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은 유, 불, 도 삼가의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儒道思想 및 현실 생활에서의 충돌과 조화만을 다루었다. 도연명은 어떤 때는 유가를 중시하였고, 어떤 때는 도가에 중시하였는데, 현실 생활에서 충돌과 모순이 있는 듯하다. 충돌과 모순을 어떻게 풀었는가? 어떻게 儒道思想을 조화롭게 하였는가? 이것이 본문에서 탐구한 중요 관건 및 중점이다.
중국 고대소설은 변해서 정의 내려지지 않은 명사로, 주로 패사소설, 기문소설, 평화소설, 장회소설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소설이란 명칭은 이 네 가지 전혀 다른 문체를 근대에 와서 총칭한 것이다. 고대 소설은 문사에서 비롯해서, 또한 문사를 뛰어넘어, 문사에 녹아들었다. 그것은 詩, 文, 史 등의 다양한 문체를 겸비하면서도, 이야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허구적이기도 하고 사실적이기도 하며, 고문과 백화, 장편과 단편이 있을 수 있지만 산문체를 위주로 하고 변려체를 운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설관은 고대 소설관의 집대성이자, 현대 소설관의 원류라 할 수 있다.
文人文化의 형성과 유행은 명청시기 사회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陽明心學의 유행, 상업경제의 발전, 인쇄술의 발전 등 사회전반에 걸친 변화는 당시 문인들의 사상과 문화 및 창작 경향을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玩物喪志’라 하여 금기시하였던 사물에 대한 ‘玩賞’, 특히 ‘古董書畫’의 수집 및 감상과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된 ‘癖’과 ‘疵’의 추구경향이 당시 문인문화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완상문화는 명청시기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전에는 주로 소수의 귀족들과 상층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것이 명대 중엽 이후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의 번영이 가져온 사회의 활력을 바탕으로 전체 문인사회와 부유한 상인계층으로 확산되었다.
명청 문인들의 완상문화는 사신단을 따라 연행길에 올랐던 문인들과 그 시기에 출판된 서적들의 유입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문인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주로 경화세족을 중심으로 조선 문인사회에 명청 서적의 열독과 수집, 고동서화의 수집과 감상 등의 완상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사유와 지식, 문체 등은 조선 문인들의 문장과 사상 및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문인사회의 변화를 감지한 당시 조선의 왕 正祖는 이것이 장차 봉건사회질서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여겨, ‘文體反正’의 기치 아래 문인들에게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문체반정은 주로 상층의 사대부들을 제약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이후 상층 문인들의 완상문화는 확연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완상문화는 일반 문인들이나 중인ㆍ서얼 계층으로 널리 확산되어 소품문이라는 문체를 빌어 표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완상문화의 추구, 즉 벽과 치에 대한 추구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From the May Fourth Movement to the end of the 20th century, the theme of love in Chinese feminine literature presents a strange developing trend. It reflects love pursuing and disillusion of feminine literature. Its analysis can reveal the social and psychological causes of this phenomenon, thus pointing out the historical position and wrong understanding of feminine literature’s women’s social roles’ orientation in the aspect of its love description.
China belongs to the‘the oriental world’,and she had close relation with these nations such as Indian, Japan and Korea. Some modern Chinese writers created a series of fictions depicted Korean resisting Japanese aggression, which manifested the deep feelings between the two nations. In general, more writers in modern China described these countries as draggling and barbarian land; on the other hand, some writers regarded them as the narrative background of romantic exotic theme, which revealed certain complex of ethnocentrism.
The earliest national flag in Chinese history is that of Qing empire. However, there have been some widespread incorrect views concerning its origin and final establishment. This essay gives a critical review of the national flag of Qing empire in following respects:1. the conflicts between China and Western countries that were precipitated by way of national flag;2. the issuing of the yellow dragon flag;3. Horatio Nelson Lay’s design of the national flag for Qing empire;4. the first dragon flag that rose in the West;5. the establishment of the final form of the national flag of Qing empire. By such discussion, the author tries to clear up some ambiguities about the issue of the national flag in Qing dynasty.