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애란의 데리시에서 자라난 브라이언 프리엘은 그가 방학이 되면 방문하던 도네갈군에 가상의 도시 벨리배그를 창조하여 그의 중요 작품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인 데리시에서 그가 억압, 좌절, 불행을 느꼈다면 애란 공화국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도네갈군에서는 자유를 숨쉬었다. 이러한 경험은 프리엘이 그의 극 안에서 희망과 절망, 인정과 의심, 과거와 현재, 고국과 귀향, 전통과 현대의 경계선에 서 있는 극중 인물들을 중점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엘이 태어난 섬 국가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전통적인 극작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ꡔ믿음의 치유자ꡕ는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찬 현실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극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네개의 회상의 독백이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독백으로 이루어진 극을 통하여 믿음의 치유자인 프랭크, 그의 부인인 그레이스, 프랭크가 행하는 쇼의 지배인인 테디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같은 사건을 회상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 어긋나며 반복되고 과장된다. 이는 인간은 기억 속에서조차 끊임없이 허구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랭크, 그래이스, 테디, 그리고 치유를 받기 위해서 프랭크를 찾아오는 장애인 모두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삶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허구의 세계를 원한다. 그들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는 창조적인 세계를 향한 집념에 사로 잡혀 있다. 프랭크에게는 그들이 허구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프랭크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프리엘은 믿음의 치유자가 행하는 치유의 행위는 작가의 작품 활동과 같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독자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도 있고 외면당할 수도 있는 것처럼 프랭크의 치유 행위는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프랭크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때로는 나타난다.
프랭크는 웨일즈나 스코트란드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치유를 해 왔고 그러한 생활에 지치고 치유의 능력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할 때 고향인 벨리배그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그는 단순한 연기자로 변모한다. 프랭크는 치유의 행위가 성공하기도 했던 과거의 경험과는 달리 실패를 확신하며 자신을 위축시키는 공포심도 없이 죽음을 찾는다. 낯선 애란인들이 저지르는 살인 사건은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들의 삶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상상으로 가득 찬 허구의 세계에 대한 추구와 집념은 프랭크를 이끌어 오던 삶의 근원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죽음을 초래하며 그의 죽음은 그레이스를 자살로, 테디는 술 중독자로, 그리고 벨리배그의 타인 네 명을 살인자로 바꾼다. 그의 죽음은 끝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며 또한 자신이 창조해낸 성공적인 허구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