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ART002740492},
author={許 寿 童},
title={No Title},
journal={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issn={1738-3668},
year={2008},
number={8},
pages={87-116}
TY - JOUR
AU - 許 寿 童
TI - No Title
JO -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PY - 2008
VL - null
IS - 8
PB -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SP - 87
EP - 116
SN - 1738-3668
AB - 간도사건 직후 日高丙子郎은 龍井에다가 ‘民族協和’를 내세워 光明會를설립하였다. 그리고 어학교 등 조선인 학교를 경영하였다. 중국 정부의 많은인사 그리고 적지 않은 조선인이 이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日高丙子郎과광명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얼마간의 연구가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평가는 상반되었다. 일본에서는 광명회의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그 근대성을 주목하였으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반면중국에서는 日高丙子郎과 광명회의 활동을 ‘민족 동화’를 위한 ‘음모’로 보고, 그에 반대한 운동을 주목하였다. 한국에서의 평가도 중국과 유사하다.
본고는 선행 연구에 바탕으로 광명회의 교육 활동과 그 위상을 살펴보고, 일본의 간도침략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日高丙子郎은 침략주의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日高丙子郎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간도 이상향’의 구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민족협화’의 이념은 믿음에 불과하였다. 물론 중국 관헌이나 조선인 일부가 광명회를 지지하긴 했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특수한 체제 속에서 나온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다양한 사정으로 인하여 광명회의 사업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광명회는 많은 조선인에게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목적은 조선인의 동화와제국 이념의 강요에 있었다. 광명회가 실시한 교육은 근대적 교육이라기보다 식민지 교육이었던 것이다.
KW -
DO -
UR -
ER -
許 寿 童. (2008).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8, 87-116.
許 寿 童. 2008,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no.8, pp.87-116.
許 寿 童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8 pp.87-116 (2008) : 87.
許 寿 童. No Title. 2008; 8 : 87-116.
許 寿 童.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no.8(2008) : 87-116.
許 寿 童.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8, 87-116.
許 寿 童.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2008; 8 87-116.
許 寿 童. No Title. 2008; 8 : 87-116.
許 寿 童. "No Title"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no.8(2008) : 87-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