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ART001258854},
author={미노와 요시쯔구},
title={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journal={Cross-Cultural Studies},
issn={1598-0685},
year={2007},
volume={11},
number={2},
pages={163-190},
doi={10.21049/ccs.2007.11.2.163}
TY - JOUR
AU - 미노와 요시쯔구
TI -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JO - Cross-Cultural Studies
PY - 2007
VL - 11
IS - 2
PB - Center for Cross Culture Studies
SP - 163
EP - 190
SN - 1598-0685
AB - 1681년 6월 28일 대마도주 宗義真(소우 요시자네)가 江戶(에도)에서 대마도에 돌아왔다. 對馬藩은 즉시 조선에 사자를 보내어, 대마도주가 돌아온 것을 위로하고, 통신사에 관한 절목을 정하는 問慰譯官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681년 정월, 問慰譯官이 대마도에 도해했을 때에도 일본인과의 밀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講定譯官使에게, 종래의 합의에 따라 초량 왜관 내지는 佐須奈(사수나)浦에서, 배에 실은 짐을 조사하겠다고 하였으나, 조선 측은 이를 거절 하였다. 따라서 역관 스스로가 수행원들의 짐을 조사하기로 하고, 問慰譯官이 도해하였다. 1681년 9월 22일 승선, 23일 출범, 같은 날 佐須奈(사수나)浦에 착선, 10월 2일에 嚴原(이주하라)에 착선하여 같은 달 9일, 역관사들을 宗氏저택에 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 후 통신사 절목에 관한 宗氏측의 견해를, 島主別単 12條, 奉行別単 8條로 정리하여 조선 측에 전달하였다. 이에 관해 역관 기록인 通信使謄錄의 渡海譯官等手本에 의하면, 別單과 전례 등록인 倭人謄録癸未乙未条例를 역관에게 건넨 후, 日光東照宮, 大猷院, 厳有院에 대한 焚香과 致祭등을 둘러싼 양자 간의 논쟁이 있었다고 쓰여 있지만, 宗氏측 기록에는 그러한 기술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10월 28일, 以酊庵을 통해 역관사 일행을 초청한 연석이 있었는데, 통신사 강정에 관한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고, 또한 이 날 있었던 일에 관해서도 渡海譯官等手本에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11월 2일에는 역관사를 宗氏邸宅에 불러 出宴席을 행하였다. 조선에서 보내 온 別幅과, 이에 대한 답례로써 対馬藩이 보낸 別幅을 비교해 보면, 일견 조선 측의 부담이 큰 것 같기도 하지만, 上中下官에게 보낸 선물 가운데에는, 銀山烟器가 3,143개, 煙草 한 근 들이의 작은 상자가 30개, 작은 상자가 2,485개, 染料와 薬材로써 사용되어지는 丹木가 3,513근 2,000Kg 이상으로, 단지 조선만의 부담으로 볼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商賣物로써 통용될 법한 물품이 보내어 졌음을 알 수 있다.訳官船이 交易船인 것은 확실하지만, 渡海訳官들이 작성한 手本에는 이에 관한 어떠한 기술도 남아 있지 않다. 訳官使 随員에 의한 密貿易을 방지하기 위해, 訳官使가 対馬藩에 팔았던 織物들은, 출항 전에 초량 倭館의 代官에게 건네었다. 倭館측이 대마도에 그 물품을 보내고, 대금을 対馬藩에서 訳官에게 주도록 하였다.11월 7일 訳官両使는 厳原를 出帆하여, 22일에 佐須奈浦에 입항하고, 順風을 타, 12월 8일에야 草梁에 着船하였다.12월 14일, 日光東照宮과 厳有院에 致祭는 필요 없다는 幕府로부터의 연락을 받아, 訳官使에 전달하도록 하였지만, 이미 出帆하였기에, 倭館에 연락하여 조선 측에 그 뜻을 전달하고, 총원을 3~400 명으로 대폭 줄여 주도록 요청하였다.조선국 측에서는 같은 서계를 「信使請来差倭書契謄本」에, 日本側이 信使를 요청하였다고 기록함에 비하여, 宗家文書는「遣告信使渡海參判書」에, 通信使渡海의 時期에 관하여 고지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한, 訳官使도 対馬藩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불러들인 것으로, 相談 合議된 것이 아니라, 역관에게 이해시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양국의 기록은 각각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고, 通信使節目 講定은, 通信使를 맞이하는 使者가 草梁에 넘어갔을 때뿐만 아니라, 対馬에 通信使가 渡海한 후 조차, 상황에 따라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KW -
DO - 10.21049/ccs.2007.11.2.163
ER -
미노와 요시쯔구. (2007).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11(2), 163-190.
미노와 요시쯔구. 2007,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vol.11, no.2 pp.163-190. Available from: doi: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11.2 pp.163-190 (2007) : 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2007; 11(2), 163-190. Available from: doi: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11, no.2 (2007) : 163-190.doi: 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11(2), 163-190. doi: 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2007; 11(2) 163-190. doi: 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2007; 11(2), 163-190. Available from: doi:10.21049/ccs.2007.11.2.163
미노와 요시쯔구. "Koutei-Yakkansi in Tenna the First Year" Cross-Cultural Studies 11, no.2 (2007) : 163-190.doi: 10.21049/ccs.2007.11.2.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