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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title>T&#x26;I REVIEW</journal-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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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n pub-type="ppub">2233-9221</is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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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r-name>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연구소</publisher-name>
		<publisher-name xml:lang="en">Ehwa Research Institute for Translation Studies</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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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id pub-id-type="publisher-id">tnirvw_2020_10_1_185</article-id>
		<article-id pub-id-type="doi">10.22962/tnirvw.2020.10.1.008</articl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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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Research Article</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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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title>한불문학번역에서 자가번역 현상 </article-title>
			<subtitle>-최윤의 「갈증의 시학」의 경우-</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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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title>Auto-translation in Korean-French literary translation: With an emphasis on Ch’oe Yun’s “Poetics of Thirst”</tran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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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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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lume>10</volume>
		<issue>1</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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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statement>&#x00A9; 2020 by ERITS All rights reserved. Published by Ewha Reseach Institute for Translation Studies.</copyright-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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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alic>This paper explores the hypothesis that translation by the author, who is aware of the meaning even before it was expressed in language, would improve the outcome of literary translation. Auto-translation – wherein the author’s bilingual proficiency plays a substantial role – is relevant to authors writing in non-central languages in terms of literary recognition and accumulation. Auto-translation allows the author to rewrite the original according to their initial intentions and aims into the target language. As such, it is associated with deverbalized meaning from the interpretive theory of Translation studies as well as the theory of rewriting. This paper seeks to adapt these theoretical reflections into the French translation of Korean literature through the analysis of Ch’oe Yun’s “Poetics of Thirst”. Analysis demonstrates that Ch’oe Yun’s translation produces a text in the target language that retains linguistic equivalence, thereby making it a variation that enhances French readability, rather than generating another original that contains the aims the author had prior to writing the original text. (GSTI of Ewha Womans University, South Korea)</italic>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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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d><bold>auto-translation</bold></kwd>
			<kwd><bold>self-translation</bold></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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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제어</title>
		<kwd>자가번역</kwd>
		<kwd>자기번역</kwd>
		<kwd>이중어 글쓰기</kwd>
		<kwd>다시쓰기</kwd>
		<kwd>탈언어화된 의미</k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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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 id="sec001" sec-type="intro">
	<title>1. 서론</title>
<p>문학작품의 번역은 관습적인 언어 처리 과정 후에 원래 텍스트의 ‘목소리’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결과가 항상 최상의 것은 아니라고 존 버거는 에세이에서 적고 있다. “왜냐하면 번역은 두 언어들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짓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써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이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xref ref-type="bibr" rid="B009">Burger 2017: 8</xref>). 이 작업이 최상의 결과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가 글을 쓰기 이전, 단어 이전의 상태로 존재하는 그 무엇,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아직 언어가 되기 이전의 그 무엇을 이해하고 전유하여 재표현으로 산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의미가 시니피앙을 아직 부여받지 않고 개념 또는 이미지, 비언어적 상태로 존재하는 과정을 번역학에서는 ‘탈언어화(déverbalisation)’<xref ref-type="fn" rid="fb003"><sup>3)</sup></xref>라고 정의한다. 비언어적 형태의 의미는 번역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포함한 예술작품의 생산 과정에서 논의되기도 한다.</p>
<p>주네트는 텍스트 또는 예술작품의 의미와 그 구현에 대해 삼각형 모델을 제시하면서 삼각형의 좌변에 ‘제작(exécution)’, 우변에 ‘명시 또는 외연화((dé)notation)’, 그리고 꼭짓점에 ‘내재(immanence)’라는 항을 둔다(<xref ref-type="bibr" rid="B029">Genette 2010: 184</xref>). 버거의 삼각형에서 ‘언어 이전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내재’한, 아직 언어의 형태로 발현되지 않은 작품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p>
<p>한 작품에서 내재한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는 이는 물론 작가 자신일 것이다. 애초의 의미,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 언어화되지 않은 의미, 탈언어적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작가이며, 그가 이중언어자라면 그 언어 이전의 뜻을 어떻게 다시 표현해야 할지를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자가번역을 연구한다면 문학번역의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본 논문의 가정 중 하나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번역하게 되면, 언어의 형태를 갖지 않은 의미에 등가의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어떠한 처리를 하는지, 어떻게 원작을 다루는지, 그대로 도착어로 옮기는지 아니면 원전을 변형하는지, 왜 변형하는지, 어떻게 변형하는지 등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그 결과물을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 ‘작가 번역본(traduction auctoriale)’은 작가에 의한 글이므로 또 다른 원전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은 아닌지와 같은 질문도 가능하다. 주네트는 “B텍스트와 그 텍스트에 선행한 모든 A텍스트와의 관계를 하이퍼텍스트성”(<xref ref-type="bibr" rid="B028">1982: 12</xref>)이라고 규정짓는다. 하이퍼텍스트는 이전 텍스트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변형을 거쳐 생산된 것을 의미한다.</p>
<p>이처럼 자가번역을 거친 결과물은 원작과 번역작품 사이에서 경계가 불분명하므로 언어적인 요소가 다를 뿐 둘 다 원작에 해당하며 ‘번역’과 ‘이중어 글쓰기’는 상호관련성을 지니므로 둘 중 한 가지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xref ref-type="bibr" rid="B008">전현주 2015: 165</xref>). 우스티노프(<xref ref-type="bibr" rid="B035">Oustinoff 2001: 7-12</xref>)는 작가가 직접 수행한 번역에 대해서 ‘번역’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좋은지 자문하는데, 그 이유는 번역과정에서 작가가 개작을 하는 부분이 커지는 경우, 최초의 원작과 작품이 달라지며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작품 사이의 등가성의 문제와 처리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자가번역은 결국 문학번역이 갖는 다양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p>
<p>특히 이런 현상은 얼핏 보기에 글쓰기와 번역작업이 근접해 보이는 데서 기인한다. “두 작업이 유사해 보이는 것은 언어에 대한 작업이자 작품의 관념을 전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서로 전도된 작업이기도 하다. 번역가는 작가가 작성한 것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xref ref-type="bibr" rid="B017">Berthin et al. 2018: 13</xref>).</p>
<p>글쓰기와 번역의 관계에 대해, 번역을 수행했던 작가들의 글을 참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경우 자가번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작가로서 글을 쓸 때와 번역가일 때 문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앙드레 테리브(André Thérive)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어들을 다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 그리고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손실 없이 전달하는 것으로, 작가가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쓸 때의 표현을 추구하는 것이다.”</p>
<p>그런데 글의 저자가 아닌 번역자가, 작가가 글을 쓸 때처럼 의미와 감성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원작이 내포한 의미와 형태에 의지해야 한다. 일반번역가는 이해와 해석의 과정을 통해 원문의 뜻, 작가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여야 하며 재표현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작가와 동일한 권위와 주관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제약도 가지고 있다.</p>
<p>주관적인 글쓰기의 영역인 문학번역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은 번역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자가번역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의미를 구현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문학번역에서의 등가 구현 방법에 도움을 줄 것이다. 아울러 번역자가 작가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재표현의 과정에서 다시 쓰기를 시행할 수 있을지 등, 번역가의 입지와 권리에 관한 질문도 가능하다. 특히 작가 스스로 번역을 시행한 나보코프(Nabokov)의 경우, 번역을 “손실이나 획득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고, 보상이나 협상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번역이라는 형태의 극단적 읽기의 체험을 수용하고, 독자로 하여금 번역자와 함께 번역된 텍스트라는 특별한 체험을 하기를 권유”한다(<xref ref-type="bibr" rid="B026">Dosse 2016: 411-412</xref>). 번역을 또 다른 독서로 간주하는 경우 번역의 평가에 대해서 새로운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즉 <xref ref-type="bibr" rid="B026">도스(2016: 414)</xref>가 말한 대로 “번역은 원전에 비해 열등하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며, 등가의 것도 아니고, 단지 다를 뿐”이라는 입장이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 “자가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다언어 글쓰기의 경우, 일반적인 번역과 달리 손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원문에 비해 과잉이 발생한다. 자가번역은 영구적인 의미의 부과가치를 생산”(<xref ref-type="bibr" rid="B017">Berthin et al. 277</xref>)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p>
<p>작가가 번역에 임하게 되면, 원작의 내용에 변화 추구를 비롯, 도착어의 특성을 고려한 언어, 문화적인 요소의 첨삭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가 번역은 도착어로 오히려 확장이 되는 셈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문학의 프랑스어 자가번역 사례를 분석하여 번역 주체에 따라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p>

</sec>
<sec id="sec002">
<title>2. 자가번역의 현상</title>
<p>이중언어자인 작가들만이 가능한 번역작업이므로 흔히 언어교육이 발달하고 국제화된 현대에만 시행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자가번역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활발하게 진행되었고(<xref ref-type="bibr" rid="B001">김욱동 2012: 24</xref>)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번역방식이다. 자가번역이 진행되는 동인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다. 중세 시대는 다언어주의 시대(Kappler &#x26; Thiolier-Méjean 2008: 172)였고 지식의 유통을 위해 라틴어로 소통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다양한 저작들이 지역어, 토착어(vernaculaire)로 저술된 후 소통을 위해 작가에 의해 라틴어 등으로 번역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작가 등 지식층이었으므로 자가번역이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었고, 일종의 협력번역 형태도 발달되어 작가와 번역가가 번역 텍스트 생산에 협조하는 공역의 형태도 있었다(<xref ref-type="bibr" rid="B027">Ferraro &#x26; Grutman 2016: 142</xref>). 근대국가 형성과 국민언어 확립 이후에는 작가들이 자국의 언어로만 작품을 쓰게 되고 번역에 더욱 엄격한 기준들이 적용되면서 주로 전문 번역가가 번역을 하는 풍토가 형성됐다. 20세기 들어 베케트, 나보코프, 유르스나르(Yourcenar), 낸시 휴스턴(Nancy Houston) 등이 실천한 번역작업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번역하는 방식 또는 번역가와의 협업 등의 양상으로 진행됐다. 극단적으로는 협업 번역가가 채택한 표현을 원본에 수용하는, 번역원본이 원래의 원본을 변형시키는 양태도 나타난다. 이렇듯 다채로운 현상에 대해 우선 정의를 살펴본 뒤 발생 환경, 결과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p>
<sec id="sec002-1">
<title>2.1. 자가번역의 정의</title>
<p>Routledge Encyclopedia of Translation Studies(라우트리지 번역학 백과사전, <xref ref-type="bibr" rid="B016">Baker ed. 1998: 17</xref>; <xref ref-type="bibr" rid="B003">한국어판 2009: 44</xref>)은 자가번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p>
<p>　</p>
<p>　　<bold>자가번역(auto-translation)</bold> 혹은 <bold>자기번역(self-translation)</bold>은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번역하는 행위 혹은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을 말한다. [...]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가번역 작가 중에는 한 개 이상의 언어를 통달하지 못했으면서도 한 개 이상의 언어로 창작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종종 있었다.</p>
<p>　</p>
<p>자가번역은 진행되는 시점, 번역자와의 협업 여부, 그 협업의 공개 여부, 시행되는 지역 등에 따라 더욱 구체적으로 구분된다(<xref ref-type="bibr" rid="B016">Baker ed. 1998:20</xref>; <xref ref-type="bibr" rid="B003">2009: 47</xref>).</p>
<p>　</p>
<p>　　(원전의 초판 집필과 번역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bold>동시적 자가번역(simultaneous auto-translations)</bold>과 (원전 퇴고나 출판 이후 번역 출판이 이루어지는) <bold>지연된 자가번역(simultaneous auto-translations)</bold>은 근본적으로 다르다.</p>
<p>　</p>
<p>원작과 동시에 진행되는 자가번역은 이중언어 글쓰기 영역에 들어가는 것으로, 작가가 동일한 내용을 동시적으로 2개 이상의 언어로 저작하는 형태이다. 지연된 번역, 또는 순차번역이라고 부르는 범주는 전자보다는 더 일반화된 방식으로, 경우에 따라 시차가 수년 이상일 수도 있다. 시차의 여부를 구분하는 이유는 원문과 번역문 작성이 동시적인 경우 작가가 동일 내용을 서로 다른 언어 표현으로 적을 것이라는 추정이 더욱 가능하며, 시간 간격이 벌어지는 경우 작가가 내용 또는 표현을 손질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언어가 상호간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파악하여도 여전히 가장 까다로운 문제가 남아 있다. 작가가 이전 작품에 이미 언급한 내용을 굳이 외국어로 다시 집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xref ref-type="bibr" rid="B016">Baker ed. 1998:18</xref>; <xref ref-type="bibr" rid="B003">2009: 45</xref>). 왜 일부 작가가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른 언어로 다시 적는지에 대해서는 뒷부분의 이론 고찰에서 살펴보기로 한다.</p>
<p>동시적 이중언어 글쓰기의 경우 자기번역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지 않은지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욱동(2012)</xref>은 ‘자기번역’이라는 표현으로 ‘auto-translation’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특히 동시적 자기번역에 대해서 작가가 두 언어로 작품을 쓸 때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쓰기에 용이하다는 점, 자기번역을 퇴고나 작품의 연장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순차번역의 경우 <xref ref-type="bibr" rid="B035">우스티노프(2001: 111)</xref>가 ‘창조적 자가번역(auto-traduction (re)créatrice)’이라는 표현하에 작가의 도착어로의 원작 개정이나 다시쓰기 작업을 분석한 바 있다. 김욱동의 논문에서 ‘지연된 자기번역’이라는 용어로 표현된이 번역의 대표적인 예는 베케트의 『머피(Murphy)』로, 1938년 영어본을 저술한 후에 출판이 용이하지 않자 우선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경우이다. 나보코프의 자가번역 역시 대부분 순차번역에 해당된다. 본 연구에서 동시적 번역이 ‘자기번역’에 더 가깝다고 보는 이유는, 작가가 동시에 2개 이상의 언어로 작품을 쓰는 상황이라면 어떤 원문을 번역한다기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른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과 창작의 경계가 모호한 이 현상에 대해 번역학적 접근을 하는 만큼, 번역작업에서의 전문성과 직업적인 면을 담아내는 표현이 자가번역이라고 생각하여 본 논문에서는 이 용어를 유지하기로 한다.</p>
<p>번역가와의 협업 여부 역시 자가번역을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독자적 자가번역, 번역가와 협업으로 진행하는 유형, 또는 번역가의 작업을 검토하는 방식 역시 자가번역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도착어를 아는 작가가 번역에 깊이 참여하게 되면 번역이 아닌 두 번째 원작의 생산이 될 수도 있다. 역으로 번역가의 작업을 “단순히 번역이 아닌 제2의 원작에 참여하는 작가의 작업”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xref ref-type="bibr" rid="B034">Munier 1998</xref>). 바스넷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작가와 번역가 간의 협업이 존재했으며, 이는 번역이 글쓰기에 대한 협상과 다시쓰기 과정이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힌다. 작가의 외국어 능력과 번역 관여도에 따라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이 가능하다(<xref ref-type="bibr" rid="B034">Munier 166</xref>). 우선 전형적인 번역 협력으로, 작품이 출판되고 난 뒤에 외국어를 아는 작가가 번역에 도움을 주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와 번역가는 동일한 국가에 거주하지 않는다. 다음은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Guillermo Cabrera Infante)가 최근에 사용한 용어이기도 한 ‘면밀한 협력(closelaboration)’의 형태로, 작가와 번역가 간에 지속적이며 밀접한 협력이 진행되는 관계를 말한다. 유르스나르와 그레이스 프릭(Grace Frick)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마지막은 조력을 받는 번역으로, 가장 일반적인 자가번역의 형태이기도 하다. 작가와 번역가가 문화, 문학, 언어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공유하며 번역을 진행하는 경우이다. 조이스(Joyce), 나보코프, 하이네(Heine), 파울 첼란(Paul Celan)의 경우가 그러하다. “번역가는 원문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도착어 국가 문학체제의 수용을 위해 이데올로기와 문화적인 제약을 고려하는 공동작가”라고 보는 입장이다(<xref ref-type="bibr" rid="B038">Sperti 2017: 142</xref>). 조이스의 경우 번역자인 니노 프랑크(Nino Frank)가 먼저 이탈리아어로 읽으면서 해석을 하면 조이스가 해당 부분의 다양한 뜻을 밝히고 언어유희 등을 이탈리아어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p>
<p>발표된 작품이 원작인지 번역작인지, 작가가 번역을 수행했는지가 출판물에 표시가 되었는지의 여부 역시 자가번역을 분류하는 방식에 포함된다. 낸시 휴스턴 같이 본인의 작품을 영어 또는 프랑스어 방향으로 계속 번역하는 경우에도 원어가 어떤 언어인지에 대한 표식 없이 출판되기도 한다. 작가와 번역자, 원작의 언어와 번역의 언어를 명확하게 표시하는지에 따라 투명한, 또는 불투명한 자가번역으로 구분된다. 나아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이 말한 ‘자서전의 규약(pacte autobiographique)’처럼 ‘자가번역의 규약’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연구자도 있다(<xref ref-type="bibr" rid="B027">Ferraro 2016: 121-40</xref>). 곁텍스트에 자가번역의 표식이 전혀 없을 때를 ‘0도의 규약(pacte zéro)’으로 하며 표식의 가시성과 독자에 대한 공개 내용에 따라 등급을 정하는 방식이다.</p>
<p>마지막으로 자가번역이 이뤄지는 환경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이산 현상 등으로 인해 해외에 체류하게 된 작가가 해당 국가의 언어로 작품을 쓰고 모국어로 번역을 하는 경우를 외재적 자가번역으로, 내국에서 도착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내재적 자가번역으로 구분한다. 탈식민환경에서 모국어가 아닌 정복자의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모국어로 번역을 시도하는 작업들은 내재적 번역에 포함된다. 이처럼 자가번역은 언어환경적인 요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자가번역을 유발하는 요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p>
</sec>
<sec id="sec002-2">
<title>2.2. 자가번역의 발생과 양상</title>
<sec id="sec002-2-1">
<title>2.2.1. 자가번역 발생의 배경</title>
<p>자가번역은 단순히 작가의 이중언어 능력 외에도 사회, 문화적인 요소가 깊이 관여되는 현상이다. 작가의 개별적인 경향과 문화, 사회, 역사적인 맥락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문학적인 이유에서이다. 밀란 쿤데라를 비롯한 일부 작가들은 번역가의 작업을 못 미더워하여 직접 글을 쓰는 동시에 자가 번역을 하거나, 자가번역을 퇴고나 작품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xref ref-type="bibr" rid="B001">김욱동 2012: 29</xref>). 쿤데라는 체코어에서 프랑스어 번역에 직접 참여하여 자가번역을 하며 이 번역본을 해외 번역본의 기준본으로 채택하여 판권계약을 하고 있는 독특한 경우이다. 또 이중언어 작가들은 두 언어 중 한 언어를 선택한 경우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두 개의 언어로 모두 집필하려는 경향이 있음도 밝혀졌다.</p>
<p>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표적인 이유는 더 많은 독자에게 작품을 정확하게 알리려는 욕구일 것이다. 특히 더 권위 있는 문학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욕구에서 작가가 직접 번역을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와 더불어 후기 식민지 상황에서의 정치적 이유도 고려할 수 있다. 케냐의 응구기 와 티옹오(Ngũgì wa Thiong’o)처럼 키쿠유어와 스와힐리어를 모국어로 가진 작가가 영어로도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이다(<xref ref-type="bibr" rid="B001">김욱동 2012: 28</xref>). 실제로 상당수 작가들이 카탈루냐어에서 카스티야어, 게일어에서 영어, 벵갈어에서 영어, 아랍어에서 프랑스어로 자가번역을 한다.</p>
<p>대표적인 자가번역의 예인 나보코프의 경우 프랑스어와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을 하던 번역가로, 푸슈킨(Pushkin)의 작품을 영어로 소개하기도 했다(<xref ref-type="bibr" rid="B026">Dosse 2016: 340</xref>). 나보코프는 더 국제적인 언어인 영어로 번역을 할 때는 러시아어의 흔적이 최대한 포함이 되게 하여, 영어로 자연스럽지 않거나 흔히 사용되지 않는 어휘들을 찾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xref ref-type="bibr" rid="B026">Dosse 2016: 348</xref>).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어가 획득언어이기 때문에 모국어 방향의 번역만큼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즉 외국어 방향 번역이라는 방향성에 관해서도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1939년에 번역과 창작의 언어의 방향을 바꿔, 『롤리타(Lolita)』의 경우 영어로 저작된 다음 러시아어로 자가번역이 진행됐다. 영어권 독자들은 나보코프를 냉철하며 현학적인 글쓰기의 작가로 알고 있으나 러시아어권 독자들은 낭만적인 작가로 인식하고 있어, 작가가 언어 방향에 따라 채택한 글쓰기 및 번역방식이 이러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나보코프는 환언적인 번역을 원문에 대한 자유로운 번역으로, 어휘나 단어 중심의 번역을 중간 단계의 번역으로, 직역을 가장 오리지널한 번역으로 평가했다. 특히 1940년대 이후 번역방식이 급변하여, 주로 직역으로 진행을 하되 원문의 등가를 구현함에 있어서 작품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그 개별적인 독서의 의미를 도착어로 구현하려는 방식을 취했다(<xref ref-type="bibr" rid="B026">Dosse 2016: 376</xref>). 특히 푸슈킨을 번역할 때, 작품의 의미를 고정하여 그 의미나 효과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 내에서 어떻게 그런 효과를 유발하는 표현을 구현하였는지를 보여주려고 시도한 듯하다. 즉 존 버거가 말하는, 작품이 쓰이기 이전의 상태, 잠재적 의미의 상태에 도달한 흔적을 번역으로 구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나보코프가 일반 번역가가 아닌 작가이며, 나아가 자가번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p>
<p>이 현상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부분의 자가번역이 주변언어에서 중심언어 쪽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xref ref-type="bibr" rid="B027">Ferraro &#x26; Grutman 2016: 12</xref>). 루이-장 칼베(Louis-Jean Calvet)가 발전시킨 언어의 중력모델은 세계의 다양한 언어가 중앙에 위치한 대표적인 소통언어와 주변지역에 위치한 사용자가 적은 언어로 배치되어 은하계와 상동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한편 파스칼 카사노바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 정치적 자본의 장의 논리를 언어와 문학의 장에 적용한 연구에서 번역을 통한 교류에 대해 분석한다(Bourdieu 2001; <xref ref-type="bibr" rid="B021">Casanova 2008</xref>). 국제 문학교류 역시 칼베의 중력모델에 따르기 때문에 언어 및 문학자본을 많이 구축한 중심언어 방향으로 번역이 이루어진다. 카사노바는 문학소통이 중립적이며 공정한 교류나 거래가 아니라 불평등한 교류임을 밝히고, 이런 번역의 범주에 자가번역도 포함시킨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중심언어에서의 문학적 인정과 문학자본의 축적이라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xref ref-type="bibr" rid="B020">카사노바(2002)</xref>는 ‘축적으로서의 번역(traduction-accumulation)’과 ‘인정으로서의 번역(traduction-consécration)’을 구분하며, 전자의 경우 중심언어에서 주변언어로, 후자의 경우 주변언어에서 중심 언어로 주로 진행됨을 밝힌 바 있다. 통계에 의거한 이런 연구들은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서 번역과 자가번역이 불평등한 교류의 기제”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일단 ‘출발어의 언어-문화, 문학’과 ‘도착어의 언어-문화, 문학’은 드물게 대칭적이며 대부분은 불균형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두 세계 간의 번역은 이 불균형을 전달 또는 가속화하는 기제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축적’과 ‘인정’의 두 기능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축적으로서의 번역은 유통성이 활발하고 문화와 문학을 인정받았으며 언어적으로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의 문학을, 주변부 언어와 문학환경에 도입, 이식하는 작업으로, 공히 국제적 작품으로 알려진 고전 및 현대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을 가리킨다. 국내의 경우 다양한 세계문학전집의 번역 및 주요 현대 작가들의 번역이 이에 해당된다. 세계 문학의 순기능은 해외의 다양한 작품들이 국내 작가나 독자들에게 상상력과 인문학적 교양을 북돋아 준다는 점이며, 역기능은 민족문학이나 전통담화의 형식이 약화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인정으로서의 번역은 주변부 언어문화권에서 자주적으로 문학번역을 진행하여 더 발달한 언어, 문화, 국가의 인정을 추구하는 현상으로, 주요 언어권 국가의 문예지, 언론, 각종 국제적 포상제도 등이 인정의 주체가 된다. 카사노바는 번역의 ‘축적’과 ‘인정’의 역할이 종국적으로 지배적인 언어를 지닌 국가에 유리함을 지적하는데, 지배적 문학이 피지배 국가의 문학을 변질시키며 균일화하는 한편으로는 피지배 국가의 우수한 문학들이 번역되어 창조적인 작품이 축적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자본화’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 문화권의 작품은 가시성을 얻고 인정을 받게 되는 대신 독립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권에서 인정받기 위해 해당 언어문화의 규범에 맞는 창작방식을 적용한다든가, 지배권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인정에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 등이 가능하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해외의 대표적인 언어, 문화권에 소개함으로써 한국문학작품이 세계 문학의 은하에서 가시성을 갖도록 노력 중인 한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정밀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내 자가번역의 현실을 살펴보도록 하자.</p>
</sec>
<sec id="sec002-2-2">
<title>2.2.2. 한국문학에서 자가번역 발생의 배경</title>
<p>한국문학에서 자가번역은 무엇보다도 역사,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어의 사유를 한자로 표현하던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 식민 치하에 놓인 한국의 문인 상당수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국어 금지 상황에서 일본어나 한자로 저작 활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한국어로 작품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후세대의 작가들이 작품 저작을 위해 김수영처럼 “일본어로 쓰인 것인데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우리말로 옮겨” 싣거나, “한 편의 시를 쓰기에 앞서 그것을 머릿속에서 구상할 때 이렇게 쓰면 되겠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상은 일본어로 연락되고 조직”(한수영 2014: 342)되는 문제를 겪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자기번역의 문제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주체’의 형성과정과 그 결과를 ‘언어’ 매개로 검토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며, [...] 전후세대의 대부분의 시들은, 이런 ‘보이지 않는’ 자기 번역의 과정의 소산물”(한수영 2014: 343-346)이다. 전후세대 문인들의 상황은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사정으로 해외에 이주한 이산작가들의 경우에도 해당이 된다.</p>
<p>김용익은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자료집』(연합통신 발간, 영문판)에 김은국, 강용흘 등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작가로 언급되어 있다. 네이버 인물정보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미국에서 영어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꽃신(The Wedding Shoes)」이 1956년 미국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에 게재된 후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발표된 작품들 역시 한국적인 깊은 슬픔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되어 ‘마술의 펜’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일부 작품은 미국 중등교과서에 게재되었으며, ‘최고의 미국 단편(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에서 외국인이 쓴 우수 단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김용익은 “한국적 소재를 영어로 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의 문화번역을 한 작가이다. 여기서 번역이란 언어간 번역이 아니라 생각을 글로 ‘전이한다’는 의미이다. [...] 한국어로 구상한 다음 작가의 머릿속에서 영어로 번역하며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xref ref-type="bibr" rid="B014">한미애 2014: 309</xref>). 구상한 언어와 표현한 언어의 기법이 혼종된 영어 원천 텍스트가 있고, 귀국 후 자가번역으로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들이 있다. 한국어 번역의 경우 역으로 영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의 혼종이 발생하는 이산작가들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와 번역작업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p>
<p>안정효의 경우 이산작가는 아니지만 국제적 인정을 위해 영어로 자가번역을 진행한, 내재적 자가번역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은마는 돌아오지 않는다』를 Silver Stallion으로 번역하여 영어권 출판계에서 인정을 받은 예가 있다.</p>
<p>동시대에 프랑스어권에서는 이청준 등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던 최윤이 작가로 등단 이후 본인의 작품을 자가번역한 예가 있다. 이 경우도 내재적 자가 번역이며, 문학소통언어로의 인정을 위한 번역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뒷부분의 자가번역 현상 분석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p>
</sec>
</sec>
<sec id="sec002-3">
<title>2.3. 자가번역의 과정</title>
<p>자가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작가가 번역을 진행하므로 표현 이전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통번역과정에서 나타나는 탈언어화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작가가 직접 번역을 하는 경우와 제3의 번역가가 번역하는 경우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이해의 과정에서 발생할 것이다. 원작자는 어떤 의미로 그 글을 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탈언어화해서 다른 언어로 표현을 하기만 되는 것이다. 반면 번역자의 경우, 의미의 탈언어화된 상태를 얻기 위해 해당 작가, 작품, 배경, 작가의 문체 등 다양한 비언어적 지식도 동원하여야 할 것이다. 번역자에 따라 의미를 포착 또는 축소, 확대하게 되는 현상이 예상되지만 제3의 번역가라고 해서 반드시 이해가 미비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학번역사에는 번역작품이 원작에 더 풍성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은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원작의 저술에 사용한 언어가 아닌 언어로 다시쓰기 작업을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p>
<p>텍스트의 의미를 번역가가 탈언어화 상태로 수용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언어로 뜻을 표현하기 이전 단계와 같은 상태의 의미를 인지한 것이 된다. 다시 말
해 존 버거가 권장하는, 형태 이전의 뜻에 도달한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그 의미에 형태를 입히는 과정, 즉 표현하는 과정이 번역이라고 한다면 번역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p>
<p>프루스트(Proust)는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에서 문학의 가장 큰 포부는 진정한 삶을 번역하여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라고 화자를 통해 이야기한다.</p>
<p>　</p>
<p>　　(...) soit quand, flatté d’être bien reçu chez les Guermantes, et d’ailleurs un peu grisé par leurs vins, je n’aie pu m’empêcher de dire à mi-voix, seul, en les quittant : « Ce sont tout de même des êtres exquis avec qui il serait doux de passer la vie », je m’apercevais que, pour exprimer ces impressions, pour écrire ce livre essentiel, le seul livre vrai, un grand écrivain n’a pas, dans le sens courant, à l’inventer puisqu’il existe déjà en chacun de nous, mais à le traduire. Le devoir et la tâche d’un écrivain sont ceux d’un traducteur.<xref ref-type="fn" rid="fb004"><sup>4)</sup></xref></p>
<p>　　게르망트 공작 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은 데다 그 댁에서 마신 좋은 와인에 약간 취해서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댁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어쨌든 정말 멋진 사람들이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즐거울 것 같은 사람들이지.” 그리고 정말 본질적인 책, 진정한 유일한 책은, 위대한 작가가 흔히 말하듯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각자의 속에 있는 것을 번역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책무와 작업은 번역가의 그것이기도 한 것이다.</p>
<p>　</p>
<p>프루스트의 문학세계에서 현실은 작품으로 재현되었을 때만 존재한다. 작가가 해석하여 재표현을 하였을 때만 현실은 진정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현실을 어떻게 재표현할 것인가는 글쓰기의 문제이다. 이 부분은 작가와 번역가의 관계, 번역과 자가번역의 관계의 함수를 푸는 열쇠일 수도 있다. 문학번역은 무엇보다도 문학의 영역이며 글쓰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가번역에서 작가가 탈언어화된 의미를 다시쓰는 방식은 타자에 의한 문학번역에 주요한 단서를 마련해 주는 셈이다. 여기에서 다시쓰기 이론에 근거하여 자가번역 방식의 재표현을 조명해 보도록 하자.</p>
<p>르페브르에 따르면 “번역은 원문의 다시쓰기”이며, “모든 다시쓰기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사상과 시학을 반영하며, 따라서 모든 다시쓰기는 문학을 조작함으로써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한다”(<xref ref-type="bibr" rid="B032">Lefevere 1992: vii</xref>). 다시쓰기가 “조작을 하기도 하며, 그 조작이 효과적”(<xref ref-type="bibr" rid="B032">Lefevere 1992: 9</xref>)이라는 발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쓰는 이들(rewriters)”은 특정 작가, 작품, 시대, 장르, 심지어 문학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론 르페브르가 말하는 다시쓰기는 번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론, 서평, 어린이들을 위한 각색, 선집 구성, 만화 혹은 텔레비전 영화 제작 등, 텍스트가 동일 언어 내에서 또는 다른 언어나 매체로 가공되는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다(<xref ref-type="bibr" rid="B030">Hermans 1999: 127</xref>).</p>
<p>두 언어, 두 국가의 문화적, 사상적 경계에 선 채로 원문의 다시쓰기를 시도하는 번역가는 경우에 따라서 조작을 감행하기도 한다. 출발어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하게 도착어 텍스트로 옮겨놓는 것은 위에서 말한 제약들로 인해 때로 불가능해 보인다. 번역가는 자신의 해석(앞서 말한 탈언어화로도 설명할 수 있다)을 통해 저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출발어 텍스트와 동일한 효과를 줄 수 있는 도착어 텍스트를 완성하려 한다. 이때 필요에 따라 원전의 문학적 맥락, 이데올로기, 언어적 특성 등이 도착어 독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p>
<p>자가번역의 경우 원문의 의미와 의도를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저자가 직접 번역자가 되어 다시쓰기를 하게 되므로 당연히 그 결과물 역시 원전에 버금가는, 또는 원전과 다름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언급하기도 했다. 손나경은 번역을 다시쓰기로 보는 것은 원저자성(authorship) 등 번역을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xref ref-type="bibr" rid="B004">2008: 62</xref>). 다시쓰기 개념의 등장으로 번역본이 원문이 가진 원저자성과는 또 다른 원저자성을 가진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독자적으로 혹은 협력에 의해 자가번역을 수행하여 생산된 텍스트의 경우 또 다른 원전의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을 아닌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불문학번역에서는 자가번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이 가능할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p>
</sec>
</sec>
<sec id="sec003">
<title>3. 작가이자 번역가인 최현무/최윤의 자가번역 연구</title>
<sec id="sec003-1">
<title>3.1. 한불문학번역에서 자가번역</title>
<p>한불문학번역에서 자가번역 사례는 매우 드물게 관찰된다. <xref ref-type="bibr" rid="B001">김욱동(2012: 23)</xref>이 지적한 대로 “자가번역은 단일언어보다는 이중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로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문인들 가운데 자신의 작품을 직접 번역할 만큼 완벽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수학한 소설가 하일지의 경우, 프랑스어로 쓴 시들을 모아 『내 서랍 속의 제비들(Les Hirondelles dans mon tiroir)』이라는 제목으로 파리에서 시집을 출간했고, 2002년과 2003년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소설 『진술』을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으나 실제로 출간에 이르지는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중·단편소설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최윤은 국내 작가로는 극히 예외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직접 옮긴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가번역가로서의 최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평론가, 학자, 작가로서의 여정을 짧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p>
<sec id="sec003-1-1">
<title>3.1.1. 번역가, 작가, 자가번역가로서의 최현무/최윤</title>
<p>최윤은 1978년 『문학사상』에 첫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분석-허윤석의 소설을 중심으로 한 시론」을 최현무라는 본명으로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프랑스에서 5년 동안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83년부터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서 재직하는 동시에, 1984년 뒤라스의 『부영사(Le Vice-consul)』를 번역, 출간하며 번역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1988년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롭게 등단한 뒤로는 창작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는 한편 채만식, 이문열, 이청준, 조세희, 최인호 등 여러 작가의 작품을 파트릭 모뤼스와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하며 한국문학을 프랑스어권에 알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p>
<p>본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으로는 1999년에 출간된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와 2000년에 출간된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xref ref-type="fn" rid="fb005"><sup>5)</sup></xref>이 있다. 전자에는 표제작 「갈증의 시학」을 비롯해 중·단편 4편이, 후자에는 표제작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포함해 중·단편 3편이 수록되었다.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의 경우 겉표지에는 모뤼스가 번역을 맡았다고 표기되어 있으며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 있는 서지 정보에도 번역자로는 모뤼스의 이름만이 명시되어 있어 단독 번역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속표지에 “저자와 파트릭 모뤼스에 의해 한국어에서 번역된 단편들(récits traduits du coréen par l’auteur et Patrick Maurus)”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모뤼스가 국제 프랑스어권 학술지 『시네르지 코레(Synergies Corée)』에 기고한 글(<xref ref-type="bibr" rid="B033">2011: 70</xref>)에서도 공동 번역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저자가 번역에 참여했음은 분명하다.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 또한 마찬가지로 겉표지에는 모뤼스만이 번역자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서지 정보에도 저자의 번역 참여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책 내부를 보면 「아버지 감시」의 번역본인 Il surveille son père와 「회색 눈사람」의 번역본인 Avec cette neige grise et sale의 경우 “저자가 프랑스어본을 검토(Version française revue par l’auteur/La traduction a été revue par l’auteur)” 했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표제작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 앞에는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프랑스어본은 원본과 세부적으로 몇 가지 차이가 있으나, 파트릭 모뤼스와 협력하에 저자가 직접 작업한 것(La version française de 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 qui en quelques détails diffère de l’édition originale, a été établie par l’auteur avec le concours de Patrick Maurus)”임이 명시되어 있어 저자가 번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xref ref-type="fn" rid="fb006"><sup>6)</sup></xref></p>
<p>앞서 언급했듯이 자가번역을 정의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번역가와의 협업 여부를 들 수 있다. 최윤의 작업은 독자적인 자가번역으로 볼 수는 없으나, 공역자와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번역가의 작업을 검토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자가번역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p>
<p>본 연구는 최윤의 자가번역 결과물로서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행본 두 권에 수록된 중·단편소설 7편 가운데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논의에 앞서 번역가로서의 최윤은 어떤 번역관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p>
</sec>
<sec id="sec003-1-2">
<title>3.1.2. 최윤의 번역관</title>
<p>최윤의 번역 활동은 프랑스어에서 한국어 방향보다는 한국어에서 프랑스어 방향, 그 가운데에서도 문학번역에 집중돼 있다. 실제 번역 경험에 근거해 발표한 두 편의 논문에서 문학번역에 대한 최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먼저 그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번역의 편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xref ref-type="bibr" rid="B012">최현무 1996: 16</xref>).</p>
<p>　</p>
<p>　　그것은 바로 교열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번역 작업이다.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번역자가 일차적인 번역을 한 후에 도착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그 일차번역의 문법적 실수를 수정하고 문학작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꼴을 갖추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 출발어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특성들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문법적 정형성을 이유로 지워지고 수정되어 버리는 사례가 너무도 종종 발생하게 된다. 출발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교열을 맡을 경우, 그가 번역에 대해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열은 단번에 일차번역자와 교열자 간의 공동 번역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 출발어에 대해 아무런 지식을 지니지 않은, 도착어를 모국어로 지닌 사람을 교열자로 선택했을 경우, 타문화에서는 생소할 수 있는, 출발어의 수많은 특성들이 단순한 이상함으로 치부되어, 비문학적인 것으로 단번에 수정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내용의 전달만이 문제가 되는 기술적인 번역에 있어서 그토록 유효한 이 제도는 문학 작품의 번역에 관한 한 오히려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p>
<p>　</p>
<p>이렇듯 최윤은 출발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교열자(혹은 공역자)가 원어의 문학적 특성을 들어내고 수정함으로써 도리어 비문학적인 번역을 낳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또한 번역자가 출발어가 지닌 문학성의 특성들을 인지하고 도착어로도 그 특성들을 드러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 언어의 다른 언어의 병합”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쪽 언어나 문화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번역을 병합이라고 볼 때, “병합에 의한 번역에서는 원어가 지닌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근거이다(<xref ref-type="bibr" rid="B012">1996: 17</xref>).</p>
<p>그는 이어 한국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일반적 전제 사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문학 관행의 문제로, 전통적으로 중·단편이 강세를 보이는 한국문학과는 달리 프랑스문학 전통에서는 장편이 우세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국 장편소설 출판 관행상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고 먼저 잡지연재를 거쳐 발표된 다음에야 장편으로 재출간되기 때문에 번역가가 서구 편집자의 역할, 즉 작품의 문학성을 위해 작품의 세부에 개입하는 등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작품의 구조 및 논리 축조의 문제로, 프랑스소설과 달리 독자에게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고자 하는 한국소설의 경우 반복과 요지의 중복된 요약을 관습적으로 허용하나, 이러한 관행을 꺼리는 프랑스문학 풍토에서는 이 점이 작품의 결함으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가는 어법상의 관습과 작가의 문학적 의도를 구별하되, 프랑스어 번역에서 “결정적인 흠으로 인식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번역에도 반영해야 한다. 셋째는 문화적 차별성의 문제로, 프랑스어권 독자들은 한국문화를 생소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번역자는 보편적인 문화적 차별성의 문제를 고려하는 동시에 개별 작품이 지닌 특성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윤은 그 해결책으로서 “이동”과 “분산”이라는 두 방법을 언급하기도 한다. 번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화적 요소가 있을 때, 도착어에서 근접한 단어를 찾아 그 어휘를 번역하되 앞이나 뒤에 오는 문장에 들어가는 동사나 형용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을 이동이라고 하다면, 분산은 작품의 여러 부분에 이러한 설명을 분산적으로 배치해 두는 것을 말한다(<xref ref-type="bibr" rid="B012">1996: 20</xref>).</p>
<p>또 다른 논문(<xref ref-type="bibr" rid="B013">최현무 2009</xref>)에서는 폴 리쾨르(Paul Ricœur)가 “전지구적이며 획일적인 세계화 경향의 환경”에 대해 “어떻게 각각의 오래된 문명을 살리면서 동시에 보편적 문명에 참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동시에 근원으로 돌아오면서 현대적일 수 있는가”와 같이 제기한 문제를 언급한 뒤, “문학번역의 영역에서 세계화의 문제는 번역 자체에 내재한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실제적인 번역 이론을 분석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위 ‘근대문학’은 서구문학이 소수언어의 문화로 퍼져나간 것으로, 각국은 자국 고유의 문학전통을 바탕으로, 유입된 문학의 관행과 형식, 정전과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융합하기도 하는 등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학을 발전시켜왔다. 서구문학이 비서구문학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양호하게 번역 되었으며 비서구언어는 소수언어로 취급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최윤의 주장은 카사노바와 궤를 같이한다. 이어 그는 문학번역 활동을 문화적 재현으로 봄으로써 “두 언어와 문화 사이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이라는 활동의 역동적인 특수성에 접근”(<xref ref-type="bibr" rid="B013">2009: 238</xref>)하고자 한다. 실제로 번역된 작품의 예를 통해 비서구언어이자 소수언어에 속하는 한국문학을 서구언어인 프랑스어로 번역할 경우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는지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는 직접 번역에 참여한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 정은진이 번역한 <italic>De la forêt à la forêt</italic>(「숲에서 숲으로」), 모뤼스가 번역한 <italic>Il surveille son père</italic> 등 본인의 작품 3편을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첫 번째 작품은 한국어와 프랑스어 사이의 언어적, 문학적 관행의 차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는 두 언어 간 통사구조의 차이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라는 점에서, 세 번째는 시제를 바꿈으로써 타자와 타문화에 대한 해석적인 번역으로 나아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선정된 것이다. 이제 최윤의 자가번역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p>
</sec>
</sec>
<sec id="sec003-2">
<title>3.2. 최윤의 자가번역 분석 및 논의</title>
<p>본 연구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최윤의 자가번역 결과물로서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행본 두 권에 수록된 중·단편소설 7편 가운데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동명의 선집에 함께 수록된 세 작품의 번역에도 작가가 공역자로서 참여했으나 표제작이 선집 출간 전에 단독으로 프랑스 유력 월간지에 게재되면서 주목을 끌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p>
<sec id="sec003-2-1">
<title>3.2.1. 분석 대상의 특징</title>
<p><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의 원본인 「갈증의 시학」은 잡지 『샘이 깊은 물』 1991년 5월호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최윤은 1985년 완성된 뒤 1987년 수정을 거쳐 1991년 11월에 출간된 장편소설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작품의 일부분이 먼저 「갈증의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단편화되어 『샘이 깊은 물』에 발표되고, 이어 프랑스의 월간 시사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의 요청으로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1991년 8월호에 발표되었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당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이 단편을 실으면서 간략한 작가 소개 말미에 “작가가 근일 한국어로 출간될 예정인 장편과 동일한 제목의 단편을 본지를 위해 집필했다”<xref ref-type="fn" rid="fb007"><sup>7)</sup></xref>는 언급을 덧붙였다. 반면 이 작품이 한국어 원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설명은 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번역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작가 본인도 이미 이 단편이 ‘번역’되어 잡지에 발표되었다고 밝혔을 뿐더러, 파트릭 모뤼스(<xref ref-type="bibr" rid="B033">2011</xref>) 역시 『시네르지 코레』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작품을 저자와 함께 번역했으며, 번역본이 먼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에 실리고 뒤이어 악트 쉬드(Actes Sud) 출판사를 통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접하지 못한 프랑스 독자들은 잡지에 실린 단편을 번역본이 아닌 원본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에서 번역본과 원본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잡지에 실린 번역본과 프랑스어로 출간된 선집에 실린 번역본은 일부 단어 및 표현이 변경, 삭제 혹은 추가된 것 외에는 대동소이하므로, 1999년 선집 출간을 앞두고 새롭게 교정 작업 정도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두 번역본의 차이점을 조명하는 대신 선집에 실린 번역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원본과의 비교, 대조에 집중하고자 한다.</p>
</sec>
<sec id="sec003-2-2">
<title>3.2.2. 사례 분석</title>
<p><bold>3.2.2.1. 삭제</bold></p>
<p>분석 대상의 원본과 번역본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바로 삭제이다. 이형진은 베케트의 사례를 바탕으로 자가번역에서 나타나는 삭제는 일반 번역가에 의한 삭제와는 달리 출발어 텍스트의 관점과 초점을 다듬어 저자 본인의 의도를 더 확실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자가번역에서 보이는 삭제는 글쓰기의 연장선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xref ref-type="bibr" rid="B005">2011: 264</xref>). 최윤의 자가번역에서도 삭제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단편소설인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는 비교적 짧은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각 문단마다 단어나 구문 단위의 삭제가 관찰되며, 문단 전체가 생략된 경우도 빈번하다. 번역본과 원본의 분량을 비교해 보면, 번역본은 총 11페이지, 원본은 총 16페이지로, 각 언어의 특성상 한 페이지에 포함된 글자 및 문장의 수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적지 않은 차이가 관찰된다.</p>
<p>앞서 살펴본 바, 최윤은 관습적으로 반복을 허용하고 요지를 중복해서 요약하는 한국소설이 프랑스어로 번역될 때 결함이 있는 작품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다. 물론 작품이 서술적 전략으로서 반복을 선택한 경우라면 프랑스어의 반복과는 구분되어야 하므로 생략하는 대신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실제로 그는 광주항쟁이라는 매우 특수한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다루는「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번역할 때, 원문의 의도적 반복과 그 반복이 지니는 문장의 리듬을 서술적 전략으로 보고 프랑스어 번역에도 최대한 반영했음을 밝히고 있다(<xref ref-type="bibr" rid="B013">최현무 2009: 244</xref>).</p>
<p>분석 대상의 경우 한국문화와 관련된 내용으로 보충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에 대한 설명, 각종 수식어 등이 삭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p>
<p>　</p>
<p>　　예시1)</p>
<p>　　네가 너의 협소한 이상에 맞는, 더 바랄 것 없는 직위에서 일하게 된 지는 오년이 되었다. (1)<underline>비서실장</underline>. 네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의 모두를 소유한 지는 삼년이 되었다. 점진적으로 너의 아파트는 죽은 물건들의 침묵의 신전이 되었다. (2)<underline>네가 육개월 전에 결정한 그 일은 오늘밤에 이루어질 것이다. ⑵네가 아파트 곳곳에 자동 장치를 설치한 지는 이 년이 되었다. 규칙적으로 호흡하고 있지만 심장이 멎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08"><sup>8)</sup></xref></underline></p>
<p>　　Cela fait cinq ans que tu travailles à un poste conforme à ton idéal exigu. Cela fait trois ans que tu as acquis tout ce que tu voulais posséder. Progressivement, ton appartement est devenu un temple silencieux peuplé d’objets morts. Ta décision mûrie depuis six mois prendra effet cette nuit.<xref ref-type="fn" rid="fb009"><sup>9)</sup></xref></p>
<p>　</p>
<p>(1)의 경우 주인공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곧 등장하므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며 ‘Cela fait’로 문장을 시작하는 번역본의 흐름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삭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2)는 특별한 이유 없이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p>
<p>　</p>
<p>　　예시2)</p>
<p>　　(A) 어젯밤 너는 <underline>한 남자에게서</underline> 확인 전화를 받았다. <underline>너는 몇 번이나 틀림없는가를 확인했고 상대편의 확언에 안심했다.<xref ref-type="fn" rid="fb010"><sup>10)</sup></xref></underline></p>
<p>　　Hier soir, tu as reçu un coup de fil de confirmation.<xref ref-type="fn" rid="fb011"><sup>11)</sup></xref> (어젯밤 너는 확인 전화를 받았다.)</p>
<p>　　(B) <underline>너는 늘 익명의 인파 속에 익사하는 것을 좋아해왔다. 늘 너의 고유한 이름을 불편해했고 너의 욕구와 조금이라도 익명의 인파가 좇는 욕구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xref ref-type="fn" rid="fb012"><sup>12)</sup></xref></underline></p>
<p>　　(C) <underline>낮에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underline> 밤만 되면, 아무도 모르게, <underline>네가 그린 배를 타고 검은 바다 속을</underline> 항해했다. 너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너의 주변을 <underline>갑작스런</underline> 침묵과 낮의 규칙적인 의무 수행으로 안심시키고 <underline>밤에는</underline> <underline>격렬한</underline> 도주의 음모를 진행시켰다.<xref ref-type="fn" rid="fb013"><sup>13)</sup></xref></p>
<p>　　La nuit, sans que personne ne le sache, tu naviguais. Rassurant ton entourage avec le silence et l’accomplissement régulier de tes devoirs pendant la journée, tu tramais en cachette ton projet de fuite.<xref ref-type="fn" rid="fb014"><sup>14)</sup></xref> (밤이면, 아무도 모르게, 너는 항해했다. 너의 주변을 침묵과 낮의 규칙적인 의무 수행으로 안심시키고, 몰래 도주의 음모를 진행시켰다.)</p>
<p>　　(D) <underline>검은 바다 속의 항해가 웬만큼 진전되었을 때</underline> 너는 매번 수평선이 무한히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underline>사력을 다해 파도를 헤치고</underline>, 항해중에 만난 다른 배들을 추월할 때마다 더욱 많은 배들이 앞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네가 탄 보잘것없는 배와 <underline>연한 손바닥을 짓무르게 하는</underline> 노질에 숨이 탁 막혀 또 다른 때를 복수처럼 기약하며 강한 증오의 시선을 수평선에 박아넣고 너는 뱃머리를 돌렸다. 너의 <underline>감염된 눈에</underline> 싱겁고 지루하며 불안정해 보이는 몇몇 추상적인 단어에 매달려 감히 그것을 지평선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좁은 육지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되돌아왔다.<xref ref-type="fn" rid="fb015"><sup>15)</sup></xref></p>
<p>　　<underline>Loin en mer(저 멀리 바다에서)</underline>, tu voyais sans cesse l’horizon reculer. Chaque fois que tu dépassais un bateau, il en restait autant devant. Découragée par ton bateau minable et épuisée par le fait de ramer, tu as fait demi-tour, te promettant de repartir, jetant un regard haineux sur l’horizon. Les épaules tombantes, tu es revenue sur le continent exigu où les gens vivent, accrochés à quelques mots abstraits qui te semblent fades, ennuyeux et instables.<xref ref-type="fn" rid="fb016"><sup>16)</sup></xref></p>
<p>　</p>
<p>예시2)에서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나타내는 설명이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삭제되고, 다소 과장된 표현들이 함께 생략됨으로써 번역문은 원문에 비해 단순해지는 대신 리듬감을 얻게 된다.</p>
<p>　</p>
<p>　　예시3)</p>
<p>　　너는 그 칭찬을 살기어린 미소를 띠며 만끽했다. 담임선생의 지시에 따라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우의 목덜미에 ‘검’이라고 새겨진 나무 도장을 찍었다. 눈을 휩뜨고 경멸하듯 바라보는 몇몇 학우들에게 너는, 지시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익혀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너는 쉽사리 익힌 이 같은 삶의 방식들에서 또한 도피했다. 그에 대해 네가 어떤 종류의 판단을 내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터득한 요술이 네게 은연중 강요하는 몇 가지 제약들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xref ref-type="fn" rid="fb017"><sup>17)</sup></xref></p>
<p>　</p>
<p>한국의 문화적,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예시3)은 번역가가 이동 또는 분산 등의 방법으로 개입하지 않고서는 프랑스 독자를 이해시킬 수 없으나, 번역본에서 완전히 삭제된다. 도착어 독자들이 갖추지 못한 배경지식을 일일이 설명하기 곤란하거나, 번역본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해당 부분을 삭제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되는 경우 외에, 위에서 인용한 최윤의 발언은 필요에 따라 첨가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의 경우 삭제에 비해 첨가가 관찰되는 빈도가 현저히 낮다는 점에서 번역가로서의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p>
<p><bold>3.2.2.2. 병합</bold></p>
<p>부분적, 전체적 삭제가 아닌, 기존 요소들의 병합 혹은 재조합이 수차례 관찰되기도 한다.</p>
<p>　</p>
<p>　　예시4)</p>
<p>　　(1)<underline>그의 아내가 팔다 남은 푸성귀의 시든 갈피에서 포르랗게 배추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underline>. 온종일 버려져 흙 속을 뒹구는 세 살짜리 어린애가 (2)<underline>변소에서 무더기로 기어나오는 구더기를</underline> 밥알로 혼동하고 허겁지겁 집어먹는 것을 너는 보았다.<xref ref-type="fn" rid="fb018"><sup>18)</sup></xref></p>
<p>　　Tu as vu un môme de trois ans, abandonné toute la journée sur un tas de sable, avaler en toute hâte (3)<underline>des larves sortant par grappes des feuilles</underline>, les prenant pour des grains de riz.<xref ref-type="fn" rid="fb019"><sup>19)</sup></xref></p>
<p>　</p>
<p>(1)과 (2)는 삭제와 병합을 거쳐 (3)과 같이 “푸성귀의 갈피에서 기어나오는 애벌레”로 단순화된다.</p>
<p>　</p>
<p>　　예시5)</p>
<p>　　너는 다시 거리에 나와 빠른 걸음으로 목적 없이 거리를 쏘다닌다. (1)<underline>세상의 소매치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underline>. (2)<underline>그들조차도 어쩌면 너의 가방에 든 것을 훔치기 싫을는지도 모른다</underline>. 그들은 벌써 (3)<underline>직감으로</underline> 그것이 단순히 썩어가는 너의 살의 깊은 지층에서 형성된 종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xref ref-type="fn" rid="fb020"><sup>20)</sup></xref></p>
<p>　　Sans but, tu erres dans la rue, (4)<underline>où se trouvent tous les pickpockets du monde</underline>. Il est possible que leur intuition les tienne à l’écart du contenu de ton sac.<xref ref-type="fn" rid="fb021"><sup>21)</sup></xref></p>
<p>　</p>
<p>번역본은 “너는 목적 없이 세상의 소매치기들이 다 모여 있는 거리를 쏘다닌다. 그들조차도 어쩌면 직감으로 너의 가방에 든 것을 훔치기 싫을는지도 모른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예시4)와 달리 삭제와 병합을 통한 단순화 외에 의미 변화가 관찰된다. 병합은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빈번히 나타난다.</p>
<p>　</p>
<p>　　예시6)</p>
<p>　　(1)<underline>너의 </underline>무릎 위에 놓인 (2)<underline>손가방 속에서는</underline> 가죽이 덮인 사각의 상자 속에서 네가 낮에 구입한 금강석─아,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것이 더 구체적이다─이 (3)<underline>너를 대신해</underline> 광물질의 (4)<underline>호흡을 계속하고 있다</underline>. 이 크기와 모양이 희귀한 보석은 섭씨 천이백의 고도의 열기, 지하 천 킬로미터의 깊이에 가로누워 있는 킴벌라이트 지층에서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된 그 다이아몬드일까. 감금된 지층이 몸을 뒤틀다가 어느 날, 용암의 기둥이 터지고 분노의 분출구를 통해 끓는 액체에 섞여 솟구쳤던 이 보석은, 여러 나라, 여러 시대를 거쳐, 수많은 밀수입자의 손에 손을 거쳐 감히 (5)<underline>너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위해 고안된 상징적 액세서리</underline>. 너는 육개월 전부터 너의 제의를 위해 이것을 기다려왔고 마침내, 다른 모든 물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손에 넣었다.</p>
<p>　　자정에서 십 분을 남겨두고 네가 탄 자동차는 분수가 있는 광장에 나타났다.<xref ref-type="fn" rid="fb022"><sup>22)</sup></xref></p>
<p>　　Quand tu apparais dans ta voiture à minuit moins dix sur cette place où se trouve une fontaine, dans ton sac respire à ta place un diamant, accessoire symbolique élaboré pour ton happening insensé.<xref ref-type="fn" rid="fb023"><sup>23)</sup></xref></p>
<p>　</p>
<p>ST에서는 사건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에 앞서 주인공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긴 설명이 등장하는 반면, TT에서는 “자정에서 십 분을 남겨두고 네가 탄 자동차는 분수가 있는 광장에 나타났다. 너의 손가방 속에서는 너의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위해 고안된 상징적 액세서리인 다이아몬드가 너를 대신해 호흡하고 있다.”와 같이 (1)~(5)만이 남아 보조적 역할을 하는 데 그쳐 다이아몬드의 의미가 다소 축소됨을 볼 수 있다.</p>
<p>결말 부분에서도 상당 분량이 삭제되고, 일부 병합이 일어나면서 번역본과 원본이 각기 다른 끝맺음을 보여준다.</p>
<p>　</p>
<p>　　예시7)</p>
<p>　　(1)<underline>십이 년 전 조야한 장식의 비어버린 결혼식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어버린 광장에 서서 나는 너의 막을 수 없었던 곡예를 바라본다</underline>. 굉음 뒤의 도시의 정적은 무서울 정도로 짙다. 마비된 도시의 정적 속에 멀리서부터 구급차의 자지러지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2)<underline>이튿날 신문을 펼쳐든 사람들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하다</underline>.</p>
<p>　　<underline>어머머! 어머머!</underline></p>
<p>　　<underline>아, 끔찍해! 그렇게 잘 다듬어진 미녀가, 뭣 때문에……?</underline></p>
<p>　　<underline>원 미친 거. 할 지랄이 없었구만</underline>.</p>
<p>　　<underline>다이야를 크만 걸 삼켰대니 태워보면 나오겠구먼. 건 누께 될꼬</underline>.</p>
<p>　　<underline>지진이야. 지진</underline>.</p>
<p>　　<underline>어허, 이게 누구야. 아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아까워, 암 아깝고 말고, 그 조신하던 장기 근속 직원이!</underline></p>
<p>　　<underline>마, 이런 걸 세기말 현상이라 카는 기다. 가뿌리자. 재수 웂다!</underline></p>
<p>　　어쩌면 즐거이 물질이 되어버린 너의 죽음은 사회면의 한줄을 차지할 가치도 없을는지 모른다. (3)<underline>오래 앓던 충치가 빠졌을 때 혹은 악몽의 주인공이 꿈속에서 살해되었을 때</underline> 누가 부음을 내는 것을 보았는가. (4)<underline>그러나 나는 너의 죽음은 기억되어야 하고 사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underline></p>
<p>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옴에 따라 환하게 켜졌던 광장 주변의 건물의 불들이 하나하나 꺼지기 시작했다.</p>
<p>　　(5)<underline>자정 뉴스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이 밤, 강한 북동풍이 거센 속도로 불고 먼 바다의 파도는 광란, 강의 수면은 위험 수위로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xref ref-type="fn" rid="fb024"><sup>24)</sup></xref></underline></p>
<p>　　Le silence qui suit est épais, effrayant. Au loin, la sirène d’une ambulance. </p>
<p>　　Toi qui as voulu devenir une chose, ta mort ne vaudra même pas une ligne dans le journal. Publie-t-on un avis de décès pour (6)<underline>un objet cassé ou un cauchemar disparu</underline>?</p>
<p>　　A mesure que la sirène approche, les immeubles un à un s’éteignent.<xref ref-type="fn" rid="fb025"><sup>25)</sup></xref></p>
<p>　</p>
<p>과거에 대한 언급과 현재 화자의 상황(1), 사람들의 반응(2), 화자의 의견(4), 주인공의 죽음 이후의 일기예보(5)가 삭제되고, (3)이 (6)으로 축소 병합되면서, 번역본의 결말은 “이어진 정적은 짙고, 무섭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즐거이 물질이 되어버린 너, 너의 죽음은 신문의 한줄을 차지할 가치도 없을는지 모른다. 부서진 물건이나 사라진 악몽따위에 부음을 내던가./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옴에 따라 건물의 불들이 하나하나 꺼진다.”로 축약된다.</p>
<p><bold>3.2.2.3. 변형</bold></p>
<p>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대신 변형하는 경우도 관찰된다. 특히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화려한 도시를 상징하는 분수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시의 한복판 오만하게 빛나는 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무연히 맑은 하늘을 향해 물팔매질을 하는 원형의 분수는 ⑷<underline>찬란하다</underline>.”<xref ref-type="fn" rid="fb026"><sup>26)</sup></xref>는 “La fontaine au milieu de la ville, entourée de hauts immeubles, qui lance des jets d’eau vers le ciel innocent, a ⑸<underline>la beauté masculine d’un bulldozer</underline>.”<xref ref-type="fn" rid="fb027"><sup>27)</sup></xref>로 번역되었다. ⑷가 ⑸와 같이 옮겨지면서 그저 찬란하였던 분수는 “불도저와 같이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된다. 배금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주인공의 눈에 비친 화려한 분수가 그 뒤로는 주인공을 성적으로 착취하던 사장과 같이 폭력성을 감춘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번역가는 변형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원문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변형이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같은 작품의 첫 문단 두 번째 문장을 보자. “네가 ⑴<underline>아파트 뒤뜰</underline>에서 삼십 분간의 ⑵<underline>조기</underline> 줄넘기를 하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었다.”<xref ref-type="fn" rid="fb028"><sup>28)</sup></xref>는 “Cela fait un mois que tu n’as pas fait ta demi-heure de saut à la corde sur ⑶<underline>le balcon de ton appartement.</underline>”<xref ref-type="fn" rid="fb029"><sup>29)</sup></xref>으로 번역되었다. 한국 대단지 아파트의 아침 풍경을 떠올린다면 원문은 문제없이 이해 가능하다. 하지만 주거 환경과 운동 문화에서 차이가 있는 프랑스 독자들을 생각해 ⑴을 ⑶으로 번역했다고 할 때, 과연 아파트 단지의 ‘뒤뜰’이 좁은 ‘balcon’으로 변형됨으로써 같은 상황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지, 혹은 같은 상황을 떠올리지는 못하더라도 매끄럽게 이해하게 해 주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에서는 ⑵가 삭제됨으로써 원문의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다.</p>
<p><bold>3.2.2.4. 소결</bold></p>
<p>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직접 번역하는 자가번역의 특성상 작가이자 번역가는 “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 마음껏 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xref ref-type="bibr" rid="B005">이형진 2011: 259</xref>). 최윤 역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프랑스어본 앞에 “원본과 세부적으로 몇 가지 차이가 있으나, 파트릭 모뤼스와 협력하에 저자가 직접 작업한 것”이라고 첨언함으로써 원작자이자 번역자로서의 자가번역이 글쓰기의 연장선, 즉 다시쓰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갈증의 시학」의 번역본인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의 경우, 원본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고 병합함으로써 장황한 문화적 설명이 추가되는 것을 방지하고,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없애 한결 간결해진 번역본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 번역본이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에 표제작으로서 프랑스 유력 월간지에 먼저 전문이 게재된 데서 이러한 선택의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정된 지면에 수록되어야 하므로 가능한 한 불필요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주변언어인 한국어에서 중심언어인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문화적 관행에 적합한 방향으로 삭제 및 병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배경에서 비롯된 선택으로, 최윤의 다른 자가번역 텍스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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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4. 결론</title>
<p>지금까지 우리는 작가들이 수행하는 자가번역의 정의와 양상을 관찰한 후 자가번역과 일반번역의 공통점과 차이점, 문학적 글쓰기 요소에 대해 살펴보고 한불문학번역의 예를 들어 구체적인 경우를 살펴보았다.</p>
<p>자가번역은 작가가 글로 표현하기 이전에 기획한 의도와 작품의 뜻을 도착어로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번역학에서는 해석학의 탈언어화된 의미와 연관되기도 하며, 원작을 도착어로 다시 쓴다는 점에서 ‘다시쓰기’ 이론과도 관련된다. 또 자가번역을 원문을 다시 쓰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원문의 복수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일부 작가는 특정언어로 자가번역된 본을 정본이라 하며 원본의 위상을 밝히기도 하였다. 나보코프의 경우 영어와 러시아어의 위상에 따라, 특히 후기에 번역 전략을 다르게 구사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가번역의 범주에서 다른 번역가와의 협업도 여러 형태로 가능한데, 형태와 무관하게 작가는 일반적으로 번역가보다 자유롭게 의미를 개정하거나 도착어에서 작품의 의미를 더욱 잘 구현할 수 있는 표현방식을 추구함을 알 수 있었다. 생략, 첨부, 구체화 등 다양한 번역기법뿐만 아니라 문체효과에 따른 광범위한 변형의 작업도 도착어에서 진행되었음을 이론 고찰을 통해 알 수 있었다.</p>
<p>프루스트와 같이 본래 문학작품이 삶의 다양한 모습을 글로 번역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작가들에게 자가번역은 재번역의 요소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다. 동일한 원문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점과 기존의 텍스트를 개선하기 위한 의도로 재표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렇듯 번역과 글쓰기 모두에 걸쳐 있는 자가번역은 문학번역의 특성을 규명하기에 용이하다. 문학번역은 번역이면서도 작가의 글쓰기라고 하는 영역에 중요한 부분을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p>
<p>이러한 이론적 배경 및 현상의 고찰을 한국문학의 프랑스어 번역의 예에 적용해 분석을 진행하였다. 먼저, 등단 이전에 번역가의 경험을 쌓은 최현무/최윤 작가의 번역관을 분석한 결과, 한불문학번역에서 대표적인 협업모델인 한국인 번역자와 외국인(한국어를 모르는 원어민) 감수자 모델에 관해, 한국어와 문화를 충분히 몰라 원문과 멀어진 자유로운 다시쓰기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원문과 문화를 충실히 거의 직역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윤리적 입장이었다.</p>
<p>작가 최윤의 자가번역 분석 결과, 우선 번역서 표지에서 공역의 여부를 밝히지 않아 “자가번역 규약 0도”라고 할 수 있으며, 곁텍스트인 속표지 등을 통해 작가가 번역에 참여했음을 밝히고 있다.<xref ref-type="fn" rid="fb030"><sup>30)</sup></xref> 분석 텍스트의 경우 번역본에서 원문의 삭제 및 병합 등의 변화가 감지되었으나, 나보코프와 같이 작가가 다시 쓰는 방식으로 원문과 상당히 달라진 제2의 원문을 생산했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타작가의 작품들을 번역하던 방식과 별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윤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자가번역에 참여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작가/번역가의 협업 형태인 번역가의 결과물을 가지고 감수를 하는 방식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역자인 모뤼스가 단독번역을 진행한 경험이 전혀 없으며 항상 한국인 번역가와 공동번역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작가가 번역을 하고 오히려 원어민 번역가가 감수자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윤의 이중언어 경력이 상급교육과정에서 습득된 제2외국어라는 점과 원문이 최대한 충실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본인의 번역관이 반영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작업방식은 아쉽게도 번역과 글쓰기의 관계, 탈언어화된 의미를 어떻게 가장 적절한 도착어의 표현으로 산출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또 나보코프와 같이 과감한 출발어 노출 및 효과를 생산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면에서는 본인의 번역관과 모순적인 방식이 드러났다. 한국어의 특성인 반복적 요소가 번역되어 프랑스어의 사용법에 부적합다고 판단되는 경우 외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일괄적인 삭제 현상이 쉽게 관찰되었으며, 문화적 요소의 경우 긴 설명이 필요할 경우 역시 생략이 되었기 때문이다. 변형과 개선의 경우, 한국어 문체의 미묘한 수사학적 효과를 그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 전혀 다른 표현 방식으로 우회하여 문체가 변형이 되었다. 이런 변화가 발생한 부분들은 모두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등가를 비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이며 근본적으로 프랑스어로 다시쓰기를 진행하였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작가의 입장에서 번역을 한 자가번역이라기보다 번역가의 입장에 더 충실하게 도착텍스트를 생산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p>
<p>어쨌든 이 경우 ‘자기번역’보다는 엄밀한 의미의 ‘자가번역’이 더 적절한 표현이며 서구 작가들에게서 나타난 다시쓰기의 양상은 포착이 어려웠다. 이 결론이 시사하는 바는 자가번역에 참여하는 저자가 완전한 이중언어자가 아닌 경우 번역가 또는 감수자와 협력 번역을 진행할 때 외국어방향으로 진행되는 번역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노출하게 되며, 작가는 의도와 작품의 뜻 및 문학효과를 잘 전달하고 협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공동번역의 전략(최미경 2014)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중원문이 아닌 원문과 번역문의 관계가 성립된 경우이다.</p>
<p>작가와 번역가의 이중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번역가로서의 입장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본인의 번역관과 오히려 모순적인 예를 더 드러낸 방식이었다. 그러나 번역가가 작가의 자격으로 진행한 번역은 작가가 승인한 번역이므로 자동적으로 원본과의 등가의 자격을 부여받는다고 할 수 있다. 최윤은 번역가로서의 경험이 자가번역 현상을 지배한 경우로,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역으로 (나보코프의 경우처럼) 번역의 경험이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의 과제로 남는다. 본 연구에는 최윤이 공역자로서 번역에 참여한 <italic>Poétique de la soif</italic> 수록작 3편과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어 추후 이를 포함한 더 심도 깊은 분석이 가능하리라고 기대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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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id="fb001"><label>1)</label><p> 제1저자</p></fn>
<fn id="fb002"><label>2)</label><p> 교신저자</p></fn>
<fn id="fb003"><label>3)</label><p> La déverbalisation est le stade que connaît le processus de la traduction entre la compréhension d'un texte et sa réexpression dans une autre langue. Il s'agit d'un affranchissement des signes linguistiques concomittant à la saisie d'un sens cognitif et affectif(탈언어화는 번역과정에서 텍스트의 이해와 도착어로의 재표현 사이에 있는 단계이다. 인지적이며 정감적인 의미가 포착되는 동시에 언어기호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말한다.)(Lederer 1994: 213).</p>
<p>파리통역번역대학원ESIT의 해석이론(théorie interprétative) 또는 의미이론(théorie du sens) 역시 통번역 작업을 삼각형으로 표현한다. 출발어, 도착어가 삼각형 밑변의 양측에 놓이며 꼭짓점에 의미가 놓인다.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통번역은 출발어에서 도착어로 직접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어의 의미가 아직 언어형태를 갖지 않은 탈언어화 상태를 거쳐 도착어로 재표현되는 작업이다. 형태를 갖기 이전의 의미는 해당 언어의 지식과 발화자의 의도, 인지적 지식, 배경지식, 전문지식 등을 이해하였을 때 확정된다.</p></fn>
<fn id="fb004"><label>4)</label><p> 킨들(Kindle) 판 전자책.</p></fn>
<fn id="fb005"><label>5)</label><p> 이 선집은 각기 1991년(<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 1993년(<italic>Il surveille son père</italic>), 1995년(<italic>Avec cette neige grise et sale</italic>)에 프랑스에서 독립적으로 번역, 출간된 중·단편 3편을 모아 2000년에 새롭게 출간한 것이다.</p></fn>
<fn id="fb006"><label>6)</label><p> <italic>Là-bas, sans bruit, tombe un pétale</italic>의 경우 “Traduit du coréen par Patrick Maurus, version française revue par l’auteur”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2000년에 출간된 선집과는 차이를 보인다. 최윤은 본명 최현무로 발표한 논문(<xref ref-type="bibr" rid="B013">2009</xref>)에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1991년 번역본에 본인이 ‘공역자’로 참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p></fn>
<fn id="fb007"><label>7)</label><p> « Elle a rédigé, pour le <italic>Monde diplomatique</italic>, cette nouvelle qui porte le même titre qu’un roman à paraître prochainement en coréen. » https://www.monde-diplomatique.fr/1991/08/CH_OE/43748</p></fn>
<fn id="fb008"><label>8)</label><p> <xref ref-type="bibr" rid="B011">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1992, 95쪽</xref>.</p></fn>
<fn id="fb009"><label>9)</label><p> <xref ref-type="bibr" rid="B023">Ch’oe Yun, Poétique de la soif, traduit par P. Maurus, Actes Sud, 1999, p.17.</xref></p></fn>
<fn id="fb010"><label>10)</label><p> <italic>Ibid</italic>., 96쪽.</p></fn>
<fn id="fb011"><label>11)</label><p> <italic>Ibid</italic>., p.18.</p></fn>
<fn id="fb012"><label>12)</label><p> <italic>Ibid</italic>., 97쪽.</p></fn>
<fn id="fb013"><label>13)</label><p> <italic>Ibid</italic>., 98-99쪽.</p></fn>
<fn id="fb014"><label>14)</label><p> <italic>Ibid</italic>., p.20-21.</p></fn>
<fn id="fb015"><label>15)</label><p> <italic>Ibid</italic>., 99쪽.</p></fn>
<fn id="fb016"><label>16)</label><p> <italic>Ibid</italic>., p.21.</p></fn>
<fn id="fb017"><label>17)</label><p> <italic>Ibid</italic>., 99쪽.</p></fn>
<fn id="fb018"><label>18)</label><p> <italic>Ibid</italic>., 98쪽.</p></fn>
<fn id="fb019"><label>19)</label><p> <italic>Ibid</italic>., p.20.</p></fn>
<fn id="fb020"><label>20)</label><p> <italic>Ibid</italic>., 106쪽.</p></fn>
<fn id="fb021"><label>21)</label><p> <italic>Ibid</italic>., p.25.</p></fn>
<fn id="fb022"><label>22)</label><p> <italic>Ibid</italic>., 107쪽.</p></fn>
<fn id="fb023"><label>23)</label><p> <italic>Ibid</italic>., p.25.</p></fn>
<fn id="fb024"><label>24)</label><p> <italic>Ibid</italic>.,109-110쪽.</p></fn>
<fn id="fb025"><label>25)</label><p> <italic>Ibid</italic>., p.27.</p></fn>
<fn id="fb026"><label>26)</label><p> <italic>Ibid</italic>., 102쪽.</p></fn>
<fn id="fb027"><label>27)</label><p> <italic>Ibid</italic>., p.23.</p></fn>
<fn id="fb028"><label>28)</label><p> <italic>Ibid</italic>., 95쪽.</p></fn>
<fn id="fb029"><label>29)</label><p> <italic>Ibid</italic>., p.17.</p></fn>
<fn id="fb030"><label>30)</label><p> <xref ref-type="bibr" rid="B010">최미경(2016)</xref>은 한불문학번역에서 곁텍스트의 기능을 연구하며 최윤/모뤼스 번역이 서문 등의 곁텍스트를 번역관의 피력 및 이문열 등 작가에 대한 비판의 공간을 사용했음을 밝힌 바 있다.</p></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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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고 문헌</title>
<!--김욱동. (2012). 「자기번역의 가능성과 한계」 『통번역학연구』16(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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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김</surname><given-names>욱동</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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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2</year>
<article-title>자기번역의 가능성과 한계</article-title>
<source>통번역학연구</source>
<volume>16</volume><issue>1</issue>
<fpage>21</fpage><lpage>37</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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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2010). 「언어의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의 자기번역 문제」『러시아연구』 20(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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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2</label>
<element-citation publication-typ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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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김</surname><given-names>진영</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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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0</year>
<article-title>언어의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의 자기번역 문제</article-title>
<source>러시아연구</source>
<volume>20</volume><issue>2</issue>
<fpage>19</fpage><lpage>40</lpage>
<pub-id pub-id-type="doi">10.22414/rusins.2010.20.2.19</pu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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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b collab-type="translator">한국번역학회</col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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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09</year>
<source>라우트리지 번역학 백과사전</source>
<publisher-loc>경기</publisher-loc>
<publisher-name>한신문화사</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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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손</surname><given-names>나경</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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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다시쓰기로서의 번역:  Heart of Darkness 번역본 고찰</article-title>
<source>영미어문학</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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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이</surname><given-names>형진</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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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안정효의 Silver Stallion에 나타나는 자가번역(self-translation) 가능성과 한계 연구</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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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자가번역(self-translation) 비평-안정효의『은마(銀馬)는 오지 않는다』를 중심으로</article-title>
<source>번역학연구</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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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자가번역과 이중어 글쓰기</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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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name>열화당</publisher-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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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경. (2016). 「곁텍스트의 메타텍스트성과 기능」 『프랑스학 연구』 78: 317-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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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최</surname><given-names>미경</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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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곁텍스트의 메타텍스트성과 기능</article-title>
<source>프랑스학 연구</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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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1992).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서울: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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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ame-style="eastern"><surname>최</surname><given-names>윤</given-name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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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1992</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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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title>전후세대의 ‘미적 체험’과 ‘자기번역’ 과정으로서의 시쓰기에 관한 일고찰-김수영의 『시작(詩作)노우트(1966)』다시 읽기</artic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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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kyung Choi is professor at GSTI of Ewha Womans University, conference interpreter and literary translator. She received her first Ph. D. in French modern literature from Univ. Paris IV and her second Ph. D. in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studies from Univ. Paris III. She is interested in social justice, issues about environment and animal protection.</p>
<p><italic>E-mail address</italic>: <email>wafwaf@ewha.ac.kr</email></p>
<p>Yennie Yun is a PhD student at GSTI of Ewha Womans University. Her research interests include auto-translation and censorship in translation.</p>
<p><italic>E-mail address</italic>: <email>yennie.yun@ewha.ac.kr</emai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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