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Social Policy Review 2023 KCI Impact Factor :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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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SN : 1226-0525
- https://journal.kci.go.kr/kasp
pISSN : 1226-0525
The Effect of the Publicness Crisis on the Overcoming Process of Fukushima Nuclear Disaster
1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2014년 3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자력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60%에 달했던 원자력 발전 전력에 대한 찬성의견이 절반이하로 줄어든 것은 다름 아닌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발생한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원전사고로 인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고 원자력 에너지 이용에 대한 반감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원전사고 이전에 일본 국민이 가지고 있던 원자력 에너지 사용에 대한 지지율이 60%에 달했다는 것은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1966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는 한 해 평균 2기씩 그 수를 늘려가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해왔으며, 1970년대에 있었던 두 번의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나 내수시장의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직선적’ 증가 추세를 이어왔다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해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위해서 부지로 선정된 지역의 주민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지금까지 일본전역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 17곳과 원자로 54기 역시 지역주민의 적극적 또는 소극적 동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의 상황과 사고 이후의 정치 상황 또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먼저, 사고 직후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위험을 과소평가한 일본정부와 도쿄전력, 그리고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미디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해외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전달된 정보와 일본 국내 미디어가 전달한 정보의 차이는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고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신화를 뒷받침하고 있던 방사능 영향 예측 네트워크 시스템, ‘스피디’(System for Prediction of Environmental Emergency Dose Information)가 측정한 방사능 확산에 대한 정보가 원전사고 이후 한 달 이상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뒤늦게 밝혀지면서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정보 조작과 은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고 방사능 공포가 일상생활까지 침투했던 2012년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을 제시하면서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아베정권이 일본 국민의 지지 속에 출범한 것 역시 재난이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는 것의 한계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사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후쿠시마 지역에 원자로가 10기나 지어질 수 있었던 이유와 사고 이후에 불거진 정보은폐문제 등을 놓고 볼 때,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자연재해로 인한 우발적 사고라기보다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던 공공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일본사회가 겪고 있던 공공성의 문제란 공공성 실현주체를 국가에 한정시켜온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공공성이 국가의 공공성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공공성을 시민의 공공성까지 확대시키려는 논의는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을까?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은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을까?
본 논문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앞서 제기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분석해 나갈 것이다. 2장에서는 공공성의 일반적 개념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공공성의 개념적 구성요소를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 공개성으로 분류한
1)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역사를 사회사관점에서 분석한 요시오카
2) 원자력 발전소 입지 방법은 토지수용(국가가 공공목적을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포함한 강제적 방법, 원전관련 정보를 통제하여 동의를 얻어내는 방법, 광고나 교육을 통해 주민 동의를 얻는 방법, 인센티브를 부여하는방법 등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입지를 위한 토지수용을 원칙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주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건설을 추진해 왔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인센티브 제도의 대표적 예로는 전원 삼법 교부금(電源三法交付金)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전원개발 촉진세법, 전원개발 촉진대책 특별회계법, 발전용 시설주변 지역 정비법 등 세 가지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원삼법 교부금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 논문의 4장 1절을 참조.
3) 2014년 현재, 일본에는 17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54기의 원자로가 분포하고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의 최대전력은 4만 8,960MW에 달했다. 일본에서 ‘원자력 마을’이란 표현은 원자력 발전소관련 사업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마을을 뜻하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정계, 학계, 산업분야의 유착관계를 드러내는 ‘원전마피아’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후자의 의미에 대한 분석은 4장 2절을 참조.
4) 다나카(田中) 총리는 1974년 원자력 발전소 유치지역에 교부금를 주는 제도를 도입하면서“도쿄에서 만들 수 없는 것을 지방에서 만들어 전기를 보내주고, 그 대신 (지방에는) 돈을 보내주면 된다.”고 하였고,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 쓰레기 매립장이나 미군기지 같은 시설유치와는 달리 손해보상이 아닌 ‘이익유도’라는 측면에서 교섭이 시행되고 교부금이 주어졌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단어가 가진 개념적 의미와는 별도로 일본사회에서 공공성은 오랫동안 정부가 철도, 도로, 발전소 등의 건설을 추진할 때 공공사업에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어왔으며, 생명과 생활에 관련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공의 복지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용어로 이용되어왔다. 공공성의 일본적 맥락에 주목했던 사이토
1990년대를 또 다른 말로 정리해 본다면 버블경제가 붕괴된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재정파탄의 상황에 직면한 일본에서는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 국가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주체로 작동해 온 것에 대한 비판과 공공성 확보라는 이름하에 규모를 늘려온 공공사업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오구마·야마우치·키노시타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1990년대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국가 주도의 공공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반성이 한편으로는 시민적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연구
첫째로, ‘국가=공(公)’, ‘관료제=공(公)’의 중앙집권적 권력의 대항 축에 ‘사(私)’, ‘민(民)’을 놓고 이들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흐름을 들 수 있다. 경제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 추진된 초기의 정치개혁노선 안에는 민주화 및 분권화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민영화 및 규제완화에 중점을 두는 신자유주의 진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공공성과 관련하여 민주주의 진영은 시민사회로부터 발현되는 공공적 관심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신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공공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적 이익 추구 보장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버블 붕괴 이후 기존의 국가 공공성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정책적 시도 역시 혼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선은 고이즈미(小泉) 내각이 출범한 2001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정책이 중점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민영화와 규제완화의 방향으로 정리되어 갔는데 고이즈미 내각이 실시한 우정(郵政)민영화를 축으로 하는 ‘관에서 민으로’의 정책흐름과 ‘중앙에서 지방으로’란 슬로건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개혁노선’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이후 일본에서는 공기업과 지방뿐만 아니라 근로자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도 노동자파견법을 개정하여 비정규직인 파견 노동의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등 효율성과 사적이윤추구를 보장하는 정책이 다수 시행되었고, 이와 같은 정책은 이제까지 기업이 정규고용자에 대한 복지혜택과 연금혜택을 제공하면서 국가의 복지제도를 보완해 온 일본식 고용체계와 복지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공공성의 중요한 요소인 공정성의 수준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공공성을 네셔널리즘의 틀에 맞춰 재정의하려는 시도, 즉 공공성을 ‘국민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등장하였다
공공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도의 공공성 확보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일본의 공공성 논의는 버블 경제 붕괴라는 국내적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나타난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국가가 담당해야 할 최소한의 공공성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공공성 논의와 네셔널리즘에 입각한 공공성 논의가 뒤섞여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혼재가 결과적으로 규제완화를 통한 기업 이윤 추구의 흐름을 가속화 시킨 한편, 근로자 고용상태의 불안을 초래하여 사회의 안전망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 안전망을 확보해 줄 강한 국가에 대한 갈망을 생산해 냈다. 그렇다면, 경제 버블 붕괴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일본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이어지는 3장에서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의 일본상황을 사례와 지표로 나누어 각 부문의 공공성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검토해 나갈 것이다.
경제 버블 붕괴와 경기침체의 장기화 같은 경제적 변화는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본 장에서는 공공성의 구성 요소로 사용하고 있는 네 가지 개념 중 공익성, 공정성, 공민성을 사례와 지표로 나누어 일본사회의 공공성의 변화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례 부문에서는 국가주도의 공익성, 공정성의 담보방식이 버블 경제 붕괴와 세계화과정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과정을 공공사업을 통해 살펴보고 지표부문에서는 노동력조사, 유권자 의식조사의 시계열 데이터를 바탕으로 1990년대부터 2000년 이후까지 공민성과 관련된 지표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검토할 것이다.
일본의 공공사업은 패전 이후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 구제하기 위해 연합군총사령부가 60억 원의 공공사업비를 들여 100만 명에서 125만 명 규모의 일자리를 제공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까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도로, 항만시설 확충과 같은 산업기반 시설 건설 분야에 집중되던 공공사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공해문제가 대두되면서 환경위생, 상하수도, 후생복지 등 도시와 생활기반 마련을 위한 사업으로 그 분야가 확장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산업기반시설과 생활기반시설을 위한 공공사업의 비율이 비슷한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의 산업은 제조업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항만을 통해 수출하는 중공업이 수출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각지에 항만과 도로를 건설하는 공공사업은 국가 전체의 산업 경쟁력을 높임과 동시에 균형발전을 이루는 ‘공공적’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버블시기에 제조업의 주력분야가 중공업에서 자동차, 전기, 조립 산업으로 옮겨지면서 이와 같은 산업이 집중되어 있던 도쿄, 오사카, 나고야 같은 몇몇의 도심을 제외한 지방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도심지역의 부동산 버블을 주축으로 한 버블경제가 지속되는 동안 도시 지방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버블경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규모가 축소되어온 일본의 공공사업은 몇 가지의 사건을 통해 그 규모가 증가하게 된다. 첫째로, 1989년부터 1990년까지 5 차례에 걸쳐 실시된 미일구조협의를 들 수 있다. 이 협의에서 미국은 최종보고에서 일본이 수출산업에 재원을 투자하는 것보다 공공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 놓았고 이에 대해 일본은 향후 10년간 430억 엔을 공공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공공투자기본계획’을 책정하여 그 내용이 1991년 예산부터 반영되게 되었다.
둘째로, 버블 경제가 붕괴된 이후 악화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1992년부터 2000년까지 8차례의 공공사업관련 경제대책이 실시되면서 공공사업의 규모가 증가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시행된 대책은 1992년 공공사업과 중소기업대책을 골자로 하는 10조 엔 규모의 ‘종합경제대책’을 시작으로 적게는 6조 엔 많게는 16조 엔 이상의 재원이 공공사업에 투자되었다
이와 같은 공공사업 규모의 증가는
그러나 도시와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고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자극책으로 시행된 공공사업은 지방 인구 고령화 문제가 심화되고 경제 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워진 1990년대 이후, 본래 공공사업이 추구하던 공공성을 충분히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지방 산업이 활기를 띠었던 고도 성장기에는 공공사업으로 건설한 항만이나, 교통인프라가 지역 산업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중공업을 비롯한 지방 산업이 쇠퇴하는 시기에 건설된 산업기반 시설은 건축업을 중심으로 한 단기적 일자리를 제공할 뿐, 지역의 자립적 역량을 되살리는 역할은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 실시된 공공사업 투자액을 부문별로 정리한
더욱이 지역 상공회의 합의가 없을 경우 대형점포의 출점이 어려웠던 ‘대규모소매점포법’(1973년 제정)이 미일구조협의의 영향으로 1991년에 개정되면서 공공사업으로 만들어진 지방 곳곳의 대형도로 주변에는 대규모 종합 쇼핑몰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일반 상점가는 급속도로 위축일로에 접어들었고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지방의 소매점 수는 이전의 약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들었다(小熊, 2014: 31-32).
이처럼 전후부터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던 ‘공공성’의 확보는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경제 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워진 1990년대에 들어 도시 지방간의 격차 완화라는 공정성도, 국가 전체의 이익 추구라는 공익성도 달성하지 못한 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공사업을 통한 공공성 확보가 한계에 직면한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은 어떤 형태로 변화되어 갔을까? 다음 절에서는 경기 장기침체가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에 미친 영향을 세계가치관조사, 유권자 의식조사 등의 시계열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해보고자 한다.
일본 시민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서구의 자원봉사 활동이나 종교를 기반으로 한 시민단체 활동과 달리 초나이카이(町內會)처럼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조직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의 단체 및 조직 가입률은 1990년대 후반 이후 급속하게 저하되고 있는데 일본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 활동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자치회의 가입률은 1980년대까지 65%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00년에는 50%, 2007년에는 40.4%까지 떨어졌다. 지연 조직의 참가율이 떨어졌다는 것은 조직 활동에 참여하는 새로운 구성원이 줄어들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기존의 조직 구성원 활동이 저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사회의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가 진행된 것은 밖으로부터의 유입과 내부의 활동역량을 동시에 저하시키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 참가율은 단순히 일본사회의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인회나 청년회 같은 특정 인구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단체의 가입율도 1990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7년에는 6.6%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까지 20%미만이었던 비가입자의 비율이 2000년에 31.9%에서 2007년 36.4%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20% 가까이 증가하여 일본 시민사회의 활동기반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카모토
이와 같은 시민 활동 조직의 참가율 변화는 시민의 의식수준이 반영된 세계 가치관 조사의 데이터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의 참여와 연대에 기반이 되는 일반적 신뢰의 정도를 시계열로 살펴본
일본 사회 전체적으로 일반적 신뢰가 급격히 감소한 것의 의미를 각 대상에 대한 신뢰의 정도를 측정한 2010년도 세계 가치관 조사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가족에 대한 신뢰도가 99%로 매우 높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84.5%, 이웃에 대한 신뢰도가 61.7%를 나타낸다. 그 반면 국적이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22.8%,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16.5%,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10.9%로 일반적인 타자와 특수한 타자에 대한 신뢰도 사이에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에 따른 신뢰도의 현격한 차이는 사회 구성원 간의 협력과 소통에 영향을 주고 무엇이 공익과 관련된 것인가를 결정해 가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본사회 전체로 봤을 때 경기침체의 장기화는 국가의 공공성 수준뿐만 아니라 시민의 공공성 수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공공성 문제는 1990년대 이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본 장에서 다루지 않은 공공성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공개성의 경우 원자력 에너지와 같은 전력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비밀주의에 싸여 있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신화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지켜온 ‘폐쇄적 정치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사례를 통해 한 사회의 공공성 수준이 위험에 대한 대처와 장기적 극복방향 설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5)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에서 공공사업과 관련하여 1992년 종합 경제대책(10.7조 엔), 1993년 4월 신종합경제대책(13.2조 엔), 1993년 9월 긴급경제대책(6.15조 엔), 1994년 종합경제대책(15.25조 엔), 1995년 대형경제대책14.22조 엔), 1998년 종합경제대책(16.65조 엔), 1999년 경제신생대책(약 18조 엔), 2000년 신발전정책(약 11억엔)등 총 8번의 경제대책이 시행되었다.
일본은 도쿄전력을 포함한 10개의 전력회사가 일본 각 지역에서 발전, 송전, 배전, 판매등 전력 생산부터 최종 수요자에 대한 공급까지 모든 단계의 사업을 독점하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의 경우도 10개의 수직 종합형 기업에 의해 지역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전력공급이 이루어져왔으며, 원자력 에너지 이용 또한 국책으로 추진되어 몇 곳의 지역에 대규모발전소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왔다. 2011년 일어났던 원전사고 피해지역인 후쿠시마도 수력발전소가 9곳, 화력발전소가 5곳, 풍력발전소와 바이오매스 발전소가 각각 2곳, 지열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소가 각각 1곳,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가 2곳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원자력 발전소만 놓고 보더라도 후쿠시마는 도쿄전력회사의 15%를 차지하는 2개의 발전소와 10기의 원자로가 집중되어 있는 ‘원자력 마을’이다. 후쿠시마에 여러 개의 원자로가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인구변화와 산업구조 변화 측면, 일본정부의 원자력 발전소 입지 혜택의 구조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후쿠시마 지역이 위치한 일본의 동북지방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원 의존형 개발이 주를 이루어 왔고, 1970년대부터 도심에 본사를 둔 중화학 공장이나 전기, 기계 부품 공장이 집적하기 시작한 곳으로 1990년대 이후 제조업 관련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받아들이게 된 중요한원인이 되었다.
이 외에 후쿠시마에 기자력발전소가 집중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일본 정부의 ‘이익유도형’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알드리치
전원3법은 크게 전기 소비자 개개인이 납부하는 전기료에서 부담하게 하는 전원개발촉진세법, 전원개발촉진세법으로 얻은 수입을 특별회계로 관리하기 위한 전원개발촉진대책특별회계법, 특별회계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입지한 곳에 재원을 교부하는 법적 근거가 되는 발전용 시설 주변 지역 정비법 이렇게 세 가지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후쿠시마 지역의 원전과 관련된 고정자산세 수입이 가장 많았던 1983년에는 약 18억 엔에 달하였으며 이는 당시 지역 총 세수입의 54%를 차지하는 수준으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원전에 대한 지역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
교부금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공공성의 문제는 일본 공공사업의 최대 목적이라고 할수 있는 고용창출이란 측면에서 볼 때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2001년 도쿄전력이 공개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고용현황을 보면, 제1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619개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7108명, 제2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499개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4552명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유지를 통해 약 12000명 규모의 고용이 창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원삼법을 통한 교부금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고용은 원자로 건설시기에 집중되는 일시적인 것일 경우가 많으며, 고용 창출이 붐을 이루는 건설 시기가 지나고 나면 농촌지역의 산업구조와 취업구조가 심각하게 변형되는 문제를 낳았다. 지역 내에서 전력관련 서비스업이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건축업 종사자가 급증하는 것은 곧 본래의 지역 경제 구조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전소가 지어지고 설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지역 경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원자로 추가건설이라는 국가 주도의 공공사업 의존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이전까지 후쿠시마 지역은 세계화 흐름의 가속화로 인한 공장의 해외 이전과 산업구조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1980년대까지 10기의 원자로를 건설을 유치하면서 공공사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을정착시켜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공사업의 혜택으로 선전되었던 전원3법에 의한 교부금은 단기적인 것 일 뿐만 아니라 노후한 원자로를 가동시키거나 핵연료를 많이 저장하면 할수록 지역 교부금이 증가하는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공공사업이 만들어 낸 고용효과도 원자로 건설 시기에 집중되어 지역 경제유지를 위해 원자로 건설을 추가적으로 유치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어떤 형태로 가시화 되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다음 절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나타난 공개성의 문제부터 짚어보도록 하겠다.
동일본 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분명한 인재(人災)였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불만(frustration)의 근원은 사고 당사자인 도쿄전력과 정부의 설명책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 매스미디어가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사고에 의해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것인지,누가 책임을 지고 사고에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던 것에서 찾을수 있다(마쓰오카, 2013: 51-52).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정보자체가 갖는 중요성과 정보의 공개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는 원전관련 재해가 피해자 스스로 피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미즈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경제 산업성 원자력 안전·보안원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국제 원자력 사고 평가척도(International Nuclear Event Scale, INES)
마사무라
미디어와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일시적 현상을 넘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문부과학성 웹사이트에 방사능 영향 예측 네트워크 시스템인 스피디를 통해 원전사고 직후부터 측정된 방사능 경로 지도가 공개된 2011년 4월 26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마쓰오카(松岡俊二, 2013)에 따르면 문부과학성 및 원자력 안전 보안원은 사고 직후부터 스피디를 통해 수 천 번의 확산 예측을 실시해왔으며, 그 결과 일본정부가 사고 직후 방사능 오염이 방사선 방향으로 확산될 것이란 가정 하에 실시했던 계획 피난과는 달리, 실제로는 북서쪽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했고, 피난 대상지역이 아니었던 나미에마치(浪江町) 지역이 100시간 동안 30밀리시버트에 달하는 방사능에 노출된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가 공식적으로 알려지고 이 지역이 계획적 피난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계획피난이 이루어진 3월15일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4월11일이었다.
그렇다면 원전사고 직후부터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이 미디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을 하고 방사능 확산을 예측한 데이터를 무시한 피난 정책이 내려지는 등 공개성 둘러싼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무엇일까?
앞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원자력 에너지 시스템은 도쿄전력을 포함한 9개의 전력회사가 지역 독점적 형식을 띠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에너지 사용량이 장기간에 걸쳐 ‘직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원자력 개발체재가 가진 특징 중하나인 ‘서브 거버먼트 모델’(subgovernment model)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요시오카
그러나 지역주민의 적극적·소극적 ‘동의’를 통해 일본 전역에 원자력 발전소가 꾸준히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공공적’ 목적을 위한 사업이라는 사업의 성격 이외에도 원자력에너지의 안전성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믿음, 즉 ‘안전신화’가 가진 힘 때문이었다. 우찌하시
이와 같은 안전신화를 만들어 온 이익공유형 폐쇄집단을 일본에서는‘원자력 마을’(原子力ムラ)이라고 부르는데, 원자력 마을은 앞서 언급한 원자력위원회를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정계·학계·산업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1990년대 이후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세계화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각 산업이 생존을 위해 구조조정이나 가격경쟁을 위한 개혁방안을 내놓을 때에도 여전히 독점을 행사한 ‘마지막 기득권층’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의 ‘마지막 기득권층’의 철저한 담합과 비밀주의가 예상밖의 자연재해를 계기로 가시화된 시스템의 실패, 즉, ‘구조적인 재해(構造災)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중앙 원자력 마을과 지방 원자력 마을의 이해가 결탁되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가 철저히 차단된 채 원전 건설 사업이 국책, 그 중에서도 공공성을 띠는 공공사업의 형태로 추진되어 온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에 나타난 원자력 기술 전문가들의 발언 내용, 사고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보도가 지속된 것, 그리고 방사능 오염 확산에 대한 데이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표하지 않았던 것 모두 ‘원자력 마을’이란 이익 공유형 폐쇄집단의 통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둘러싼 일본사회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일본 국민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도쿄전력을 중심으로 한 원자력 마을에 대해, 그리고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매스미디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나갔을까? 이어서 일본사회의 공공성 수준 변화와 원전관련 단체의 비밀주의가 원전사고의 극복과정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방사능 오염문제가 일상의 먹거리 문제까지 침투하면서 이제까지 미디어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많은 시민들이 미디어에 불신을 갖게 되었다. 한 예로, 미디어에 관한 전국 여론조사(メディアに關する全國世論調査)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1년 후인 2012년의 미디어 신뢰도는 NHK가 74.3%에서 70.1%로, 신문이 72%에서 68.9%로, 민영방송이 63.8%에서 60.3%로 떨어졌다
사고의 원인이 단순한 자연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 마을과 같은 일본의 오래된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원전사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 원전 재가동 반대 운동과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1990년대 이후 자발적 조직 참가율이 떨어지는 등 시민사회의 역량이 약화되던 때에 다시 활기를 찾은 시민 활동에 주목하는 연구도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공개성의 위기를 계기로 활발해진 일본의 시민운동은 원전사고 후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 국민들 사이에 방사능 오염문제나 원전재가동 문제가 운동의 새로운 이슈로 부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문제가 실제적 정치이슈로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2012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처리가 한창 이루어지던 때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는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던 민주당의 3여 년에 걸친 집권이 막을 내리고 자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원전사고 이후 안전문제가 시민운동의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정치적 선택에서 원전재가동을 추진하는 자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왜 안전문제는 정치적 이슈로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 나가기 위해 먼저 제46회 중의원의원 총선거 전국의식조사(第 46 回 衆議院議員 總選擧 全國意識調査)의 데이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선거를 하면서 고려했던 사항을 연령별로 정리한
경기정책과 밀접히 맞물려 있는 ‘고용대책’의 경우 40~50대가 35.1%, 20~30대가 28.5%, 60대 이상이 26.1%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이 고려했던 사항이 경기 및 고용(20~30대 62%, 40~50대 71.5%), 연금문제(70.6%)였던 것과 비교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경제문제의 비중이 높아진 것과 연령별 투표 고려사항이 경기관련 이슈로 일원화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유권자의 연령대와 상관없이 경기불황에 대한 불안이 확산된 것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에 일본사회가 놓여 있던 공정성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의 일본사회는 3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도시와 지방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가주도로 실시한 공공사업이 결과적으로 지방의 역량을 약화시켜 공공사업에 의존하는 지역경제 사이클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여기에 1990년대부터 가속화된 세계화로 국가 성장을 이끌어 왔던 제조업 공장이 대부분 해외로 이전하고 1997년 이후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가 더해지면서 일본은 고도 성장기에 구축해온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고용형태
일본의 경우 남성을 중심으로 한 신규 대졸자 정규채용과 종신고용제도를 통해 , 기업복지 등 기업을 사회 안전망으로 활용하면서 사회의 공정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비정규노동자의 증가는 곧 공공성의 한 측면인 공정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와 같은 공정성 위기의 장기화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재난의 극복과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가 2012년 중의원 선거 결과에서 드러난 안전경제 대립론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일본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전(前) 경제산업성 관료 코가 시게아키(古賀茂明)는 아베노믹스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지금의 일본이 경제적으로 순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해도 일단 경제를 살리는 것이 먼저라고⋯⋯ 아베노믹스라는 것으로 경제가 좋아진다고,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출이 증가하고 기업 이익이 증가하고, 고용이 늘어나고 임금도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원전문제가 나오면 일단 경제문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원전을 재가동시키는 것이 전기세를 낮추는 길이고, 그렇게 해야 기업도 도움을 받기 때문에 국가가 풍요해진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재가동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일본경제가 매우 잘 굴러가서 전기료가 조금 더 오르는것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원자력 마을이 정치계를 움직여서 원전을 재가동 시킨다고 해도 시민측이 반발할 힘이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도 그렇게 간단히 재가동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인터뷰 일시 2014.6.26)
인터뷰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침체의 장기화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불거진 방사능 오염이나 원전 재가동의 문제를 경제 회복의 장애요소로 취급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원전사고를 경제 성장으로 극복하고자 한 논의는 대담한 금융정책과, 기동적인 재정정책, 민간투자를 환기시키는 성장전략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원전 재가동과 관련하여 아베내각은 2013년 6월에 원전 안전장치 설치가 완비되지 않아도 안전 검사 이후 5년 이내에 안전 장치를 마련하면 재가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전 신 규제기준을 발표하였으며 2014년 4월에는 원자력 에너지를 일본의 중요한 기본 에너지원으로 지정하고 원전 재가동과 새로운 원자로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에너지 기본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아베내각은 그동안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 엔화약세 유도 정책을 실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가 개선되지 않은 이유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가동이 중지되면서 광물성 연료 수입이 증가한 것에서 찾고 있다
원전 재가동이 경제회복과 경제성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안전·경제 대립론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어난 시민사회의 반성과 그 반성을 통해 등장한 원전제로 정책노선을 원점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와 같은 정책을 뒷받침한 것은 경기 대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안전문제보다 경제회복, 경제성장의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경제적 환경이 장기경기침체와 이로 인한 고용형태의 불안 확산 등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기능부전에 의한 공공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 안전신화의 형성주체와 특징에 대해서는 4장 1절의 논의를 참조.
7) 전원삼법은 원자력 발전이외의 다른 전력 에너지 발전소 건설에도 적용되지만 다음의 교부금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교부금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전원삼법을 통해 만들어진 교부금 중 원자력 에너지 발전과 관련된 교부금 종류는 크게 전원 입지지역 대책 교부금, 전원 입지 등 추진 대책 교부금, 전원 지역진흥 촉진 사업비 보조금의 세 분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교부금은 하위의 교부금 명목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전원 입지지역 대책 교부금에는 전원입지등초기대책교부금, 전원입지촉진대책교부금, 원자력발전 시설 등 주변 지역 교부금, 전력 이출등 교부금, 원자력 발전시설 등 입지지역 장기발전 대책 교부금이 포함되어 있고, 전원입지 등 촉진 대책 교부금에는 원자력 발전 시설 입지 지역 공생 교부금, 핵 연료 사이클 교부금, 원자력 발전 시설 등 입지 지역 특별 교부금, 광고 및 안전 등 대책 교부금이 포함되어 있다(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 2010: 6)
8) 朝日新聞(2011). “神話の陰に-福島原發40年(4)”, 2011.5.28
9) 총무성 시정촌결산상황조
10) 국제원자력사고평가척도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경제협력개발기구원자력기관(OECD)가 기술전문가·미디어와 대중사이에 사고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한 의견교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책정한 척도다. 인구와 환경, 방사능의 관리 및 통제, 피해의 동심원적 확산(defense in depth)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1단계에서 7단계까지 구분되어 있다. 이 중 레벨1에서 3까지는 사건(incident)으로 , 레벨4부터 7까지는 사고(accident)로 분류된다. 레벨1에서 3까지는 아노미, 사건, 중대한 사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레벨4에서 7까지는 시설 내부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시설 외부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대형사고, 심각한 사고가 포함되어 있다(
11) 구조재(構造災)란, 과학, 기술, 사회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재해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지진과 쓰나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과학의 실패만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주요개념이다. 이 개념을 고안한 마츠모토(松本)는 그의 책에서 과학과 기술, 사회를 잇는 여러 개의 채널에 대한 제도설계의 형태와 그곳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이질적인 주체가 다양하게 엮어내는 방식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구조재가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기술적 문제를 넘어선 조직 구조와 매뉴얼의 작동방식에 연결되어 있는 문제임을 밝혔다
12) 일본재건이니시어티브의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민간조사조(民間事故調)로, 2011년 9월 발족된 이후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에 대한 원인과 피해상황, 사고의 직접적 원인, 사고 배경, 구조적 문제점 등에 대해 민간의 독립된 입장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2012년 조사검증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재건이니시어티브 홈페이지,
13) 미디어에 관한 전국여론조사 데이터,
14) 일례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된 시민활동의 상황을 전국단위에서 조사한 후쿠시마 원전사고후의 시민사회 활동에 대한 단체조사(福島原發事故後の市民社會の活動に關する團體調査, 2013년 실시)에 따르면 원전사고 이후 결성된 시민단체 중 73.3%는 원전사고와 재해에 대한 대책이 불충분하다는 인식에서, 43.8%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정부의 대응이나 도쿄전력의 사고 처리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시민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응답하고 있다.
15)
16) 2011년 6월에 열린 대표적인 탈 원전 운동의 참가자를 연령별로 분석한
17) 일본형 공업사회의 고용형태의 특징으로는 대학졸업자의 정기적 일괄적 채용방식, 종신고용제도,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기업별(기업내) 노동조합결성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본 논문은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지속된 장기 경제 불황이 일본사회의 공공성 기반에 미친 영향을 국가주도의 공공사업의 문제점을 통해 분석하고 일본사회의 공공성 역량 저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정책 방향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본 논문을 통해 발견한 점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도시와 지방 간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기 자극책으로 시행한 공공사업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에 의존하는 지방 경제 시스템을 낳았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공공사업은 국가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해 온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와 지방간 격차완화와 같은 공익성과 공정성 회복의 방안이 공공사업이라는 국가 주도의 사업에 한정되고 사업의 내용이 도로 건설과 같은 교통 인프라 건설에 집중되면서 공공사업은 지역경제 활성화나 지역 역량 강화와 같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더욱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피해지역인 후쿠시마의 경우 원자로 건설을 통한 수입이 원자로 건설시기에 집중되고 교부금의 용도가 공공시설 건설과 같은 인프라 확충 분야에 한정되어 지역 산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원자로 건설로 창출되는 고용효과가 단기적이었던 것이 원자로 추가 건설을 수용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공공사업을 통한 공공성 확보는 버블 경제 붕괴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일본 사회의 공공성 역량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해 볼 수 있다.
둘째, 일본사회가 겪고 있던 공공성의 위기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의 공개성 문제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경제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1990년대부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장기적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남성, 정사원고용, 종신 고용이라는 고용형태가 유동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 가운데 기업을 중심으로 보장되던 사원복지와 연금제도 등 일본형 사회안전망 제도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이와 같은 공정성의 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사고의 심각성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거나 방사능 오염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여 그에 대한 반발로 안전문제에 대한 시민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문제가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안전·경제 대립론이 정치적 이슈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전 재가동의 의지가 강한 자민당이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 아베내각이 경제 성장을 위해 원전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한 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안전문제에 대한 우려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원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와 같은 의식은 일본의 장기적 경기침체와 그로 인한 일본사회의 공공성 역량의 저하가 미친 영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정 단체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열려 있는 것, 전반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공공성의 본래 개념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일본이 겪어온 공공성 위기는 공공성을 담보하는 주체를 국가에 한정한 것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 건설에만 사업 분야를 제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국가가 담보하는 공공성 안에 원자력 마을과 같은 비밀주의 조직과 전원3법 교부금과 같은 공정성과 공익성이 훼손된 장치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위험성과 방사능 오염의 공포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면서도 일본은 결국 원전 재가동이 경제 회복과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 된다는 안전·경제 대립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이 모두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공공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원전 재가동이외의 경제 성장을 위한 선택지나 원전 재가동과 핵연료 폐기물 처리에 드는 비용, 그리고 아베노믹스를 통해 과연 누가 경제 성장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합의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공공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일본의 안전·경제 대립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이 한국사회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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