야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0년대에 태어나 삶에서 조직화된 운동을 체험한 적이 없는 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젠더적 이슈로 처음으로 ‘운동’의 장면에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2010년대의 맥락에서 90년대와 2010년대 운동 경험 구술은 겹치기도 구분되기도 하며, ‘학생운동’을 질문하는 새로운 방법을 요구한다.</p>
<p>이 글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안고 수행한 구술 인터뷰 작업에 기반을 둔다. 인용된 총 8명의 구술자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일 뿐 아니라 운동 문화의 ‘남성중심성’에 비판적 거리감을 지닌 이들이었는데, 이러한 구술자 섭외는 반드시 의도한 것은 아니나 사회운동과 젠더라는 연구의 관심사에 견인된 측면이 크다.<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p>
<p>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에 대한 구술 조사는 1990년대에 관한 것보다는 좁고 폐쇄적인 사적 관계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구술자와 조사자 피차가 지닌 주제에 대한 조심성과 관련되어있다. 1990년대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인터뷰는 언제나 90년대 대학 생활을 경험한 조사자와 동행한 것이었는데, 인터뷰를 주도한 것 역시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조사자의 사적 관계망 안에서 구술자를 섭외하여 기존에 이미 일정 정도 라포가 있는 관계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점차 다른 구술자에게 주제에 흥미를 보인 새로운 구술자를 소개받는 등 기존에 라포가 전무한 대상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 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은 필자가 혼자 조사자로 참여하여 수행한 것으로, 주제에 따라 구술자를 물색하여 선정하기보다는 이미 라포가 있는 대상 가운데 관련 주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인터뷰에 응할 의사를 밝힌 대상에 대해서만 인터뷰를 진행했다. 새로이 구술자를 소개받은 경우에도 그와 친밀한 소개자와 동석한 채로 조사가 이루어졌다.</p>
</sec>
<sec id="sec002">
<title>2. 2010년대에 말하는 1990년대의 ‘학생운동’과 ‘거리감’</title>
<p>1990년대는 대학 진학률이 이전 시기보다 확연히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대학생의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은 채 ‘대중’으로서의 정체성과 섞여들던 <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 시기였다. ‘다들 가니까 나도 그냥 대학에 간’ 2000년대 이후의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선택하는 것에 어느 정도의 자발성이 작용했다는 인식이 발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술자들의 말속에서 90년대의 대학생은 80년대의 대학생보다는 ‘열린’,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면서 2010년대의 대학생보다는 ‘덜 우연한’ 계기로 모인 집단으로 나타난다.</p>
<p>관련하여 9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인터뷰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당시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차이들(지역, 학번, 소속, 역할, 입장 등)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의 기본적 틀과 진행 방식에 대한 선이해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이가 ‘학생운동’ 지형에 고도로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학생운동’이 당시 대학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는 문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구술자들이 그런 문화적 ‘자연스러움’에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태도와도 이어지는데, 아래에서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다.</p>
<sec id="sec002-1">
<title>2-1. ‘자연스러운’ ‘우리’의 구성: “어차피 똑같은 사람들이니까….”</title>
<p>대부분의 구술자는 대학 입학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 입학으로 접하게 된 대학 내의 사적 관계들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처음 ‘학생운동’에 들어서던 순간에 대한 구술은 ‘별 것 아닌데’, 혹은 ‘대단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과 같은 말들 혹은 그런 뉘앙스와 함께 등장하여 선선하고 가벼운 태도로 이야기된다. 이러한 경향은 자신의 대학 생활과 ‘학생운동’의 역사, 그 이후 사회운동의 경험을 말하는 내내 유지되는 것이어서, 자신의 행보가 어떤 대단한 결의나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거창한 의미가 부여되는 일이 부담스럽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p>
<p>한편으로 이는 ‘90년대는 작은 계기만으로도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시기였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의 중·고등학생 시절에서 몇 가지 어렴풋한 기억들(80년 광주, 87년 6월, 학교의 전교조 교사, 근처 대학가의 시위문화 등)이 ‘학생운동’을 선택하게 된 배경으로 묘사되기는 하나, 그런 장면들이 번뜩이는 각성이나 개안의 순간,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순간 등의 커다란 무게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p>
<p>‘학생운동’의 구체적인 사건과 장면들에 대한 구술에서 개인적인 동기나 행위가 크게 묘사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자신이 속한 단위가 어떤 노선을 (이미) 취하고 있어서, 자신은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지적했듯 학생회 조직을 타고 이루어지는 당시 학생운동의 조건 아래 가능했던 일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90년대 당시의 학생운동 문화에 대한 선이해 위에서 발화된 것이었다.</p>
<p>　</p>
<p>　　“아, 내가 대학을 가면은 사회문제에 대해서 나는 좀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없지 않아 했었어요, 그때는. 이게 좀 잘한 사람도 없고 잘못한 사람도 없고, 이, 참, 누가 봐도 이 사회적인 문젠데 내가 거기 휩쓸리지 말아야 되겠다, 이 생각은 강하게 있었죠. (중략) 잘 살아야 되겠다. 나만 잘 살아야 되겠다 이래 생각했죠. 확실하게!”<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p>
<p>　</p>
<p>90년대 초반, 부산의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한 A는 대학에 가면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문제에 ‘휩쓸릴’ 것을 미리 예상하여 그로부터 거리를 두리라고 다짐했었다고 말한다. 이토록 ‘확실하게’ 다짐했음에도 결국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관한 구술이 이어지는데, 요는 학생회 선배들과 맺게 된 친분과 당시의 대학 문화에 그야말로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이다.</p>
<p>　</p>
<p>　　“일단 제가 이제 X대 공대를 갔는데, 공대가 8개 과가 있었나? 한 50명씩 400명 정도 되는데 여학생이 채 50명이 안 됐어요, 공대다 보니. 그러니까 이제 일단 여학생들한테 선배들이 잘 해주는 거죠. 왜냐면 그 여학생들이 그 학생회 주변에 있어야지 남학생들도 거기 모이거든요. 구조가 그래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가지고 되게 잘해주셨고, (중략) 대학 들어가서는 학생회 선배들이 잘해주니까 막 거기 따라다니면서 학생회 행사 이런 데 가고.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내가 저런 데 절대 가지 않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 좀 했죠.”<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p>
<p>　</p>
<p>다음의 몇 가지 발언들은 대수롭지 않은 조로 이야기 되었지만 당시의 대학 문화와 대학생 시위의 풍경에 관한 중요한 지점들을 포함한다. 대학생의 시위 문화는 ‘운동권’이냐 아니냐의 문제이기보다는 대학 생활의 일부에 가까웠고, 대학 내의 사적 관계가 계기가 되어 참여하게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p>
<p>　</p>
<p>　　“근데 이제 그때는 운동권이라고 집회 가고 운동권 아니라고 집회 안 가고 이런 거 아니었거든요. 거의 반이 50명이면은 몇 명 빼곤 다 집회에 참가를 했어요. (중략) 그때는 네, 그때는 뭐 다 나왔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길에서 다 만났으니까. 그 정도니까.”<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p>
<p>　</p>
<p>학생운동을 지속하게 되는 동력 역시 그 안에서 맺게 되는 관계들이었는데, “그때는 완전 아는 선배가 가쟀으니까 갔고. 그리고 이제 무리가 생기잖아요, 그 시기쯤 되면은. 친한 친구들. 그 친구들하고 ‘같이 저기 한번 가보자’, 이래가지고 갔죠.”와 같은 A의 말이 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p>
<p>다른 지역, 다른 시기에 대학 생활을 한 구술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술자들은 종종 당시 자신이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과정을 ‘당연히’, ‘자연스럽게’ 등의 단어로 이야기하곤 했다.</p>
<p>　</p>
<p>　　“제가 대학을 들어갈 때 대학생이면 당연히 데모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던 나이….”</p>
<p>　　“왜요?”</p>
<p>　　“그건 모르겠어요. 그때 당연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건 기억도 나는 게 엄마랑 버스타고 가면서도 막 그 사회문제, 알지도 못하는데 되게 흥분해서 막 얘기를 했고. 엄마는 ‘그러면 잡혀간다. 조용히 해라’ 그런 얘기를. ‘대학생이면 당연히 데모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얘기를 했던 게 하나 기억이 나고.”<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p>
<p>　</p>
<p>　　“입학하고, 그때만 해도 이제 대학 사회에서 학생회의 힘이 강할 때였고, (중략) 뭐 자연스럽게 선배들 오라는 행사 가고, 신입생 환영회 가고, 어디 가고, 뭐, 뭐, 그거 따라다니기 바빴죠.”<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p>
<p>　</p>
<p>앞선 발화들에서도 일부 나타나듯 이렇게 사적인 관계를 통해 학생운동 조직을 결집하고 구성하는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가장 큰 방법이자 동력이었다.<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데리고 행사에 참여하는 등의 일은 그들이 대학에 적응하게끔 돕는 일인 동시에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문화에 그들을 접속시키고 자질을 따져보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칼렌다식 사업’이라고 표현된 한총련의 시기별 사업 계획이 일종의 매뉴얼 아닌 매뉴얼 역할을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p>
<p>　</p>
<p>　　“그래서 저도 이제, 지나고 나면 그랬는데, 신입생이 학교에 들어오면 3월달 정신없이 뭐, 술 먹고, 신구대면식이다 뭐다 하고, 4월달, 이제, 넘어가면 학교 출범식이나 보통 이제 4.19 즈음해서 이제, 사회과학세미나 같은 거 하고, 5월달에 이제, 아, 4월달에 이제 뭐, 지역총련 출범식 이런 거 하고, 5월달에, 초에 보통 농활, 농활 딱 끌고 갔다가, 그 다음에 한총련 출범식 데리고 가면 이제 어느 정도 운동권 되어있는 거죠. (중략)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보면. 딱, 고렇게 돌아다녔죠, 뭐.”<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p>
<p>　</p>
<p>이런 문화적 당연함에 대한 구술은 종종 그런 감각에 낯선 이들에게 설명하거나 해명해야 하는 주제로 여겨지기도 했다. 학생운동 문화의 ‘자연스러움’은 친밀한 사적 관계에서의 ‘자연스러움’에 빗대어, 혹은 바로 그것으로 설명되었다. 꽤 자주, 인터뷰에는 90년대에 대학 문화를 경험한 인터뷰어 혹은 인터뷰이가 10년대 학번 인터뷰어들에게는 생경한 당시의 감각을 설명하는 순간들이 포함되었다.</p>
<p>　</p>
<p>　　“예, 뭐, 정신없이 술 먹고, 뭐 정신없이 데모하러 댕기고 또, 선배들이 재밌게 해 주잖아요.”</p>
<p>　　“1학년 때?”</p>
<p>　　“뭘 재밌게 해 줘요?”</p>
<p>　　“(웃음) 이런 거 되게 궁금해해요.”</p>
<p>　　“어…. 정신을 빼놔요,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p>
<p>　　“(웃음) 약간 또 공감된다.”</p>
<p>　　“아….”</p>
<p>　　“그래서 그, 뭐라고 해야 되노, 같이 다니면, 사생활이 없도록 만들어줘요. 그니까, 억지로 그런 게 아니라, 있잖아요, 같이 술 먹고, 새벽까지 술 먹고, 자고, 동아리방에서 자고, 같이 아침 먹고, 오늘은 뭐 하고 가자, 오늘은 하여튼 뭐, 일상에서 모든 것, 유흥과 모든 것을 동아리 방에서, 해결을 다 해줬죠. (중략) 아, 왜, 친한 친구들끼리 그냥 어울려 다니면 있잖아요, 딴 생각 안 하고 모든 생각을 이들과 같이 하잖아요. 술도 먹고, 노는 것도 얘들이랑 하고, 뭐 그런, 그런 분위기였죠.”</p>
<p>　　“맞어. 술 먹고 일어나면 이미, 아침 일정이 다 정해져 있고….(웃음)”</p>
<p>　　“어차피 똑같은 사람들이니까….”<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p>
<p>　</p>
<p>그러나 구술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선택한 “어차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다른 시기와 구분되는 당시 학생운동의 문화적 특징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 운동 조직의 공식적 일정과 사적 관계의 강화, 유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되는 일이었던 것이다.</p>
<p>이 사적 관계로 시작된 활동은 생각보다 많은 영역에 ‘당연스레’ 걸쳐있었는데, 비단 학생운동 뿐 아니라 구술자의 생애 전반에 걸친 ‘정치적인’ 선택들은 이 사적 관계의 그림자 아래 놓인 것으로 구술된다. 구술자들이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대체로 사적 관계를 통해, 이미 자신이 선택하기도 전에 특정 ‘노선’-‘NL’, ‘PD’, 그 중에서도 ‘강성’인지 여부, ‘사수대’ 등의 역할을 하는지 여부 등-을 띤 조직에 진입하여,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p>
<p>다수의 구술자는 대학 졸업 이후에 사회운동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는데, 이 경우에도 대학 때부터 이어진 네트워크가 선택의 중요한 계기로 그려졌다. ‘친구의 소개로’ 어떤 단체를 알게 되었다거나, 그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구술은 ‘대학 친구’라는 사적 관계가 얼마간 사회/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p>
<p>결국 구술에서 발견되는 90년대 학생운동의 감각은 이렇게 어찌 보면 우연히 만났다고도 할 수 있는 사적 관계들로부터 ‘자연스러운’ ‘우리’의 경계가 구성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 그리고 그에 대한 입장을 통해, 선택의 결과로 뭉치기보다는 이미 ‘우리’라는 경계가 존재하고 각자의 다름은 그 내부에서 소통되었다. 대학의 모임 문화에 근거해 이미 모여 있고, 조직화되어있고, 그 안에서 이미 나뉘어 있는 어떤 역할들 가운데 어떤 것을 맡아 하고, 거기에 근거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p>
</sec>
<sec id="sec002-2">
<title>2-2. 거리감: ‘이상했던’ ‘그때’ ‘우리’와 장면들</title>
<p>90년대 학생운동 경험이 2010년대의 맥락에서 이야기될 때, 당시의 ‘자연스러운’ 대학 문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은 구술자가 당시의 문화, 당시의 자신과 거리를 두는 태도와 맞물린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이는 구술 상황에서 당시의 대학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 특히 20대 조사자들의 존재가 의식된 결과이기도 했다.</p>
<p>당시를 반복해서 ‘그때’로 칭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어떠하다고 이야기하는 대목들은 ‘지금 이야기하는’ 자신과 ‘이야기되는’ 자신, 당시에는 당연하게 속해있었던 문화로부터 현재의 자신을 분리하고 구분짓고자 하는 것이다. 이 ‘그때(는)’의 반복은 그저 지난날을 회고하는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기보다는 지금과 ‘그때’를 의식적으로, 꾸준히 분리하는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p>
<p>앞서 학생회 선배들과의 친분으로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 구술자A는 대학교 1학년 무렵 사수대의 ‘여성지킴이’ 활동을 했던 일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p>
<p>　</p>
<p>　　“그니까 이제 1학년인 우리가 바보짓을 한 거지.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따라갔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라요. (중략) 하이튼 뭐 밤새 얘기하고 아침에는 돌 깨러 가고, 그 꽃병도 갖다 나르고. 그, 이제, 교투를 하면 돌을 던져야 되니까. (중략) 근데 이제 이게, 제가 그때는 생각을 못 했는데 돌아서 생각해보니 선배들이, 그니까, 이제, 책이나 이 말로써 교양하고 학습하는 거보다는 이게 직접 자기가 당하면은 더 오기가 생기기 때문에 일부러 이제 그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놔둔 것 같아요. 체계도 없이. 그니까, 자기의 뜻을 가지고 나가든 아니든 일단 뭣도 모르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그래, 저는 그런 게 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 이후에 후배들하고 그런 거 할 때는 이런 거 다 위험하다, 그런 얘기를 항상 했었어요. 그리고 그때 89, 90 이런 선배들 굉장히 무자비했어요, 내가 봤을 때는. 무식했어.”<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p>
<p>　</p>
<p>위의 발언에 뒤이어, 함께 자리한 90년대 초반 학번 구술자B는 주로 여학생들의 가방에 유인물, 플랜카드 등 검문의 대상이 되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그것이 큰 문제였다고 평가한다.</p>
<p>　</p>
<p>　　“그니까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더 검문에 더 걸리기가 쉽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건데, 그렇게 해놓고 사실은, 뭐랄까, 약간 이제, A가 얘기한 것처럼 뭐, 진짜, 이건 이런 이런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고 그냥 했다는. 나는 그거 참 지금 생각해도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거 충분히 자기가 충분히 책임질 수 있고 하면 그 뒤에라도 선후배 관계로서 그 아이를 계속 챙겨주고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내가 했던 그 극심한 공포와 혼란과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했어야 되는데, 그 뒤에라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어했던 친구들도 있었어요.”<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p>
<p>　</p>
<p>이들 장면의 핵심은 사적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여있었던 ‘우리’의 근거가 회의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같은 학교, 같은 단위로 함께 활동하던 동료 학생 관계가 균질한 ‘우리’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의식이다. 이는 90년대와 2010년대 사이에 20여년의 간격이 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386의 건국신화’가 201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힘 있는 서사로 콘텐츠화되는<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 현실과 나란히 놓고 보면 더욱 분명하다.</p>
<p>90년대를 이야기하는 구술자들의 감각은 그것이 이야기된 2010년대 후반의 맥락 위에 있다. 이 거리감과 회의의 중심에는 젠더적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균질한 ‘우리’의 공고함은 특히 젠더적인 관점에서 크게 도전되기 시작하였다. 위의 장면들은 199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을 2010년대의 인터뷰 장면에서 소환할 때 구술자들에게 누적되어 온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경험들과 그를 통해 학습된 감각이 만들어낸 생경함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p>
<p>그리하여 이 말들은 그 순간 말하고 있는 현재의 구술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것으로 읽힌다. 거듭해서 당시의 어떤 것이 ‘이상했다’고 말하면서 더욱 그렇다.</p>
<p>　</p>
<p>　　“근데 선전을 참 잘하는 선배가 있었어요. 우리 89학번 선밴데 그 선배가 그때 선거 때니까 그런 게 일이 엄청 많으니까 칼로 뭘 자르고 이렇게 했었는데, 나이 많은 예비역 남자 선배가 나한테, 나는 그때 한 2학년 이때쯤인 것 같거든. 근데 그 선배가 ‘하, 쟤는 저런 것만 하고 있다’고. ‘저런 것만 잘하면 뭐하냐’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나한테. 나는 그게 이상했어요. 나는 저 선배가 하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남자 선배는 저 선배한테 저 일을 자기가 시키고 근데 저걸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는 거지. 그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나는 그때는 너무 이상했어요.”<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p>
<p>　</p>
<p>이 ‘이상함’은 구술자가 학생운동판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리라 선택한 장면에서의 지배적인 감정이기도 했다. 구술자는 친밀함을 근거로 유지되는 문화에서 관계와 신뢰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장면들을 회상한다.</p>
<p>　</p>
<p>　　“이거 뭐지? 나는 그때 그게 나한테는 좀 상처였어요. 이 사람들이 우리 연애에 관여를, 내 연애에 관여를 하면서 내 인생을 책임질 것처럼 말했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에 대해서……. 이상했었죠. (중략) 나는 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 아까 얘기했던 연애가 그런 식으로 깨지고 사람들에 대한 신뢰?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선배들에게.”<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p>
<p>　</p>
<p>‘운동’ 문화 전반에 대한 회의와 고민은 현재를 ‘○○ 이후’로 규정하는 현재 인식과 함께 등장한다. 이들에게 ‘지금’은 ‘촛불’ 이후, ‘강남역’ 이후로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다. 그리고 그 ‘다름’의 핵심은 젠더적 감각에 방점이 찍힌다. 아래의 구술들은 2016~2017년 촛불 광장에서의 ‘여성’ 이슈와 2016년의 ‘강남역’이 구술자에게 현재를 과거와 달리 규정하는 굵직한 계기들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와 같은 발화에는 사회운동을 젠더적 시각에서 조망하리라는 조사자들의 관심사가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겠으나, 해당 사건들이 구술자의 구술 전반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서사화되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p>
<p>　</p>
<p>　　“아, 진짜 지금 20대들은 좀 다르구나 이런 걸 느꼈어요. 내가 보기에는 사회적 풍토, 분위기를 타면서 사람들 속에 있던 게 쉽게 잘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20대, 거의 3포 세대잖아요. 돈 없으면 결혼 못하고. 막막하니까. 막 그런 게 반영이 되면서 자기 속에 있던, 왜 다 똑같이 살아야 되냐, 평등하지도 않은데. 이런 것에 대한 분노 에너지가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여성들은 그런 거 느끼잖아. 평등스럽지 못한 그런 거 느끼는데, 그게 인제 쉽게 드러날 수 있게 사회가 갈수록 어려지는 거지. 그런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중략) [2016-2017년 촛불시위 경험에 대한 구술] 보니까 맨날 마이크 잡고 주제 나오는 거 중에 촛불 주 내용 하나. 가다 보면 여성이 한 명 나와. 여성이 한 명 나오면 박근혜가 이제, 여성인지는 모르겠는데, 여자 대통령이잖아요. 여성 대통령이니까 이제 욕 자체가 이년 저년이잖아. 이년 저년부터 시작해서 여자가 잡으면 뭐 한다, 까지. 도를 지나치게 가니까 이제, 여성단체들이 ‘왜 박근혜를 욕하고 비판해야지 왜 여자를 욕하냐. 이게 너무 불편하다.’ 이런 내용 막 나왔고. 엄청 발언했던 거 같아. (중략) 우리 세대랑 다르구나, 이걸 느꼈지. 우리는 겉으로 평등화 되다 보니까 못 느끼고 이런 것도 있고. 그런 평등이라는 이름으로밖에 끌려나가서 일하는 데 지친 세대잖아요. 지친 세대고….”<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p>
<p>　</p>
<p>　　“강남역 그때, 강남역 살인사건 있었을 때 조직이 한 게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뛰어 가지고 했는데 사람들이 모이고 추모하고 이렇게 한 거잖아요. 그니까.”<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p>
<p>　</p>
<p>물론 90년대 학생운동 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2010년대에 들어서야 새로이 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당시에도 학생운동 문화를 되돌아보는 움직임들이 존재했다. 이미 운동의 내/외부에서 당대 학생운동의 공과와 전망을 논해왔으며, 1998년 출간된 <xref ref-type="bibr" rid="B013">『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xref><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은 90년대 후반까지 제기되어왔던 당대 학생운동의 문제점들을 집약한 성과물이었다. 나아가 2000년대 초반에 발표된 허나윤<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과 전희경<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의 연구는 90년대 당시의 비판의식에서 비롯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문제제기로, 운동 조직 내부의 ‘남성중심적’ 문화와 가치판단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p>
<p>그러나 2010년대의 구술에서 발견되는 회의는 ‘90년대 학생운동’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운동을 위해 조직되어 있었던 ‘우리’의 구성과 경계 그 자체에 관한 것이었고, 운동 조직 내부의 방법이나 방향성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조직화되어있었던 것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성찰은 당대 학생운동 세력이 ‘80년대의 것과는 달리’ 쇠퇴하게 된 원인을 진단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나 <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 2010년대의 구술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80년대 운동의 신화’에 인정투쟁하는 시각의 틀에 대한 비판적 거리감이며, 2010년대까지의 경험이 이들에게 지난날의 학생운동 경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사실이다.</p>
</sec>
</sec>
<sec id="sec003">
<title>3. 2010년대의 ‘대학’, ‘학생’, ‘학생운동’: 새로운 일상의 감각과 ‘다른’ 우리</title>
<p>2010년대에 들어서는 ‘대학생’을 공통의 정체성으로 하여 뭉치거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다. 실제로 지금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에 대한 자발성이나 그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10년대의 ‘학생운동’에는 따옴표(와 물음표)를 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학은 그야말로 ‘우연한’ 개인들의 집합이고, ‘학생’과 ‘운동’은 더 이상 이전의 의미로 독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p>
<p>2010년대 ‘젊은이’들의 결집에서 가장 특징적인 정체성이 있다면 ‘여성’일 것이다. 2015년의 메갈리아, 2016년의 강남역과 이화여대, 2018년의 혜화역이라는 표상들과 2018년의 ‘미투’, 2019년의 낙태죄 폐지 등 이슈는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추동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젊은이 ‘대학생’의 자리를 ‘여성’이 대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여성’들의 결집은 이전 시대의 시위나 운동과는 무척 다른 풍경들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p>
<p>마찬가지로, 시위에 결집한 ‘여성’들이 지난날의 ‘대학생’과 같이 조직화된 문화 속에서 일상적인 관계를 맺는 개인들의 집합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큰 특징은 조직화되지 않은 것, 사적 관계로 엮여있지 않은 것, 그리하여 ‘익명의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한 대학 내에서, 대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시위일지라도 그렇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가능한, 혹은 효과적인 시위 방법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로서 결집하는 것의 감각의 차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미리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또 검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p>
<p>이와 같은 시위의 새로운 풍경에는 시위에 참여한 개인들이 그간 한국 사회를 살면서 학습해온 감각들이 있다. 구술자들의 말 속에서 드러나는 시위 주변의 맥락과 감정, 동기는 이들의 일상적 감각을 이전 세대의 것과는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대체로 젠더적 문제의식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들은, 앞서 90년대 학생운동의 구술자들이 당시의 관계 문화와 균질한 ‘우리’에 회의를 드러냈던 장면들과 겹치며 기시감을 자아내기도 한다.</p>
<p>10년대 초반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구술자는 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편입을 마음먹게 된 계기로 단과대 학생회 조직에서 경험한 관계 문화를 이야기했다. 구술자의 생애 구술에서 ‘(어린) 여성’이라는 바깥의 시선은 구술자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증명하거나 펼쳐 보일 기회를 번번이 좌절케 하는 것이었는데, 대학 내 학생회 조직의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래와 같은 장면들은 구술자가 몸담고 있던 집단으로부터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벗어나리라 결심하는 결정적인 순간들로 의미화된다.</p>
<p>　</p>
<p>　　“생물학적 남자 꼰대 선배들이 너무 싫은 거예요. (중략) 제가 결정적으로 학교에 학을 떼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제가 스물 한 살때 엄마한테 말을 안 하고 단과대 이제, 학생회를 했는데, (중략) 저는 사무국, 그러니까 회장 부회장 바로 밑에, 사무국을 저는 하고 싶다고 얘길 했어요. 근데 그 나이 많은, 재수부심 부리는 ROTC 선배가, 넌 나이도 어리고 여자앤데 사무국은 당연히 내 거 아니냐는 식으로 얘길 한 거예요. (중략) 근데 거기서 뭐라 그래요. ‘너는, 새끼야, (웃음) 일도, 일도 안 해봤고 능력도 없으면서, 새끼, 씨.’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중략) 5월달에 체육대회를 했는데 저한테 그렇게 꼰대부심 부리는 선배들이 많은 거예요. 어리다고. 어리고, 여자애고, 얼굴 많이 못 본 애라고. (중략) 그래서 5월달에 체육대회 딱 하고, 제가 언니한테, 저 그만두겠다고. 저 휴학한다고, 이제. 학교에 더 이상 못 다니겠고, 장학금이고 나발이고 못 하겠다고. 원래 그, 학생회 하면 장학금 주잖아요. 아, 나는 못 받겠다. 그러고 그냥 휴학을 했죠.”</p>
<p>　　“그 정도로 힘들었어요?”</p>
<p>　　“힘든 것도 힘든 거고, 학교에 진짜 애정이 없다는 느낌?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어야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거예요.”<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p>
<p>　</p>
<p>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회의감은 물리적 생활 세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이들의 또 다른 일상 공간인 온라인에서 역시 무수한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은 굳이 ‘일베’ 류의 커뮤니티 게시판에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혹은 찾는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보편’의 용어였다. 유년기부터 온라인을 드나들며 이러한 ‘보편’을 경험해온 이들은 그 ‘보편’의 세계를 경계하는 것을 일상의 감각으로 체득했다.</p>
<p>　</p>
<p>　　“아니, 그러니까 김치녀, 된장녀 쓰듯이, 어. 보슬아치란 단어를 네이버 웹툰 창에서 봤던 거 같애. (중략) 근데 그것도 되게 많은 그, ‘좋아요’ 버튼과 함께. 근데 그게 저한텐 너무 충격적인 경험이었고, 그게 좀 막, 놀랍다가 아니라, 나도 저렇게 불리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내가 어차피 어떤, 여자로서 보지를 가진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인데, 그때 보슬아치, 보릉내, 뭐 이런, 하여튼 보지와 관련된 비속어가 되게 많았어요. 제가 피할 수 없는 영역의 욕들이잖아요. 내가 어차피 가지고 있는 것들이고.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 그게 너무 너무 무서웠고, 그래서 약간, 들으면서 되게 소름끼쳤어요. 소름끼쳤고, 근데, 그래서 그것, 그게 약간 일베에서 생산된 용어였는데, 어쨌든 남자들은 잠재적인, 다 일베(웃음)라고 생각을 해서, 그게 일베에서 시작됐지만 어쨌든 모두가 다 같이 쓰기 시작했단 말이에요.”<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p>
<p>　</p>
<p>이런 순간들의 누적은 개인들의 우연한 모임을 쉽사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 ‘예민한’ 감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경계나 불신, 자기방어 혹은 공격성으로 단순히 단정할 수는 없는 결들이 존재한다. 질문은 타인을 향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데, 이는 이들의 ‘예민함’이 오로지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내가 나로 살아가는’ 자존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p>
<p>　</p>
<p>　　(조사자)“최근의 페미니즘 이슈나 여성 이슈에 대해서는 계속 관심을 갖고 계시는 편이에요?”</p>
<p>　　(H)“관심을 갖고 있죠. 관심을 안 가지려 해도, 환경이(웃음), [F: 맞아.] 그렇다 보니. 제가 굳이 찾아 듣지 않아도 듣게 되는 거 같애요. 근데 참, (사이) 어, (사이) 알아서 고통스러운? (웃음) 그냥 모르고 그냥, 그런 갑다, 아, 그런 갑다도 아니죠. 그냥 모르고, ‘뭐야, 저 사람한테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편하게 살면 그렇게 살 수도 있잖아요. 근데 아니까 이제 다, 별 게 다…. 별 게 다가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다 아는 거예요. 그게 더 피곤하다고 느껴질 때도 사실 있는데, [조사자: 맞아요.] 어쩌겠어요. 이런 걸….”</p>
<p>　　(F)“알기 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p>
<p>　　(H)“그거는…. (웃음)”</p>
<p>　　(F)“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며칠 전에 술 먹으면서 이런 얘길 했었는데, 한땐 되게 무뎌지고 싶다가도 무뎌지는 게 되게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한,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면서 비판하고, 윤리적으로 소비하려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막, 생각하는 게 되게 피곤하잖아요, 사실. 나는 지금 경제적 독립이 어쩌고 저쩌고 이러고 있는데. 내 현생에 비해서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사실. 그래서 그런 감각을 좀 안 느끼고 싶다. 그래서 좀 무뎌졌으면 좋겠다, 라고 한편으로는 생각하다가, 또 그런 생각이 딱 들 때, 더 무뎌지면 내가 나인 게 없어지지 않나, 내가 지금까지 나로 살아왔던 그, 어떤, 부분들이 있을 건데, 그것들이 없어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문득 또 들면서. 무뎌지는 게 무서워질 때가 있는 거 같아요.”<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p>
<p>　</p>
<p>2010년대 ‘여성’들의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이의 자격조건이 미리 공표되는 감각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혜화역 시위’로 알려진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는 ‘생물학적 여성’만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방침 아래 진행되었는데, 이는 시위의 방침이자 누가 ‘우리’로 모여 한 목소리를 낼 것인지에 대해 미리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p>
<p>여기에서 ‘우리’의 경계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로도 분할되었지만 ‘정치질’의 여부로도 구분되었다. 또 하나의 주된 방침은 주최측의 공식적 구호 외에 시위 참여자의 독자적인 ‘정치적’ 발언을 제한하는 것이었는데, 어떤 이들은 존재 자체로 ‘정치질’하는 ‘외부세력’으로 규정되어 ‘우리’의 경계 바깥에 위치했다.<xref ref-type="fn" rid="fb031"><sup>31)</sup></xref> 시위 주변에는 ‘우리를 이용하는 꿘충’을 경계하는 담론들이 자리잡았다.<xref ref-type="fn" rid="fb032"><sup>32)</sup></xref></p>
<p>　</p>
<p>　　“혜화역 시위에서 거기서 7시까지 집회 신고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 6시 반부터 정리를 하는데, 그러니까 7시부터는 이제 거기서 “7시 이후의 시위는 가지 말아라. 모든 시위 참여자는 다 집에 가라.”라고 한 거예요. 해산하라고, 완전히. 왜냐면은 7시부터가 민우회 집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꿘충’이고.”</p>
<p>　　“가지 말라고 한 건 누구예요?”</p>
<p>　　“스탭들.”</p>
<p>　　“주최 측에서?”</p>
<p>　　“어. 주최 측들이. ‘절대로 가지 말아라.’하고.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이 다 ‘오키오키.’로 동의하는. 왜냐면 ‘꿘충이고 민우회 시위다.’ 이렇게 하니까 ‘어. 맞다. 가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근데 저는 그래서 민우회의 맥락을 잘 몰랐어가지고, ‘아니, 왜? 뭐 저렇게까지 민우회 꿘충이라고 싫어하지?’ 했는데, 이제 이 사람들이 공유하는 게 그런 거예요. 메갈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민우회에서 돈을 몇 번 먹튀를, (중략) 그런 식으로 몇백만 원을 이렇게 쓰니까 여성들이 ‘아니, 이 돈 쓰는 방식이 우리가 돈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깨끗하지 못한, 투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성운동이라고 지원을 해줬더니 요런 식으로 하나?’ 그래서 ‘이게 다 꿘충들이 하는 짓이다.’ 라고 된 거예요. ‘아, 기성세대가 이딴 식으로 해서 여성 운동이 안 바뀌었구나.’ 그래서 딱 이렇게 분할하는,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은 거예요. ‘저런 꿘충들 우리랑은 상종 안 한다. 쟤네는 돈독 올라가지고 우리를 이용해먹지.’”<xref ref-type="fn" rid="fb033"><sup>33)</sup></xref></p>
<p>　</p>
<p>거꾸로, 그렇게 구성되는 ‘우리’의 경계를 질문하여 그것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리라고 결정하는 감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위에서 주장하는 바나 그 효과에 대한 입장과는 별개로, 이 ‘우리’의 구성 방식에 대한 회의는 스스로의 자기 규정과 정체성과 직접 맞닿은 주제로서 그 자체로 선택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p>
<p>　</p>
<p>　　“저는 혜화역 시위가 생물학적 여성만을 환영을 한다고 하여 그 기치에 반대하여 나가지 않거든요. (중략) 어, 그 혜화역 시위는, (사이) 뭐랄까. 저는, 제 정체성을 아직 확정 지은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진짜, 정말 내일 아침에 갑자기 눈 떴는데 막, 정말 운명의 여자를 만나서 제가 제 스스로 퀴어로 재정의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열려 있는 것들에 대해서 닫아놓고 싶지 않아서 그게 심정적으로 동조가 안 되는 것도 있는 것 같고.”<xref ref-type="fn" rid="fb034"><sup>34)</sup></xref></p>
<p>　</p>
<p>　　(H)“혜화역 시위는, (사이) 어, 모르겠어요. 제가, 좀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거 같아요. ‘어, 나 래디컬인가? 그건 아닌 거 같애.’ 이런 느낌?”</p>
<p>　　(조사자)“그걸 보면서?”</p>
<p>　　(H)“네. 그러니까, 약간, ‘저 사람들과 내가 같은가?’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들 말에, 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거, 저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해서 저들의 행동에 동참할 수 있는가?’ 그거에 대한 의심이 계속 들어서, 그래서 자꾸, 이거, 내가 나가는 시위가 맞는 건가. [F: 주저가 있는 거지.] 네. 이런 거에 대해 주저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는데, 그 근본적인 것 외에, 그, 혜화역 시위는 훨씬 더 결이 다양하고 복잡하고 내가 이거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해서 ‘오케이, 나 가.’ 이런 느낌이 딱 안 드는 거 같애요. 그게 참 미묘한, 아,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네. 그냥 그런 느낌. 동조해서 간다, 이런 게, 까지가 안 오는.”<xref ref-type="fn" rid="fb035"><sup>35)</sup></xref></p>
<p>　</p>
<p>　　“저는 광화문 시위에도 한 번도 안 갔어요. (중략) 저는 그 시위가, 그러니까, 제가 그 시위에 나가, 뭐라 그래. (사이) 여성들을, 여성혐오적인 표현으로 시위, 박근혜를 비판하는 거가 되게 불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어, 음, (사이) 그랬어요. (웃음) 그래서, 그래서 그 감각도 있었어. ‘과연 나는 저 사람들이 인정해줄 수 있는 국민인가? 저렇게 이야길 하고, 저렇게, ‘암탉이 울면 세상이 망하고’ 이런 식의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명 더 가서 화력을 보태준다고 저 사람들이 고마워나 할까?’ 혹은 뭐 그런 식의 감각들? 그래서 저는 거기 나가는 게 정말 내키지가 않았고, 정말 가고 싶지가 않아서, 안 갔어요.”<xref ref-type="fn" rid="fb036"><sup>36)</sup></xref></p>
<p>　</p>
<p>이러한 ‘우리’ 경계에 대한 질문과 구성 방식은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들 개인 간의 ‘같음’보다는 ‘다름’을 대전제로 삼는다. 이들에게 ‘우리’는 애당초 서로 같아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단일한, 그러나 ‘확실한’ 공통성을 붙들고 그것을 수행(perform)하는 것에 가깝다. 이 ‘확실한’ 공통성의 기준이 삶의 다양한 맥락과 상충하여 모순을 자아내곤 하는 것, 자신들의 주장에서 모든 ‘정치성’을 부정하는 포즈를 취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깨닫지 못하거나 자기 주장의 정치성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수한 ‘다름’들을 하나로 모아 ‘단일한’ 목소리로 만든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xref ref-type="fn" rid="fb037"><sup>37)</sup></xref></p>
</sec>
<sec id="sec004">
<title>4. 2010년대에 ‘학생운동’ 질문하기</title>
<p>지금의 맥락에서 2016년의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이하 ‘미라대 시위’)를 2010년대의 ‘학생운동’으로 소환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색한 일일지 모른다. 혹자가 이를 두고 ‘그게 무슨 학생운동이냐’라고 할 때, 이 말은 여러 방향으로 독해될 수 있다. 강조점을 학생‘운동’에 두면, 위의 말은 이 시위가 ‘운동’이라고 일컬을 만큼 지속적인 활동이나 경향성을 지닌 것이었냐는 질문으로 읽힌다. ‘학생’에 강조점을 두면, 이들을 종래의 ‘학생운동’ 개념에서의 ‘학생’으로 칭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된다. 대학의 학내 이슈로 학생들이 모여 오랜 기간 시위를 한 사건이지만, 오늘날의 맥락에서는 그것을 ‘학생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개운하지 않다. 어느 쪽이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기존의 ‘학생운동’의 틀로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p>
<p>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 조사는 1990년대의 그것과는 다른 결의 조심스러움 위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경험은 구술자 본인에게도, 그리고 구술 내용에 등장하는 이들에게도 현재적인 이슈였으며 따라서 이를 또 다른 타인인 연구자 앞에서 발화한다는 일 자체가 일종의 자기평가 혹은 타인에 관한 평가와 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때문에 그 경험을 구술하는 일은 구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어려움과 긴장, 즉 자신에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혹시나 이 말이 그 자리에 있었던 전체를 대변하는 말하기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말하는 일 자체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을지 하는 조심스러움 위에 이루어졌다. 이는 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 구술의 특성을 규정하는, 이전과는 다른 ‘우리’, ‘나’의 감각과도 관련되는 어려움이었다.</p>
<sec id="sec004-1">
<title>4-1. “당연히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title>
<p>‘미라대 시위’ 참여 경험에 관한 구술에서, 개개인의 시위 참여 경험은 사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이야기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리라 마음을 먹게 된 순간이 선명한 장면으로 구술되었다는 점과도 연관되는데, 참여를 결심한 장면에 타인의 존재나 개입은 없고, 오히려 주변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시위의 문제의식에 자신이 완전히 납득하게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게 이야기되었다.</p>
<p>　</p>
<p>　　“제가 이, 정유라, 사실 저는 약간 그런 거에 무뎠거든요? 무뎠다고 해야, 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막 분노하는 것만큼 저는 그런 감정이 그 당시에는 없었던 게, (중략) 그게 저 개인한테는 되게 큰 일로 다가오진 않았단 말이에요. 근데 10월 중순 쯤에, 중간고사 기간 즈음에 ECC에 자보가 하나 크게 붙었는데, 그 자보가, 시작이, ‘나 오늘도 밤 샜다’였었어요. (중략) ‘어디선가 말을 타고 있는 너에게.’ 그러면서 자보가 붙었고, (사이) 그리고 마지막이 이제, ‘우리는 모두에게 공정한 이화를 꿈꾼다.’였어요. 그 자보가 너무 크게 와가지고, 저한테. (중략) 그러니까 그런 공동체에 대한, (사이) 어떤, 어, 그런 생각? 그리고, 음, (사이) 아, 내가 되게, 이 사건을 되게 가볍게 보고 있었구나 하는 그런 부채감도,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고.”<xref ref-type="fn" rid="fb038"><sup>38)</sup></xref></p>
<p>　</p>
<p>그리하여, 이 시위의 장면들에서 ‘우리’는 종전의 학생운동에서 ‘우리’와는 다른 순서로 꾸려졌다. 말하자면 ‘우리끼리 마음이 맞아 시위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위에 나갔더니 아는 애들이 나와있었던’ 것이다.</p>
<p>　</p>
<p>　　“음, 그래서 막, 어디로 오세요, 해가지고 어디로 갔어요. 갔는데, (웃음) 동기들이 싹 가 있는 거예요. (웃음) [F: 웃음] 과 동기들이. (웃음) 그러니까 처음엔 무서웠거든요, 약간? (중략) 약간 무서웠는데,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갔는데, 너무 다…. 그날, 알려지면,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된다, 이래서 다 마스크 쓰고 다 선글라스 끼고 했었는데, 너무 친하니까 다 알아본단 말이에요. (웃음)”<xref ref-type="fn" rid="fb039"><sup>39)</sup></xref></p>
<p>　</p>
<p>나아가, 시위는 그저 사적 관계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사적 관계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위가 한창이라 학내의 가장 큰 이슈가 본관에서의 시위였던 시기에도, 아주 친밀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시위 참여 사실은 언급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p>
<p>　</p>
<p>　　(조사자)“여름에 학교에서, 본관에서 일이 있었다는 걸 다들 의식하는 분위기였어요?”</p>
<p>　　(H)“(사이) 네.”</p>
<p>　　(F)“응.”</p>
<p>　　(H)“의식했던 거 같애요. 근데 의식한 것과, 말로, (사이) 말로 크게 떠벌, 그러니까 크게 얘기하고 다니는 거는 다른 거죠. (중략) 친구들끼린 다 알아요. 예를 들면 제 동기들 같은 경우에는, 이미 본관에서(웃음) [F: (웃음) 많이 봤으니까.] 본관에서 많이 봤고. (중략) 그게 아니라, 뭐, 수업에 만난, 타과생? 뭐, 약간 이런, 제가 본관에 오나 안 오나를 알 수 없는 친구한테는 그런 거를 말하기가, 내가 간다는 걸 표현하기 조심스러워하는. 다들 그냥 그런 분위기.”</p>
<p>　　(중략)</p>
<p>　　(조사자)“이런 얘기를 나눌 기회는 있었어요? 시위에 대해서, 시위 이후의 평가나, 뭐,”</p>
<p>　　(H)“어, 사실 그 시위가 끝나고 나서는, (사이) 뭐라 하지?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 모이세요, 하진 않잖아요.’ (웃음) [F: 맞아. (웃음)] 당연히 그럴 순 없는 거고. (중략) 당연히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여서 다 같이 평을 한다던지, 그런 거는 없었어요.”<xref ref-type="fn" rid="fb040"><sup>40)</sup></xref></p>
<p>　</p>
<p>이러한 지점들은 90년대 학생운동 문화에서 ‘우리’가 구성되었던 양상과 선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위 인용 부분의 “당연히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라는 말과, 앞서 90년대 학생운동에 관한 구술에서의 “어차피 똑같은 사람들이니까….”라는 말의 대조가 이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자의 발언이 당시 학생운동 문화가 이념과 활동, 사적 관계등을 포함한 일상의 연장이나 다름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전자는 시위의 시공간은 그것이 일상의 현장에서 이루어질지언정 일상적인 대학 생활과는 구분된 것이었음을 뜻한다.</p>
<p>이때의 ‘우리’에는 시위의 시공간에서만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간 체득한 ‘예민함’의 감각과 궤를 같이 한다. 누적된 경험으로부터 예상되는 공격과 위험이 있었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 시위의 대원칙이 되었던 것이다.</p>
<p>시위 과정과 이후의 구술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것은 예상되는 위험에 미리 대비하려 했던 노력과, 현실이 된 예상들을 마주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했지만 시위 현장 사진을 두고 외모 평가를 하거나 ‘이돼생’이라는 멸칭을 붙이는 댓글들을 마주했던 일, 총학생회 구성원들이 총학의 이름으로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총학생회장이 특수감금 혐의로 기소된 일,<xref ref-type="fn" rid="fb041"><sup>41)</sup></xref> 수강과목 교수가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교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는지를 확인하며 노심초사해야 했던 일, 사건 2년여 뒤 방영된 드라마에서 흡사한 시위 진압 장면이 경찰의 고충을 말하는 장면으로 등장했던 일<xref ref-type="fn" rid="fb042"><sup>42)</sup></xref> 등은 모두 시위에서 누구도 특정되거나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단호히 고수해야 했던 근거였다.</p>
<p>이는 앞서 밝혔듯 이 인터뷰 작업 내내 이어진 긴장감과도 관계되는 것이었다. 구술되고 있는 경험이 현재적인 이슈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구술자들은 자신이 거기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그 사건의 ‘당사자’로서 발화할 ‘자격’ 내지는 ‘권리’가 과연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sec>
<sec id="sec004-2">
<title>4-2. 질문의 틀과 해석의 권한: “그래서 시위는 누가 했나?”</title>
<p>시위를 주도한 것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는지를 묻고 평가하는 일은 오늘날의 시위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누가 했다’는 인식의 틀로 사건에 접근할 때의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시위의 주체는 학생인가, 운동권인가? 대중인가, 아니면 엘리트인가? 의사 결정 과정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었는가? 어떤 전략은 유효했고, 어떤 전략은 아니었는가? 그래서 전체 운동의 지형과 노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아닌가?</p>
<p>여기에는 말하자면 운동 주체와 시위의 ‘정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질문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은 시위 현장에서 ‘우리’로 모이기 전에 그들이 사실은 ‘누구’였는지, 누구였기 때문에 ‘어떻게’ 한 것인지,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시위의 장면에서, 시위로 뭉친 ‘우리’ 이전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우리’도 영속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면면이 어떠하든 그들이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따라서 스스로 표방한 것 이외의 다른 누구라고 짐작되거나 해석되지 않는 일, 그리하여 자기 행위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지키는 일이었다.</p>
<p>그리하여 질문되어야 하는 것은 이 ‘우리’는 왜 필요한지, 사건을 ‘누가 한’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누구의 시선에 의한 것인지다. ‘교과서에 한 장 실리면 참 영광스러울 수도 있지만 (…) 크레딧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라는 말로 드러나듯, 단순히 사건의 가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10년대의 시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누구에게, 왜 중요한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p>
<p>구술자들의 말로부터는 자신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거나, 소비되거나, 소모되기를 반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자기 해석의 권한을 스스로가 틀어쥐고 있다는 감각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운동 경험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그들의 개인적 삶에서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생운동 경험 주변에 있는 이들의 개인사는 자기 스스로 자신에 관한 해석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경험, 어떤 장소에서든 그저 대상화되어 온전한 발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경험으로부터 누적된 감각으로 채워졌다.</p>
<p>이들의 결집과 ‘운동’의 방식은 이런 감각을 누적해온 저마다의 개인적 경험 위에 있다. 의심과 불신, 반문, 여러 겹의 방어는 과잉으로 치부되곤 했으나 누적된 일상의 감각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타의에 의해 ‘누구’로서 규정되거나 해석되는 일은 그 감각을 침해당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고, 타인이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우리’라는 선언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p>
</sec>
</sec>
<sec id="sec005">
<title>5. 나오며</title>
<p>2017년 6월은 내게 낯선 들뜸의 분위기로 기억된다. 탄핵 이후 ‘촛불의 승리’라는 고양감은 5월의 대선을 ‘정의 구현’의 종착점과 같이 의미화했고, 이어진 6월은 30주년을 맞은 87년을 현재 다다른 종착점의 시작점으로 기념하는 행사들로 넘쳤다.</p>
<p>2017년 6월 9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추모문화제’는 85학번인 배우 박철민과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의 공동 사회로 진행되었다. 16년의 이화여대와 촛불을 87년의 연장으로, ‘자랑스러운’ 하나의 역사로 묶어낸 기획이었다. 그러나 87년부터 16년까지의 모든 ‘주역들’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고, 사실상 행사는 ‘87년의 주역들’을 위한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입시 비리와 총장 사퇴를 소재로 ‘이화여대’에 대한 몇 번의 떨떠름한 농담이 오가고, 거기에 웃고 맞장구치는 사람들을 멀찍이 지켜보기를 또 몇 번 하고 나니 그제야 내가 이 광장에서 겉돌고 있었음이 새삼스러워졌다. 이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 계속해서 맴돌았던 이유이다.</p>
<p>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의 구술자들은 누군가의 고정된 정체성, 입장, 위치, 좌표에 질문을 던진다. 어떤 스펙트럼 위에서 어떤 고정된 좌표에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는 일, 그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것을 의심하게 한다. 자신의 위치를 고정된 어딘가로 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역시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를 것임이 분명한 이들과 자신을 섣불리 ‘우리’로 묶을 수는 없는 일상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p>
<p>그런 점에서 고정된 좌표의 문제는 그 좌표를 찍을 수 있는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양하냐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스펙트럼이 얼마나 세밀하고 다양하건 간에, 어떤 고정적 좌표 위에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는 일 자체가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2010년대의 운동은 이런 질문을 일상적으로 체화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이들의 ‘우리’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되어온 것임을 보여준다.</p>
</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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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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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id="fb001"><label>1)</label><p>한국에서 ‘학생운동’은 그 연원을 1910년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서 찾거나 (<xref ref-type="bibr" rid="B006">김재경, ｢한국학생운동과 사회변동｣,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1996, 125쪽</xref>) 본격적 대두를 1960년대로 보는 등(<xref ref-type="bibr" rid="B016">최문성,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 『한국정치연구』 12권 1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3, 122쪽</xref>) 주체와 범주의 규정이 다양하다. 본고에서 다루는 199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은 그 시기 으레 ‘학생운동을 했다’고 할 때 상정되는 것과 같이 대학생이 대학 내의 조직(총학생회, 단과대, 학과, 동아리 등)의 일원으로 참여한 운동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2010년대의 운동은 대학 내에서 학내 의제로 이루어졌을지언정 ‘학생운동’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관련 내용은 후술한다.</p></fn>
<fn id="fb002"><label>2)</label><p>최문성은 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를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주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로 진단한다. (<xref ref-type="bibr" rid="B016">최문성,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 『한국정치연구』 12권 1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3</xref>)</p></fn>
<fn id="fb003"><label>3)</label><p>1996년 8월 한총련 범민족대회가 개최되고 있던 연세대학교 주변을 대규모 병력이 원천봉쇄하여 5일간 교내의 학생들이 농성하며 대치한 사건으로, ‘연세대 사건’, ‘한총련 사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총련과 학생운동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xref ref-type="bibr" rid="B019">안진걸, &#x003C;1996년 8월 연세대에 있었던 이들에게&#x003E;, 『한겨레』, 2016.8.15</xref>)으로 이야기되며 90년대 학생운동의 ‘퇴조’를 불러온 대표적인 계기로 평가된다.</p></fn>
<fn id="fb004"><label>4)</label><p>김경환은 80년대 대학생들이 “‘미래’가 보장된 사회의 엘리트”로서 ‘예비노동자’로 불렸던 반면 90년대 후반 ‘청년실업’등이 화두가 된 이후의 대학생들에게는 “학생운동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학생들의 ‘일상’은 각박해졌다”고 말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2">김경환, ｢대학생들에게 학생운동은 매력적인가?｣, 『월간말』 2007년 3월호, 2007, 141쪽</xref>)</p></fn>
<fn id="fb005"><label>5)</label><p><xref ref-type="bibr" rid="B020">&#x003C;‘1996년 연세대’에서…. 20년 만의 편지&#x003E;, 『한겨레』, 2016.10.13.</xref> 실제로 많은 구술자들은 90년대 학생운동 경험에 관한 구술을 제안받고 이전에는 한 번도 당시를 떠올리거나 언어화한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p></fn>
<fn id="fb006"><label>6)</label><p>다만 본고에서 출신 대학이나 구체적인 학번 등 구술자에 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밝히지 않는 것은 구술자의 신상을 보호하려는 목적뿐 아니라 신상 정보에 관한 더욱 구체적인 제시가 발언의 신뢰성을 담보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며, 아래 인용될 구술 자료에서 중요한 것이 경험의 사실성 혹은 대표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보다는 경험에 관한 구술로부터 드러나는 일상적 감각을 포착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p></fn>
<fn id="fb007"><label>7)</label><p>최승원은 IMF를 전후한 90년대의 대학에서 대학생층의 자기규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80년대의 대학자율화정책 이후 대학 교육의 대중화, 1997년 IMF로 촉발된 경제위기와 취업난 등 변화된 사회구조는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규정하고 사회문제나 학생운동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학점이나 취업준비에 골몰”(13쪽)하게끔 한 조건이었다. (<xref ref-type="bibr" rid="B017">최승원,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위기와 대응-신 유형의 참여자와 운동 변화｣, 『사회연구』 2권 2호, 한국사회조사연구소, 2009</xref>)</p></fn>
<fn id="fb008"><label>8)</label><p>이러한 특징은 구술 내용 뿐 아니라 인터뷰의 섭외 과정과 구술 주변의 맥락에서도 나타난다. 구술자들은 ‘내가 적절한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거절하거나, 인터뷰를 수락하면서도 ‘나보다 더 적절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별로 한 게 없다’는 등의 말을 거듭하며 자신이 인터뷰의 대상이 될 만큼 ‘대단한’ 동기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경향은 주제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인터뷰이에게서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나, 8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에 대한 인터뷰와 나란히 놓고 볼 때 90년대 학생운동 구술에서 유의미하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했다.</p></fn>
<fn id="fb009"><label>9)</label><p>2018년 1월 16일, A(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0"><label>10)</label><p>2018년 1월 16일, A(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1"><label>11)</label><p>2018년 1월 16일, A(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2"><label>12)</label><p>2019년 2월 22일, B(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3"><label>13)</label><p>2019년 2월 20일, C(남,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4"><label>14)</label><p>최승원은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적인 특성으로 비공식적 사회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미시동원(micro-mobilization)’을 언급한 바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17">최승원,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위기와 대응-신 유형의 참여자와 운동 변화｣, 『사회연구』 2권 2호, 한국사회조사연구소, 2009, 10쪽</xref>)</p></fn>
<fn id="fb015"><label>15)</label><p>2019년 2월 20일, C(남,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6"><label>16)</label><p>2019년 2월 20일, C(남,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7"><label>17)</label><p>2018년 1월 16일, A(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8"><label>18)</label><p>2018년 1월 16일, D(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19"><label>19)</label><p><xref ref-type="bibr" rid="B008">손희정, ｢촛불혁명의 브로맨스-2010년대 한국의 내셔널 시네마와 정치적 상상력｣, 『민족문학사연구』 68권, 민속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8</xref>.</p></fn>
<fn id="fb020"><label>20)</label><p>2018년 1월 16일, D(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21"><label>21)</label><p>2018년 1월 16일, D(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22"><label>22)</label><p>2018년 1월 18일, E(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23"><label>23)</label><p>2018년 1월 18일, E(여, 4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24"><label>24)</label><p><xref ref-type="bibr" rid="B013">이후,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도서출판 이후, 1998</xref>.</p></fn>
<fn id="fb025"><label>25)</label><p><xref ref-type="bibr" rid="B018">허나윤, ｢199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 ‘위기’ 담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xref>.</p></fn>
<fn id="fb026"><label>26)</label><p><xref ref-type="bibr" rid="B014">전희경, ｢사회운동의 가부장성과 여성주의 정체성의 형성｣,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xref>.</p></fn>
<fn id="fb027"><label>27)</label><p>‘민중정치 실현의 대장정 학생연합’은 학생운동이 퇴조한 90년대와 달리 ‘80년대 운동의 신화’는 운동의 중심 의제가 ‘대학인들’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진단 아래 당대 학생운동의 한계는 90년대가 ‘개별·고립화된 대중·개인’의 시대라는 것에 있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고착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보다 삶의 의제와 밀착된 발전된 대중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중정치 실현의 대장정 학생연합, ｢학생운동, 그 우울한 자화상을 넘어서기｣, <xref ref-type="bibr" rid="B009">이재원 외,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2–학생운동의 감추어진 일상문화』, 도서출판 이후, 1998</xref>)</p></fn>
<fn id="fb028"><label>28)</label><p>2018년 6월 19일, F(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29"><label>29)</label><p>2018년 5월 28일, G(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0"><label>30)</label><p>2019년 3월 10일, F(여, 20대)씨·H(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1"><label>31)</label><p>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활동가가 여러 가지 고민에도 불구하고 “주최는 주체를 아우르는 단위가 아니”라는 생각에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에 참여했다는 후기를 인터넷에 업로드한 일이 있었다.(&#x003C;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를 다녀와서&#x003E;,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홈페이지(<uri>http://transgender.or.kr</uri>) ‘활동 후기’ 게시판.) ‘조각보’ 트위터 계정에서 해당 후기의 링크를 게재한 트윗에는 ‘FtM이나 MtF나 상관 없이 참여 기회를 달라는 정치질이다’, ‘굳이 단체 이름을 걸고 나왔다’는 비판의 트윗이 다수 달렸는데, 이들 트윗에서 해당 활동가의 시위 참여는 ‘외부세력’과 ‘꿘’의 개입과도 같은 맥락에서 독해되었다.</p></fn>
<fn id="fb032"><label>32)</label><p>이처럼 ‘외부세력’의 개입을 경계하고 정치적 발언을 제한하는 등 시위의 ‘확장’을 경계하는 태도에는 다단한 배경이 존재한다. 고병진은 워마드와 TERF 운동에서 ‘여성’의 경계를 설정하고 ‘비-여성’, ‘꿘충’, ‘퀴어 남성’을 배제한 맥락에 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이 삭제되고 진보정당의 ‘여성혐오’ 사건들이 불거지는 등 진보 운동권 내의 ‘여성혐오적’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xref ref-type="bibr" rid="B001">고병진, ｢연대 거부를 통한 ‘여성’ 경계의 획정–메갈리아 분열 이후 워마드와 TERF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23-37쪽</xref>)</p></fn>
<fn id="fb033"><label>33)</label><p>2018년 5월 28일, G(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4"><label>34)</label><p>2018년 6월 19일, F(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5"><label>35)</label><p>2019년 3월 10일, H(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6"><label>36)</label><p>2019년 3월 10일, F(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7"><label>37)</label><p>김리나는 워마드의 오프라인 액티비즘 전략에서 ‘여성’범주가 호명되는 것이 ‘여성’을 그 자체로 실재하는 정체성으로 여기기보다는 사회 구조 내의 개인들을 ‘여성’으로 범주화하고 익명적 타자로 연결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워마드를“의인화된 개별적 주체가 결집한 커뮤니티로 상상하는 것은 이들의 액티비즘을 이해하는 데 제한을 가져온다”(133쪽)는 것이다. 워마드의 액티비즘 전략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으로“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계획이다.”가 제시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xref ref-type="bibr" rid="B003">김리나, ｢메갈리안들의 ‘여성’ 범주 기획과 연대–‘중요한 건 ‘누가’ 아닌 우리의 ‘계획’이다.｣, 『한국여성학』 33권, 한국여성학회, 2017</xref>)</p></fn>
<fn id="fb038"><label>38)</label><p>2019년 3월 10일, F(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39"><label>39)</label><p>2019년 3월 10일, F(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40"><label>40)</label><p>2019년 3월 10일, F(여, 20대)씨·H(여, 20대)씨 구술 자료.</p></fn>
<fn id="fb041"><label>41)</label><p>“농성에 참여한 학생들은“우리는 주동자나 대표자가 없다”고 밝혔지만 경찰은 최씨가 감금을 주도했다는 교수 등의 진술을 받았다.” (<xref ref-type="bibr" rid="B021">&#x003C;이화여대 총학생회장, ‘교직원 감금’ 혐의 검찰 송치&#x003E;, 『경향신문』, 2016.11.24</xref>)</p></fn>
<fn id="fb042"><label>42)</label><p><xref ref-type="bibr" rid="B022">&#x003C;tvN ‘라이브’, 이화여대에 ‘시위 진압 장면’ 사과&#x003E;, 『연합뉴스』, 2018.3.23.</xref></p></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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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고문헌</title>
<ref-list><title>1. 논문과 단행본</title>
<!-- 고병진, ｢연대 거부를 통한 ‘여성’ 경계의 획정-메갈리아 분열 이후 워마드와 TERF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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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1</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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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고</surname><given-names>병진</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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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8</year>
<source>연대 거부를 통한 ‘여성’ 경계의 획정-메갈리아 분열 이후 워마드와 TERF를 중심으로-</source>
<publisher-name>이화여자대학교</publisher-name>
<comment>석사학위논문</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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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환, ｢대학생들에게 학생운동은 매력적인가?｣, 『월간말』 2007년 3월호, 2007, 139-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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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2</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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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경환</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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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7</year>
<article-title>대학생들에게 학생운동은 매력적인가?</article-title>
<source>월간말</source>
<volume>2007년</volume><issue>3월호</issue>
<fpage>139</fpage><lpage>145</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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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리나, ｢메갈리안들의 ‘여성’ 범주 기획과 연대-‘중요한 건 ‘누가’ 아닌 우리의 ‘계획’이다｣, 『한국여성학』 33권, 한국여성학회, 2017, 10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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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3</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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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리나</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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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7</year>
<article-title>메갈리안들의 ‘여성’ 범주 기획과 연대-‘중요한 건 ‘누가’ 아닌 우리의 ‘계획’이다</article-title>
<source>한국여성학</source>
<publisher-name>한국여성학회</publisher-name>
<volume>33권</volume>
<fpage>109</fpage><lpage>140</lpage>
<pub-id pub-id-type="doi">10.30719/JKWS.2017.09.33.3.109</pu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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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리나, ｢온라인 액티비즘으로 재구성되는 ‘여성’ 범주와 연대-‘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사례｣,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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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리나</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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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7</year>
<source>온라인 액티비즘으로 재구성되는 ‘여성’ 범주와 연대-‘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사례</source>
<publisher-name>이화여자대학교</publisher-name>
<comment>석사학위논문</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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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원, ｢80년대에 대한 ‘기억’과 ‘장기 80년대’-지식인들의 80년대 해석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36호,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9-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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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원</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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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5</year>
<article-title>80년대에 대한 ‘기억’과 ‘장기 80년대’-지식인들의 80년대 해석을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한국학연구</source>
<publisher-name>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publisher-name>
<issue>36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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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경, ｢한국학생운동과 사회변동｣,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1996, 125-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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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김</surname><given-names>재경</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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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한국학생운동과 사회변동</article-title>
<source>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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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강형준, ｢[선택]문화현상｣, 『문학동네』 23권 3호, 문학동네, 201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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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선택]문화현상</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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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문학동네</publisher-name>
<volume>23권</volume><issue>3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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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희정, ｢촛불혁명의 브로맨스-2010년대 한국의 내셔널 시네마와 정치적 상상력｣, 『민족문학사연구』 68권, 민속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8, 521-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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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손</surname><given-names>희정</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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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8</year>
<article-title>촛불혁명의 브로맨스-2010년대 한국의 내셔널 시네마와 정치적 상상력</article-title>
<source>민족문학사연구</source>
<publisher-name>민속문학사학회</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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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68권</vol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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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원 외,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2–학생운동의 감추어진 일상문화』, 도서출판 이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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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재원</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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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1998</year>
<source>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2–학생운동의 감추어진 일상문화</source>
<publisher-name>도서출판 이후</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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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지행</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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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6</year>
<article-title>이대 본관 점거시위 리포트</article-title>
<source>여성이론</source>
<publisher-name>여성문화이론연구소</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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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창언</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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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5</year>
<article-title>한국 학생운동의 연구 경향과 과제에 관한 연구–연구방법론을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역사연구</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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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이</surname><given-names>현재</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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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6</year>
<article-title>86일간의 농성, 이화인을 변이시키다</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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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문화과학사</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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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후,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도서출판 이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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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b>이후</collab>
<year>1998</year>
<source>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source>
<publisher-name>도서출판 이후</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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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희경, ｢사회운동의 가부장성과 여성주의 정체성의 형성｣,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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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전</surname><given-names>희경</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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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사회운동의 가부장성과 여성주의 정체성의 형성</source>
<publisher-name>연세대학교</publisher-name>
<comment>석사학위논문</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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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영,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조직자들의 ‘외부세력’, ‘운동권’ 배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21』 16, 책갈피, 2016, 5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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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정</surname><given-names>선영</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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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6</year>
<article-title>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조직자들의 ‘외부세력’, ‘운동권’ 배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article-title>
<source>마르크스21</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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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문성,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 『한국정치연구』 12권 1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3, 119-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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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3</year>
<article-title>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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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publisher-name>
<volume>12권</volume><issue>1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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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원,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위기와 대응-신 유형의 참여자와 운동 변화｣, 『사회연구』 2권 2호, 한국사회조사연구소, 2009, 10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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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urname>최</surname><given-names>승원</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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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9</year>
<article-title>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위기와 대응-신 유형의 참여자와 운동 변화</article-title>
<source>사회연구</source>
<publisher-name>한국사회조사연구소</publisher-name>
<volume>2권</volume><issue>2호</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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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윤, ｢199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 ‘위기’ 담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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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0</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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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이화여자대학교</publisher-name>
<comment>석사학위논문</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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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ist><title>2. 기타자료</title>
<!-- 안진걸, 〈1996년 8월 연세대에 있었던 이들에게〉, 『한겨레』, 201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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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1996년 8월 연세대에 있었던 이들에게</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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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연세대’에서…. 20년 만의 편지〉, 『한겨레』, 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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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1996년 연세대’에서…. 20년 만의 편지</article-title>
<source>한겨레</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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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교직원 감금’ 혐의 검찰 송치〉, 『경향신문』,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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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이화여대 총학생회장, ‘교직원 감금’ 혐의 검찰 송치</article-title>
<source>경향신문</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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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라이브’, 이화여대에 ‘시위 진압 장면’ 사과〉, 『연합뉴스』, 201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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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tvN ‘라이브’, 이화여대에 ‘시위 진압 장면’ 사과</source>
<publisher-name>연합뉴스</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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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를 다녀와서〉,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홈페이지(http://transgender.or.kr) ‘활동후기’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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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를 다녀와서</source>
<comment>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홈페이지(<uri>http://transgender.or.kr</uri>) ‘활동후기’ 게시판</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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