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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신연극성립기 창작담론과 영향관계 연구

서연호 1 Poe Baek 2

1고려대학교
2경희대학교

Accredited

ABSTRACT

이 소론은 희곡창작과 실험적인 공연이야말로 연극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한일 신연극성립기의 창작담론과 영향관계를 규명해 보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의 신연극운동은 1886년 8월 연극개량회의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1909년 4월의 문예협회, 같은 해 11월의 자유극장이 결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신연극성립기로 볼 수 있다. 가와카미 오도지로오는 신연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의 신연극운동은 1902년 협률사의 설립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1920년 봄에 극예술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신연극성립기로 볼 수 있다. 임성구는 신연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운동의 출발은 양국 사이에 16년의 차이가 있지만, 단순비교만으로는 신연극성립의 내막과 과정과 실질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창작담론과 작품공연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신연극의 대안으로서 연극개량론이 제기되었는데, 개량의 대상(改良對象)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일본에서는 가부키(歌舞伎)가 대상이었던 데 비해서 한국에서는 개량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의 신연극을 모방하는 것이 개량이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가부키가 아닌 새로운 연극을 창조하려는 모색은 필연적으로 연극창작론, 희곡창작론을 활성화하고 연극논쟁을 치열하게 부채질 했다. 가부키는 에도시대에 확고한 전통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가부키에 대신하여, 과연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일본 사람 누구나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는 신연극을 논의하는 사람조차도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에 대한 강한 반동이 서구 연극에 대한 열정적인 체험과 탐구와 수용을 몰고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쉽게 가능하지 않은 해외체험과 해외순외공연, 해외유학과 해외작품의 번역 및 번안 공연을 당시에 감행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1893년에 가와카미 오도지로오는 멀리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의 낭만주의 연극을 관극했다. 그는 이런 연극을 통해서 스테이지 리얼리즘(stage realism)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6년 후에 다시 그가 극단을 인솔하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공연하며 체험한 것은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주의와 리얼리즘 연극들이었다. 그가 애초의 동지들과 어울려 신파극을 만드는 데 가담하지 않고, 그들과 결별하여 지속적으로 사실극(寫實劇)을 시도한 것은 재차 2년 간에 걸친 유럽연극체험이 원동력이었다. 정말 값지게 얻은 지적 체험이었다. 1909년에 이전에 이루어진 서구 드라마의 번역과 번안, 희곡론의 수용 역시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의 연극개량에 대한 의지는 새로운 극장을 증설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의 임성구는 동시대성(同時代性, contemporaneity)이라는 측면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이룩했지만, 세계연극사라는 측면에서 동시대의 문화환경과 더불어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양식적으로 혁신(革新)의 대상이 막연하였다는 점이다. 일본 연극인들과는 달리 서양의 드라마에 대한 정보도 가진 것이 없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되는 연극담론이나 창작론은 일종의 문명개화론으로서 막연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체험하고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가끔 서울에 순회공연 오는 일본 신파극단들의 무대공연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임성구의 작품제작을 도와주는 그 어떤 극장이나 자본이나 기획이나 판촉의 관행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었다고 해도, 개인적인 후원자의 범주를 넘지 않은 관계였다. 이런 측면은 동시대의 일본문화계와 현격한 차이였다. 그에게 한 작품, 한 작품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의 결과였다. 당시 한일양국의 지식인들이 개화, 문명, 근대, 민권 같은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하였지만 지배국 일본의 입장과 피지배국 조선의 처지는 너무도 현격했다. 임성구는 연극을 시작하는 그날부터 「집회시위법」과 「극장취체법」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혁신적으로 조선의 현실을 표현’할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조선의 현실이 부재한 연극’으로서는 진정한 혁신에 이를 수 없었다. 원천적으로 번역극은 불가능하였고, 그의 능력에 기준한 번안극만이 가능하였다. 번역극을 하자면 번역, 대본, 연기, 무대장치, 의상, 소도구 같은 것을 전부 새로 준비하고, 해당 작품에 대한 문화이해도 전제되어야 하는데, 임성구의 입장이나 처지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서양 희곡을 번역할 수 있는 문학가도 국내에는 없었다. 그가 일본 번안극을 자주 한 것은 신연극의 명분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발언과 몸짓’이었다. 임성구의 연극은 신파조(新派調)를 응응한 신연극이었고, 일본 가와카미류와 유사한 사실극을 지향했다. 그의 혁신단(革新團)이라는 명칭도 가와카미 극단을 모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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