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溥(1454-1504)는 耽津人으로 자는 淵淵 호는 錦南인데 進士 澤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異質하여 剛毅精敏했다고 한다. 금남은 점필재의 문하로서 戊午士禍(1498) 시 그의 집안에 점필재집이 있다는 이유로 訊問을 받고 杖刑을 받은 뒤 端川에 유배되었다가 甲子士禍(1504) 때 處刑되었다. 금남은 호남인으로서 佔畢齋의 학문을 직접 받아들여 이 고장 士林의 발흥에 크게 기여한 첫 번째 세대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 점필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호남 선비로는 竹林 曺秀文인데 그는 담양 竹林書院에서 배향되고 있거니와 그의 아들 雲谷 曺浩는 점필재의 문하로서 汝忠, 汝諶 등 문학으로 훌륭한 후손을 많이 배출했다.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로 이어지는 학맥과 함께 호남 사림의 깊이와 폭을 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최부는 후생의 敎導에 亹亹不倦하였는데 해남의 邑을 밑아 있을 때 그 곳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文學이란 게 없고 禮儀 또한 荒陋했는데 금남은 正論으로써 陋俗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이때 漁樵隱 尹孝貞과 林遇利 그리고 柳桂隣 등을 부지런히 가르쳤는바 이들을 보고 온 고을 사람들이 翕然하여 마침내 文獻之邦이 되게 했다고 한다. 호남의 사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 말 할 수 있겠다. 먼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王朝 交替期(1392)와 世祖의 王位 簒奪 事件(1455) 때 입향 또는 낙향해 온 세력과 다음으로는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이른바 영남을 통하여 호남에 뿌리를 내린 계열을 들 수 있겠다. 호남 사림은 대체로 金宏弼, 崔溥, 宋欽, 朴祥, 李恒, 金安國 계열 등으로 나누는데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朴祥을 제외한 모두가 金宗直 淵源임을 알 수 있다. 宋欽도 김굉필을 私淑했으니 송흠을 연원한 박상도 어떤 면에서는 같은 뿌리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최부 계열은 주로 海南과 羅州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금남 학맥은 尹孝貞, 林遇利, 柳桂隣, 羅晊, 尹衢, 尹巷, 尹行, 尹復, 柳成春, 柳希春, 李仲虎, 鄭介淸, 羅士忱(錦南의 外孫子), 羅德明 등 6 兄弟, 羅緯素(羅德埈의 子) 등으로 이어진다. 최부의 호남 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로 이어지는 사림의 正脈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사림들은 韓國 儒學史 上 또는 韓國文學史 上과 韓國 義兵史 등에서 뚜렷한 足跡을 남긴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문하들이 이룬 호남학에서의 문학적 성과는 浪漫的 情緖라는 風流性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데서, 곧 溪山風流를 표방한 부류와는 시 세계를 달리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의 史學, 文學, 經學 등 학문적 영향은 해남과 나주를 중심으로 湖南學의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文學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羅緯素: 1582-1666) 약 2세기 동안 그 전통이 활발히 이어져 나왔고, 그 이후에도 羅景煥(性菴家藏), 鄭錫珍(蘭坡遺稿), 羅允煦(錦坡集), 羅燾圭 등으로 20세기까지 계승되면서 근현대 문학으로 移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